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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Apr 01. 2024

사랑의 다른 이름,

#4 인연

#1 A Marriage,

 #2 자카르타

 #3 재회

'bapak, bapak siapa ini?'


커다란 눈망울에 갈색 피부, 작은 입술을 가진 꼬마아이가 준우를 보며 질문을 하는 듯했다.

비행기 안에서 무심결에 펼쳐보았던 인도네시아 관광책자에 나왔던 단어들,


엄마 ibu,

아빠 bapak.


바팍이 뭐야 바팍이 하면서 웃기다 생각하고 넘겼던 단어를 다시 만난 준우 앞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가.. 연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


가연은 무어라 따지고 물어야 하는데 구릿빛 똘망한 눈을 가진 여자 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과 마주쳤다.

지우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준우 씨가 지금 이 상황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떠난 사람이 먼저 변명해야 되는 것 아냐?'


'그래, 내가 다 설명할게, 전부 다. 근데 얘기가 길어, 어,.. 음 여기선 어려울 것 같고, 숙소는 어..디야?'


준우는 초점 없는 눈동자에 가연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기대한 것도 없었지만, 막상 눈앞에 마주한 어쩔 줄 몰라하는 준우의 모습은 더욱 실망스러웠다.

나름 이곳에서의 생활이 맞는지 얼굴도 건강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마주한 그의 괜찮은 모습을 보니 며칠 동안 아니 몇 달 동안 걱정과 분노로 보낸 가연의 시간들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나쁜 새끼, 나한텐 그렇다고 쳐도 아빠로서 지우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가연아, 나 성공해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다 얘기할게, 제발 들어줘.'


이 순간에도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합리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남자.

준우는 오직 인간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온갖 가식들로 자신을 휘감고 있었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본인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네 변명 따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왔겠니? 이미 선을 넘은 관계,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우리 관계 깔끔하게 정리해 줘.'


'가.. 연아, 정말 모르겠어? 내가 왜 여기까지 일하러 왔는지, 우리 가족을 위해 잘해보고 싶었다, 정말.'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아빠를 지키려는 여자아이가 아비의 손을 꽉 잡는 것을 가연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남 탓, 주변탓 하는 준우의 모습은 여전했다.


'잘해보고 싶어 이렇게 되었고,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는 건가. 넌 항상 비겁했어 이런 식으로 책임회피하잖아.'

'서류정리 그리고 앞으로 지우 양육권에 대한 문제만 준우 씨와 합의되면 나 바로 정리하고 어디든 가서 새 출발할 거야. 지우를 위해서라도. 그러니 피하지 말고, 내 문자, 카톡에 꼭 답해.'


'...'


돌아서 길에 세워둔 차로 돌아오며 가연은 가슴 한켠이 썰물에 빠져나가는 듯했다.

싸대기라도 때려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아이 앞에서 추태를 보이지 않은 게 잘한 거야 애써 스스로를 칭찬했다.

남들은 쉽게도 하는 이혼마저도 나는 이렇게 혼자 애써가며 열심히 이루어 내고 있구나 가연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거미줄이 쳐지고 있었다.



며칠 지냈다고, 여기도 집이라고, 침대에 누우니 편했다.

천정에 한 마리였던 찌짝이 두 마리로 늘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소스라치게 놀라며 호스트에게 전화 걸고 난리를 쳤건만 이제는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아예 침대에 누워 가연의 시선은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준우를 만나고 나니, 이혼에 대한 가연의 마음은 더욱 결연해졌다.

남아 있는 인생을 아닌 인연에 엮여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우의 행복도 중요하고 가연자신의 꿈도 중요했다.

가연과는 아니었던 인연 준우도 제 업대로 자신의 인생 살아가길 바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한지가 언제였던가.

일요일이라 문을 연 식당도 없을 텐데...

잘 먹어야 제대로 일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은 식당을 검색해 보니, 가까운 곳에 호텔이 있었다.

바깥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호텔에서 식사를 마칠 때쯤 문자도착음이 울렸다.

준우였다.

주소를 알려주면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연락해도 답이 없더니, 궁지에 몰리긴 했던지 그의 문자가 온 것이었다.

가연은 에어비앤비 딴중두렌의 주소를 찾아 복사를 해 준우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와인도 한잔 주문했다.


'실례..입니다. 당신은 한국에 사람입니까?'


잘 차려입은 미국사람 같은데 가연에게 한국말을 건넸다.

이 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순수한 눈빛의 외국인은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듯했다.

평소 같으면 냉정하게 잘라 말을 했을 텐데, 가연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는 한국인이고 여긴 인도네시아지.'


낯선 사람의 질문으로 자신의 처지가 느껴졌다.


'저는 영국에 사람입니다. 한국을 사랑합니다.'


'You should say 저는 영국사람입니다.

No 영국에, You don't need to say에.

영국사람 is one word.'


가연의 지적이 고마왔던지 영국남자는 Harry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초등학생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악센트가 아이같으니, 커다란 성인남자가 그 나이로 보이지 않고 어려보였다.

해리는 버벅거리면서도 끝까지 한국말로 질문하고 답하고를 계속했다.

영국신사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해리가 그다지 나빠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영어로, 또 단순한 유아 수준의 한국말로 대화를 하면서도 오랜만에 가연은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술기운 때문이었을 수도.


몇 년만에 다시 만난 가연으로 준우의 마음은 흐트러진 방처럼 어지러웠다.

문자를 보내 주소를 확인한 준우는 늦은 밤이지만 가연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밤이 되면 자카르타에도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가연이 준 주소의 주택은 불이 꺼진 상태였다.

준우는 차 안에서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며 운전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한참이 지난 후, 가연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준우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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