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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Mar 18. 2024

사랑의 다른 이름,

#2 자카르타



비가 그친 후에, 땅에서 나는 흙냄새는 은서에게 왠지 모를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려 정원 의자에 기대앉았다.

비를 맞고 기지개를 켜는 듯 꽃들은 한껏 물을 머금고 생명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은서는 며칠 전 결연한 모습으로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던 가연의 모습이 내내 기억에서 떠나질 않았다.

겪지 않아도 될 나쁜 일들로 친구의 인생이 꼬이는 것 같다.

이혼수속이 마무리되는 대로 가연이 뉴질랜드로 떠난다고 했다.

은서는 아직도 이런 일들이 친구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일요일 오전의 평화로움을 샘이라도 내듯이, 날카로운 전화벨소리가 울린다.


'은서야, 나 지금 공항이야.'


'엉, 어디? 공항이라고? 어딜 가는데? 벌써 다 정리된 거야?'


'급하긴, 하나씩 물어. 지우 아빠가 거기 자카르타에서 사업한다고 했잖아. 이혼 수속 밟아야는데 아무리 연락해도 대답이 없다. 이 남자. 끝까지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휴~.'


'그럴 리가 있니? 무슨 일이 있겠지.'


'그 남자 동의 없이는 합의이혼도 안되고 소송도 길어져.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이혼하겠다는데 나라가 못하게 막는다, 막아.'


'그래서 지금 자카르타 가는 거야? 지우는 어쩌고?'


'지우는 엄마한테 잠시 맡겼어, 어쩔 수 없잖아.'


가연의 목소리는 지쳐있었고 조금은 날이 서 있듯 예민하게 느껴졌다.

며칠 전 비오던 날 카페에서의 차분한 느낌과는 달랐다.

할 일을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처리하는 가연의 성격은 여전하다.

스스로의 길을 헤쳐나가고자 분주한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출국이라 은서는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우리가 결혼해서 살 때 준우 씨가 일산집 전세금 빼 간 거 내가 얘기해 줬지?'

 

'응, 그때 너 분해서 얘기했잖아.'


'도대체, 연락이 안 되면 어떡하라는 거지?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지. 끝까지 너무 무책임해.'


'그랬구나,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벌써 세 달째야. 오죽하면 내가 거기까지 갈 결심을 하겠니? 이번에 찾아가서 자초지종도 묻고, 앞으로 얘기도 듣고 싶어, 내 말은 합의이혼 후 위자료와 지우문제도 그렇고.'


'결혼생활이라는 게 생각만큼 단순한 건 아니구나...'


'결혼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했는데, 이혼은 왜 이렇게 어렵냐. 쉬운 일이 없네ㅠ.'


은서는 전화기 너머 가연의 답답함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생살을 비비며 산 세월이 십 년 가까이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인생에 다반사지만 그 인연에서 결혼까지 가는 일은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 끈이 어찌 쉽게 끊어지겠나, 하물며 둘 사이엔 지우가 있지 않나.


익숙한 공항소리가 들렸다.

떠난다는 기대감으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비행기가 이, 착륙하는 굉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소리.

그 한가운데 가연은 홀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연의 목소리는 다부진 성격과 다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준우 씨 사는 곳은 알고 있어?'


'아니, 몰라. 아는 거라곤 그 사람이 설립했다는 회사이름 하나야. 자카르타 외곽에 버까시 어디라고 했어. 자카르타 도착해서 한인회든, 대사관이든 어디든 가서 이 사람 꼭 찾아내서 마침표를 찍어야지. 이대로는 안돼.'


학창 시절에 모범생으로만 지냈던 친구였다.

공부를 잘해서 사회 나가서도 한자리 꿰차서 야무지게  줄 알았다.

정우성을 닮은 귀티 나게 잘 생긴 남자와 결혼한다고 다들 부러워했는데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가 보다.





가연이 수에까르노하타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열대지방의 훅하는 공기가 온몸에 착 와닿는다.

답답한 마음만큼이나 폐부에 와닿는 공기도 끈적하다.

공항을 오고 가며 이동하는  많은 차량과 사람들의 행렬은 어느 공항이나 비슷한 모양새다.

도착장에서 피켓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가연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짐을 찾아 끌고 지체 없이 공항 밖을 나선다.

이제부터 준우를 찾아야 한다.

열대의 도시는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가연은 더운 지방에 오느라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습한 공기에 벌써 땀이 흐른다.

노란색의 택시를 타고 자카르타 중심부에 잡아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한다.

공항을 나와 길가로 늘어선 야자수 나무를 보니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낯선 곳에서 김서방 찾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준우를 찾아볼 생각이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힌 그의 회사이름.

PT. MERAIH 가 점점 또렷하게 커져온다.

내일 이 회사를 찾기 위해 대사관과 한인회를 가볼 생각이다.

가연은 시내로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 늘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는 늘 정직한 결실로 돌아왔건만, 결혼만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안되는구나. 멍한 가연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또르륵 흐른다.


자카르타 시내가 가까워 올수록 차들의 정체는 심해졌다.

서울처럼 높은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자카르타 시내는 어지러웠다.

언젠가 전화로 준우가 데려와 보고 싶다고 했던 곳이 여기인가.

그땐 그랬지. 성공하면 가연을 데리고 세계일주를 다니고 싶다고 낭만적인 약속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연은 이런 사치스러운 감정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아 고개를 휘저었다.

어느새 택시는 자카르타 서쪽에 위치한 딴중두렌이라는 곳에 가연을 내려주었다.

주택가가 일렬로 줄지어 있고 마침 이슬람사원의 경전을 읽는 듯 경건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사원이 있다고 관리자가 말해주었다.

가연은 신이 있다면 분명 약자의 편을, 아니 정의의 편을 들어주시겠지. 힘없는 여인의 팔을 잡아주시겠지 생각하며 짐을 풀었다.


멀리서 알 수 없는 그러나 졸리는 리듬의 이슬람 경전 읽는 소리가 가연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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