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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들의우상 Dec 14. 2021

당신의 아이는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과외를 시작한지 4년이 다 되어간다. 시작은 어떤 콧대 높은 강남 대치동의 한 고3 학생이었다. 좋은 학군에서 나고 자라면서 그 교육열 높은 동네에서 공부까지 잘하니, 본인 스스로가 넘치는 자부심에 어쩔 줄 몰라하는 느낌이었다. 과외 선생님을 구하는 글에도 그 자만심이 엿보였다.


'생명과학1 6월 9월 수능 세 시험 모두 다 맞은 사람을 원합니다.'


사실 이 문구를 보고, 아 이건 지원자가 극히 적겠다라는 생각에 냅다 지원해서 성사되긴 했지만, 가면서도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긴 했다. 수업이 진행되고 두 번째 수업을 가게된 날, 학생이 숙제를 안해왔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왜 이럴까 싶었는데, 내가 내 준 숙제가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기출문제 분석은 자기는 이미 다 끝냈는데, 굳이 이걸 왜 또 풀어야하나 싶었나보다. 그래서 뭐가 하고 싶으냐 하고 물으니, 사설 모의고사 하나를 꺼내더니, 어려운 문제들을 질문하고 싶다더라. 3월의 고3이 풀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왠지 거절하면 기싸움에서 지는것 같아, 받아주고 눈 앞에서 다 풀어버리니, 그제서야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본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날의 미묘한 대치 상태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어지는 수업에서도 그 자만하는 태도는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얼마 못가 기분이 더러워 때려치고 말았다.


그 학생이 내 마지막 최상위권 과외생이었다. 그 뒤로는 과목별 과외는 가능하면 맡지 않았다. 어차피 부모님이 용돈도 풍족하게 주시는데, 괜히 일하지말고 놀러다니고 싶기도 했고, 과목별 과외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하니 그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생각한게, '학습코칭' 이었다. 학생에게 공부 방법, 공부 계획, 커리큘럼, 방향성 등을 지도하고, 교과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 그런 과외와 컨설팅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수업이다. 우리 학교 다른 학과에서 반수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해서, 과외 어플에 있는 학생들까지 이제 어언 10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모두가 바뀔 수 있다는걸.


내 동기가 그러더라. '너는 어떻게 과외 문의만 들어오면 그게 다 성사가 되냐. 대체 학부모한테 뭐라고 얘기를 하는거냐.' 항상 세 치 혀로 먹고 산다고 나도 웃음으로 넘기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그 희망을 보고 나를 고용하고, 나는 최선을 다한다. 그뿐이다. 학습코칭을 벌써 4년째 해오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애는 똑똑한거 같은데,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서 애가 못하는것 같아요.', '우리 애가 모자라지는 않은데, 그냥 책상 앞에 앉아있는걸 잘 못해서 공부를 못하는거 같아요.' 등등 20명이 넘는 부모들과 통화했지만 항상 빠지지 않는 얘기들이 있다. 그 때마다 속으로, '아닙니다. 당신의 자녀는 똑똑하지 않을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라고 생각하지만, 또 동시에 '그래도 충분히 발전할 수 있습니다.'라고도 생각한다. 부모들이 자식의 능력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야한다. 그래야 학생이 발전할 수 있다.


자식의 능력에 대한 기대가 높은 부모들은, 학습코칭 한 달만에 어떤 드라마틱한 결과를 기대한다. '이 애는 코칭을 시켜봐도 별 소득이 없군요. 선생님과 잘 맞지 않아보입니다.' 라던가, '우리 애는 공부를 할 만한 머리가 아닌가 봅니다. 다 돈낭비인거 같아서 그만두려구요.' 등등.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얘기한다. '학생이 발전하려면 최소 3개월은 기다려주셔야한다', '내가 돈을 벌려고 이러는게 아니다, 원래 습관이 형성되려면 그렇다' 등. 하지만 다들 3주를 못기다린다. 하루에 공부 30분도 안하는 우리 아들이, 통화로 하루에 몇십분 코칭을 받고 나면 갑자기 세뇌라도 된 듯이 하루 8시간을 공부하기를 원한다. 그게 됐으면 내가 의대를 때려치고 대치동 컨설팅 회사를 세웠을 것이다. 돈은 의사보다 훨 벌겠지.


며칠 전 자고 일어나니, 코칭을 시작한지 2주 된 학생 아버지에게 과외 중단 통보가 왔다. 중학교 2학년 이후부터의 교육과정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고, 현재 고등학교 1학년 수업도 쫓아가지 못해서 전과목 과외를 하고 있으나 성적이 바닥에 머물러 있는 학생이었다. 학생 아버지는 구시대적 교육관이 너무 강하고 자신의 아들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통화로 이미 몇 번 부딪혔는데, 이렇게 빠르게 그만둘 줄은 몰랐다. 안타깝게도 그 아들은 꽤나 성실하게 코칭에 참여하고 있었고, 이대로 한 두달만 지속하면 공부 습관은 확실히 잡고 이제 수능준비로 넘어갈 수 있겠다 싶은 상태였다. 해고 통보를 받으니, 참 안타깝더라. 진짜 두 달만 내가 더 잡아주면 저 학생은 지금 저 늪에서 나갈 수 있을텐데. 통화로 설득해보려 했으나, 결국 돈을 바라고 수업을 연장하자는 느낌으로 비춰지는것 같아 이내 그만두었다. 이번 주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에게 현재 상황을 밝히니 본인도 굉장히 답답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마음이 또 안타까워서 최대한 잘 마무리해서 보내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고작 며칠로 그 친구의 삶을 바꾸는건 쉽지 않아보인다.


공부는 학생이 하는거다. 정말 많은 교육열 높은 부모들이 내가 우리 애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부모들은 자식의 학습 상태에 대해 정말 화가 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른다.(나한테 학생말고 본인에게 수업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학생한테는 자신이 전달해주겠다며.) 참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안타깝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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