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은 딱하신데, 요즘 그게 개인정보라 알려드릴 수가 없고요, 그리고 이곳은 그런 업무를 하는 곳이 아닌데, 어쩌죠. 한인회에 연락을 해보시는 게 빠를 텐데요.'
가연은 아침에 서둘러 대사관에 전화를 했다.
형식적인 말투와 영혼없는 친절로 잘 버무려진 직원의 목소리.
낯선 곳에서 듣는 익숙한 한국어가 이렇게 냉정하게 들릴 수가 있구나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한인회에서도 마찬가지의 답이었다. 남편의 회사는 한인회 목록에도 없다고 했다.
당신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그런 사정들 부지기수였다는 그런 관조적인 자세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무작정 오는 게 아니었구나 가연은 순간 자신의 행동이 너무 감정적이었나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최선의 선택이었다.
답답해진 가연은 숙소의 에어컨을 무의식적으로 높였다.
습한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천장에서 흐물흐물 무언가 기어가는 것 같아 순간 아악 소리를 질렀다. 작은 새끼도마뱀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 호스트는 웃으며 찌짝이라고 했다.
잠이 들었을 때 얼굴에 떨어지면 어떡하냐며 반 울먹이듯 이야기하니, 물론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가연은 흐물거리는 이 도마뱀이 천정에서 떨어지는 상상을 하니 온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여기 머무르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된다고 했다.
일상적인 일에 호들갑을 떤다는 식의 대꾸에 어이가 없었다.
열대지방의 집에 사는 찌짝은 파리나 모기를 먹고사는 이로운 동물이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롭게 한다니 이젠 더 이상 항의할 여지가 없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다른 종족을 이롭게 하는 미물도 있는데, 하물며 인간은 상처 주고 믿음을 저버리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구나 싶어 가연의 마음은 어두워졌다.
한인회 직원은 전화 끝에 가연의 처량한 목소리에 혹시 모르니 일요일에 한인교회를 가보라고 했다.
어쩌면 그곳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가연은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주말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게 금요일이었으니 벌써 이틀을 보내버렸다.
준우는 크리스천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업을 위해서라면 교회를 다니고도 남을 사람이다 싶었다.
가연은 준우에 관한 어떤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희망을 가지고 한국사람들이 제일 많이 다닌다는 자카르타소망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는 절실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기도를 하다 말고 준우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나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예배 후, 친교시간이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커피와 가벼운 음료를 마시며 타향살이의 소소한 감정들을 나누고 있었다. 다들 이곳에서 오래 살아서 인지 적도의 햇빛에 피부들이 구릿빛이었다. 한국교회인데 인도네시아 현지인도 더러 보였다. 주로 여자들이었다. 어색한 가연은 조용히 일어나 친교실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습했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저희 교회 처음이시죠? 예전에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느라 잘 차려입은 한 중년신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처음이에요. 교회가 참 따스하고 분위기 좋네요.'
'인도네시아에는 어떤 일로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가연은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준우 씨 혹시 아세요? 제가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아님 들어라도 보셨을까요? 이건 회사이름이고요.'
가연은 호주머니에서 준우의 회사명이 적힌 종이를 꺼내보여 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회사이름이 PT MERAIH라.. 이런 회사는 처음 들어보는데...'
가연은 혹시 몰라 아들 지우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속의 준우 얼굴을 생판 처음 보는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뚫어지게 사진을 보던 남자는 노안이 온 건지, 아님 원래 눈이 나쁜 건지 사진을 눈에서 가까이, 또 멀리 갖다 대며 어딘지 익숙하다는 듯 사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앗, 이 분은 Andrew 씨 같은데,
저희 동네에 한국분들이 좀 사시는데, 동네서 몇 번 뵌 것 같아요.'
가연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사진을 보여주길 잘했다 싶었다.
'실례인 줄 알지만 너무 급해서요. 근처 주소라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가연은 JL. Kelapa Gading 거리의 주소를 받아 들고, 교회를 오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지긋한 현실을 얼른 벗어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교회에서 만난 중년신사는 혹시 모르니 자신의 전화번호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가연은 렌트한 차의 오른쪽 운전휠을 조심스럽게 조정하며, 내비게이션에 JL. Kelapa Gading 주소를 치고 운전해 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이라 어색함도 있었지만 처음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막상 그가 사는 동네 주변이라고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처음부터 끝집까지 다 문을 두드려서라도 준우를 만날 생각이었다.
끌라빠 가딩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서울이라면 꽤나 집값이 나갈 듯한 단독주택들이 정돈된 모습으로 한눈에 봐도 부촌이었다.
일요일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가연은 천천히 운전해 가다 일요일 오후를 즐기며 산책하는 가족들, 연인들의 모습을 지나쳤다.
잠시 후, 백미러에 스쳐가는 세 살 남짓 여자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가는 아빠의 모습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인도네시아 현지아이들은 눈망울이 크고 피부결이 유난히 좋아 보여 순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꺄르륵 웃는 아이를 보며 아빠도 덩달아 행복한 표정이었다.
순간, 가연은 행복한 남자의 웃는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천천히 운전해 가다 이제 거의 기어가듯 차는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가연의 손은 자동차 핸들을 꽉 쥐고 있었고 눈은 백미러를 통하여 멀어져 가는 아빠와 여자아이를 지켜보았다.
뒷모습이지만 분명 준우였다.
가연은 가까운 주택가에 잠시 차를 정차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다시 한번, 백미러로 그를 확인했다.
갈지자를 그리며 걷는 그의 팔자 걸음걸이며, 그의 볼록한 뒤통수, 주말이면 편하게 입던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까지 모든 것이 한준우 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만나면 어떻게 할지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렸었건만, 막상 그를 재회하니 심장이 멎었다.
이제 돌아서 한준우 부르면 그가 돌아볼까?
저 옆의 아이는 누굴까?
짧은 순간 가연의 머리를 스치는 많은 생각들,
가연은 단숨에 이런 생각들을 끊어내기라도 하듯, 차에서 내려 아이 쪽을 향해 단호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