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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Apr 08. 2024

사랑의 다른 이름,

#5 새로운 시작

#1 A Marriage,

 #2 자카르타

#3 재회

#4 인연


후회하지 않겠다고 가연은 생각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형체가 있어 분별할 수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웠을까?

가연은 어제 준우를 만난 일이 아스라한 과거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대학에서 소개팅으로 준우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가연과는 많이 달랐다.

대가족에서 자라 정도 많았고, 주체할 수 없는 유머와 활달한 성격,

준우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연은 처음엔 그런 게 좋았다.


결혼을 하고 준우는 잠자리에서도 늘 주도적이었으며,

급했고 자신의 욕구분출이 우선이었다.

처음엔 그것도 사랑이겠거니 생각했지만, 그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

가연은 잠자리를 통해 서로의 대화를 원했다.

하루를 고스란히 견디고 온 피곤한 몸에 그의 손길이 와닿아, 부드럽게 안아주길 바랐다.

그에게 관계는 남자와 여자가 뜨겁게 사랑을 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연에게 섹스는 나의 남편에게만 할 수 있는 또 받을 수 있는 위로이자 배려와 공감과 사랑의 대화였다.

준우는 가연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했고 후회는 없었다.

서로에 대한 개인의 감정은 이제 그 한도를 다했고, 결혼은 이제 끝을 향한 형식적인 서류만 남겨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창 밖 야자수에 뜨거운 햇살이 이미 내려앉아 있었다.

가연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어젯밤 해리와 술을 기분 좋게 마셨던 기억이 났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유쾌했다.

해리가 어눌한 한국어를 굳이 사용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을 설명하고, 한국의 요리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던 것까지는 생각이 났었다.

그리고 많이 웃었던 기억도,

또 갑자기 지우가 보고 싶다고 해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울어버렸던 것도 생각이 나자 그런 행동을 했던 자신이 민망해져 자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집에 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누군가의 부축으로 집까지 왔었는데.... 그게 해리였나.


'서울에서도 하지 않던 실수를 낯선 곳에서 한 것일까?'





아침이 왔다고, 이곳의 새들도 부지런히 울어대며 하루를 시작한다.

간밤에 마신 술로 갈증이 느껴져서인지 습한 공기가 더 매스껍게 다가왔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만 뜨고 멍 때리고 있던 가연은 잠에서 호드득 깼다.


'한준우 씨 아내, 이가연 씨 맞으시죠?'


'저는 재인도네시아 한국영사관 직원입니다.

남편분이 교통사고로 자카르타 실로암병원에서 응급처치중에 지금 막 운명하셨습니다.'


꿈결인줄 알았다.

몇 시간 전까지도 만나 준우의 눈을 보며 이혼을 이야기했었다.

교통사고 지점이 가연의 숙소부근이었고, 음주운전이라고 했다.

상대방도 중상을 입어 같은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했다.

게다가 급하게 유턴을 하다 근처 나무도 들이받았다고 했다.

미운 사람이었지만 이런 결말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연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사관 직원이 일러준 병원에서 준우를 마지막으로 조우했다.

피투성이의 상처로 생채기 난 그의 몸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머리 부분을 부딪혔는지 그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지만 분명 준우였다.


영사관 직원은 시신인도에 대한 절차를 이야기했으나 가연은 시골의 준우어머니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절차까지만 본인이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준우의 지난 행적을 다시 짚어가며 한때의 법적 어머니였던 분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일찍 도착한 카페에서 은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가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중이라 한산한 카페에는 컴퓨터를 켜고 공부하는 사람들, 조용히 책을 보는 몇몇 사람들도 보였다.

카페 벽에 걸린 시계가 한시를 가리키자 가연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정말,  잘 지냈니?'


서둘러오느라 가연의 머릿결이 흐트러져있었다.

자카르타에서 며칠 지내다 와서인지, 미루었던 숙제를 다 한 아이처럼 가연은 홀가분한 표정이었지만 많이 말라있었다.

급하게 들어선 가연은 의자를 잡아당기며 은서 맞은편에 앉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가연의 피부는 적도의 햇빛에 그을었는지 더욱 건강해 보였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제 호주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하고 왔어.'

'거기서 다시 공부하고, 지우 유치원도 거기서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천천히 얘기해.'


갑작스러운 준우의 사고 소식에 은서도 놀랐었지만 한꺼번에 불어닥친 친구의 불행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도 몰랐어서 은서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가연은 채근대지 않고 때로는 언니처럼 자신을 지켜봐 주고 믿어주는 은서가 편하고 좋았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해 내면서  마음속에 비가 내리고 화난 마음에 불이 났을 때에도 은서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가연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은서는 엊그제 직장에서의 회식자리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부장은 꼰대같은데, 이전상사보다는 일처리가 깔끔해서 좋다고 했다.

가연은 평범하지만 그 속에서 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은서의 성실함이 좋아보였다.


띠리릭띠리리


두사람의 대화를 갈라 놓듯 가연의 문자벨이 울렸다.


'저는 영국사람 해리입니다.

.

.

 한국오면 술 마시고 콩나물 해장국 사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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