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부탁해 강북문화정보도서관 동아리 1월 주제 '내가 바라는 나'
친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주에 친정에 내려가는데 애들이랑 같이 놀아주게 오라는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이번 주말에는 대학교 친구를 만나야 해서 안될 것 같아. 한 달 전에 시간 약속을 잡았거든. 그 약속을 어기다 보면 우리는 이제 만날 수 없어."
언니는 알겠다는 듯이 그러면 다음에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렇게 가족모임을 미루고 지난 주 친구를 만나러 갔다. 리브는 나의 대학교 06학번 동기로 올해로 18년째 나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간에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리브는 해외에 있느라 서로 떨어져 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드문 드문 편지나 이메일로 소식을 이어가다 한 번씩 리브가 한국에 들어오면 다시 만났다.
우리가 처음부터 그렇게 친했던 건 아니다. 리브의 첫인상을 무척 날카로웠다. 처음 인사하는데 나를 어찌나 어색하게 째려보던지, 날카로운 울프컷 같은 머리에 나이키 후드집업을 입은 차림새였다.
"너 첫인상 특이했어."
리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시골 학교를 벗어나 동네 친구들만 만나다가 서울에 가서 새로운 애들을 만나니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했다고. 낯을 그렇게나 가린다던 리브는 4년 후 혼자 호주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며 살게 된다. 겁이 많은 나로서는 타지에서 혼자 산다는 것이 놀랍고 과감하게 느껴졌다. 한 편으로는 지원해 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물론 부럽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솔직하게 부럽다고 했다. 우리는 꽤 서로에게 솔직해서 오해하거나 꼬일 게 없다. 그 자리에서 모두 말해버리고 만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일을 시작한 리브는 일도 사랑도 고민이 많다. 나 역시 물론 아이를 키우며, 남편과 살며, 부모님 이야기 등 못할 이야기 없이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고 털어놓는다.
리브를 만나면, 나는 가족을 잊고 20대 새내기로 돌아가 비싼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척척 시켜 먹고, 팬시점 가게에 들어가서 비싼 마스킹 테이프도 사본다. 리브는 알까 평소에는 내가 그런 비싼 식당에는 혼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꽤나 주저하고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나 식당이 아니고서는 거의 들어갈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 리브가 합정에서 알아낸 맛집을 함께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먹으니 신기할 수밖에.
"이상해. 왜 너랑 있으며 음식이 맛있지?"
리브는 음식의 환상궁합을 안다. 척척 알아서 시켜주는 대로 나는 따라먹기로 했다. 그렇게 먹다 보니 이제는 무한 신뢰의 단계로 넘어갔다. 놀면 놀수록 서로의 쿵작이 맞아간다. 한 사람은 골라주느라 즐겁고, 나는 받아먹느라 즐겁고. 오늘은 안주거리 할 고민도 많으니 맛있는 음식과 함께 저녁까지 술 한 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1차, 2차, 3차, 4차까지 우리는 코가 삐뚤어지도록 먹고 술값도 꽤나 나왔다. 리브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중얼거린다.
"괜찮아, 나는 너 아니면 이렇게 돈 쓸데도 없어."
이런 궁상맞은 아줌마 같은 소리를 하는 나의 드립을 리브는 익숙하게 들으며 웃는다.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리브가 너무 좋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와 비슷하게 글을 쓰고, 같은 경제 수준이나 학벌을 가진 사람과 대화가 잘 통할 것이라고. 물론 리브는 나의 동기고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꼭 그런 조건만이 친해지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리브는 아직 미혼이고, 나는 또래보다는 일찍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래서 생활이나 가치관이 다소 다른 부분도 있다. 때때로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의견 차가 있어서 말을 하다가 막히는 경우도 물론 많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 어떤 남자를 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내가 그런 선택을 했으니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고 리브는 지금껏 선택하지 않은 만큼 혼자 지금껏 즐겁게 살아왔듯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에 만났을 때는 이 주제로 더욱 이야기를 하면서 의견 차이를 느끼기도 했는데. 우리는 더 이상 말하기를 멈췄다. 그건 리브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나도 참견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서 어떤 선택의 기회를 잃어간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나이라는 시계를 무시할 수 없어서 나 역시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결혼했으니까. 그게 그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의 편견에 휘둘려 결혼하는 것이 반항심이 들고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말대로 스물일곱에 결혼했기 때문에 그 당시 내가 조금은 남편에게 유리한 위치였다. 결혼은 결국 남녀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거래니까. 그렇게 선택한 보통의 테두리 안에서, 그 보통의 무게를 견디며 나는 그걸 안정감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다.
반대편에 리브가 있는 것이다. 내가 보는 리브는 무척 독립적이고 멋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어학공부를 꾸준히 해서 일어, 영어 자격증을 줄줄이 땄다. 이후에는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해외영업 일을 하고 있다. 계속 거듭나는 리브를 보며, 혼자 살아낼 힘을 키운다는 것은 참 고되지만 멋진 일이라고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리브를 칭찬해 주고 부러워한다. 대신 리브는 내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며, 결혼생활에 대한 미션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추켜세워준다. 리브도 나도 듣기 좋은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다. 이런 순간이 서로에게 너무 중요한 것 같다. 리브와 내가 서로의 삶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관계라는 게. 물론 그동안 우리 관계도 멀어질 때가 있었고, 살아가면서 각자 많은 위기 스스로 해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때 내가 가장 약해진 순간. 나를 무시하지 않고 내 옆에 있어준 게 리브였다. 연락해서 만나자고 해주었다. 내게는 정말이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느라 나올 수 없다고 하자 집으로 찾아와 줬다.
약해진 나를 당연하다는 듯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한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며 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다. 서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그 시간을 견디고 내게 남아준 리브에게 나는 고맙다. 그 당시의 나는 누가 툭 건드려도 화가 나 있고 매일 투덜거리는 사람이었다. 남 탓을 노래처럼 하는 못난 인간이었다. 그런 못난 소리를 참고 들어주고, 나를 그대로 보아주었다. 험한 말로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켜봐 주었다. 리브는 리브. 나는 나. 우리는 그 거리를 좁혔다 늘렸다 하며 함께 지금 이 시간 온전히 즐긴다. 나는 바란다. 리브처럼 그런 건강한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적당히 잘 지내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