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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Mar 11. 2024

사랑의 다른 이름,

#1 A Marriage

며칠째 장맛비가 내렸다. 

우산을 툴툴 털며 도착한 가연은 카페의자에 앉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연과 은서는 단짝이었다. 

오랜 시절 함께 한 사이라 표정만으로도 은서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음을 감지했다.


"잘 지냈지?"


"그냥 그랬어. 뭐 마실래?"


늘 그러하듯 가연은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가 먼저다.

 둘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은서는 이런 날씨에도 아이스를 시키는 가연을 보며, 참 많이 다른데도 어떤 지점에서는 참으로 비슷한 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커피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그렇다. 

살면서 그런 통하는 지점들이 있어 둘의 우정은 계속되어 온 것이 아닐까.


“나 이제 정말 우리나라 떠나려고..

조금 늦었지만 하고 싶었던 저널리즘 공부할 거야.”

 

수채화처럼 맑았던 가연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공부를 잘해서 사회생활도 오래오래 하면서 승승장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동기들의 생각을 보란 듯이 깨고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남자와 가정을 꾸렸다. 결혼도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처럼 마냥 아름다울 줄 알았건만 어린 신부에게 시댁과 남편의 외도 무게는 만만치가 않았나 보다.


“결혼이란 제도는 문화 폭력이야.. 한 남자랑 평생이란 시간을 살아야 하다니.”


묵묵히 듣기만 하던 은서는 뜨거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놀라기도 했지만 늘 모범생이었던 친구의 입에서 나올 문장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가연의 잘생긴 남편은 사랑이 넘쳐서 담장 밖으로까지 흘러넘쳤나 보다. 

친구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설픈 위로가 힘이 되어 주지 못할 것 같다. 

은서의 시선은 자꾸 창밖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보게 된다.


한 무더기 젊은 엄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옆 테이블에 앉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둘의 대화를 흔들고 있었다.

마침 엊그제 세계적인 영화제의 수상 소식 이야기로 시끄럽다. 

고혹적인 여배우와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감독의 연애사가 주된 관심사인 듯했다. 

매력적인 여배우는 부녀 같은 나이 차이를 넘어 아비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감독과 무모한 연애 중인 모양이었다. 

화려한 애인들을 가졌던 그녀가 왜 기혼의 중년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지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가정파괴범이라는 수순을 거치며 조강지처를 버리고 미색을 탐한 남자의 파렴치함까지 그녀들은 빵과 커피에 적절하게 섞어서 그 영화감독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간 가연을 기다리면서 어느 사이 은서는 그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연일 내리는 비는 도시와 사람들의 건조함을 씻어내고 있었다.

 통창을 우산처럼 이고 앉은 옆 테이블 그녀들의 가정은 신뢰와 사랑으로 쌓아 올려진 철옹성같이 견고하게 느껴진다.  


“결혼은 한시적 계약이어야 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여전하면 재계약하는 거고, 아니면 종결되는 거고…….”


피곤해 보이지만 테이블에 돌아와 앉으며 이렇게 얘기하는 가연의 모습은 결연해 보였다. 

가연 많은 날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하긴 백 살까지 산다는 요즘 세상에 믿음을 저버린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는 것 또한 고문일 것이다. 

부부 사이의 묘묘함까지 알 수는 없지만 수많은 질문과 만 가지의 대답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고민했을 가연의 시간들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자녀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자신의 행복처럼 타인의 감정도 존중해야잖아. 

사랑이 마음대로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거고. 

자신을 속이며 사는 거나 속이며 살라고 남에게 강요하는 건 죄야. 그게 합법이라도 ……. ”


가연이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피폐해지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의 행복할 권리와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행복 그리고 아이의 행복까지, 공통분모를 최대한 넓히려 외로운 싸움을 홀로 하고 있었다. 

후회나 슬픔의 특이점을 지닌 가연의 눈은 빗물에 씻긴 유리창처럼 맑아 보였다. 

가연의 말은 불빛이 되어 결코 들춰 보지 않을 은서 맘속 깊은 곳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은서는 가연이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옆자리 여인들이 요란한 의자 소리를 내며 들어왔을 때처럼 몰려나갔다. 

아직 그들의 결론을 듣지도 못했는데 물음표만 남기고 떠났다. 

창밖에 우산을 들고 어디론가 바쁜 사람들도 사랑과 믿음과 책임의 줄다리기를 하며 오늘도 살아갈 것이다.


가연은 떠나는 길을 배웅해 줄 한 사람이 떠올라 빗길을 헤집고 온 모양이었다. 

가연의 맑은 심성과 부지런함을 알기에 어디서건 그녀답게 잘 살 것을 안다. 

여전히 결혼은 한시적 계약이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그럼, 몇 년이면 좋을까…


은서는 가연을 떠나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결혼이야기에 이렇듯 마침표를 찍어 버리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고 통보하는 가연의 용기는 자신의 소심함과 너무나 다르다.


카페 통창 밖으로 도시를 물에 쓸려 보내버릴 듯 빗줄기가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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