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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가연 Dec 21. 2023

마이 퍼니 밸런타인 my funny valentine

강북문화정보도서관 독서동아리 ‘에세이를 부탁해’ 12월 주제 ‘고백’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a와 b에게 아주 지나가는 듯이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두 아이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활약을 하는 일짱과 이짱이었다. 동시에 두 명의 남자아이에게 초콜릿 상자를 주며, 네가 받든지 아니면 옆에 저 아이도 마음에 드니 전달해 달라고 했다. 사차원도 이런 사차원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요즘말로 자기 객관화나 메타인지가 떨어진 것 같다. 세상 근거 없는 자신감이 폭발해서는 너희 둘 다 마음에 든다고 한 셈이다. 두 아이다 나에게 별 생각이 없어서, 그 초콜릿은 당연하게도 내게 돌아왔다. 나는 타격감도 없이, 없는 용돈을 털어 산 초콜릿 맛있게 먹었다.


 b는 축구공을 차며 뛰었다. 4학년인 B는 초등학교 6학년도 거침없이 재치면서 골대에 골을 넣었다.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면서 날아다녔고, 뻥하고 찬 공은 힘 있게 뻣어나갔다. 나는 b가 축구하는 것을 관람하는 걸 그때부터 꽤 좋아했다.  B는 학교의 일짱으로 급식시간에 다른 친구들을 재끼고 매일 맨 앞에서 새치기를 하며 밥을 먹었다. 나는 싸움짱에 힘도 세고 축구도 잘하니 그래도 된다. 누구 불만 없지? 그런 목소리가 b의 행동에서 저절로 느껴졌다. 나는 b의 단순무식한 태도에서 염증을 느끼면서도, b가 내달리는 시원한 몸짓을 보면 심장이 뛰었다. 그런 에너지를 보면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다. 본능에 가까운 욕구니까.


어느 날 나와 b는 성의 초성이 같은 ㅅ이어서, 함께 당번이 되었다. 반장이어서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고 돌아왔는데, 세상에 내 가방이 그야말로 곤죽이 되어있었다. 같은 당번인 내가 돌아와야 같이 선생님께 청소확인을 받고 귀가할 수 있는데, 심부름 때문에 내가 늦게 돌아오자, 그분을 참지 못하고 내 가방을 차고 짓이겨서 가방 안에 든 우유가 터졌다. 가방 안은 터진 우유로 교과서가 다 젖어서 엉망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b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B의 에너지는 결국 폭력에 쓰였으니까.


그 아이는 훗날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었다. 티브이에서 초록 잔디밭을 달리며 이십 대 초반 아우디를 끌고 다닌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다.  영 앤 리치가 된 b를 상상해 보았다. 일찍부터 압도적으로 축구를 잘했던, 군대도 가지 않으려고 학교를 초등학교만 다니고 중학교를 진학하지 않았다. 곧장 그는 삼성과 계약한 인재였다. B는 나의 경쟁상대도 아니었으니 막연하게 b의 재능이 부럽고 대단하게만 생각했다. 그 반짝임, 그 찰나를 지켜보았다. b는 우월했다. 그를 보면 마치 계속 영원히 빛나고 위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운동장에 b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잔디밭에 그대로 쓰러져 한순간에 의식불명이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의 불행을 접하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생 시절 그 아이는 영원히 지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 생기와 에너지를 너무 운동장에 많이 써버린 것일까. 다행히 b는 다시 회복해서 예전보다 활약하지 못했지만 지방구단에서 선수로 지내며 축구인생을 마무리했다.


아무런 썸도 없이 B와는 그렇게 관중으로 인연을 마쳤다. A와는 보다 기묘한 형태로 만났는데, 그 아이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다. 축구장도 누볐지만 교실에서는 나와 공부로 대결을 했다. 함께 공동 반장을 할 정도로 리더십도 있었는데, 그만큼 a와 나는 경쟁을 하며 지냈다. 그래서인지 a와는 심각하게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집안에서 딸이어서 무시를 당했던 설움에 차서, 나는 학교에 등교를 하면서도 농구공을 튀기고, 커트머리로 남자아이처럼 다닐 때였다. 내심 마음속으로 남자아이들에게 나도 밀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a와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괜히 때리면서 장난을 칠 때도 거품을 물고도 이기려 들었다. 하지만 a와 싸우기만 했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거나 장난을 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무 감정적 교류 없이 갑작스럽게 건넨 초콜릿 상자를 받은 a는 그야말로 무반응이었다. 그렇게 다시 초콜릿상자를 돌려받았다. 어쨌든 a가 1순위였는데.. a는 태권도랑 축구만 좋아하지 여자에는 영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두 남자에게 아무런 싸인도 없는데 북 치고 장구치고 혼자 하다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그때는 모르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초콜릿 상자를 동네 팬시점에서 고르면서 얼마나 설레었던지…그 당시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a와 b에게 표현해보았던 것 같다. 짝사랑을 양다리로 하고, 심지어 고백까지 양다리로 하다니. 참으로 뻔뻔한 행동이었다.


다시는 없을 초등학교 잼민이 시절의 사랑고백을 가끔 떠올려본다. 더 많이 더 자주 실수하고 표현해 보았다면, 지금 추억할 거리가 더 많은 것이다. 내 아이에게는 언제나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보라고, 그 시절을 즐겨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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