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부탁해 11월 딱 좋은 시기
서른여덟 살의 나에게는 지금 당장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알람이 울리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의 내가 아닌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렸다. 완벽한 어떤 상태를 만들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다. 게다가 나에게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어떤 안정감을 주고 있다.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들이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준다. 이십 대 후반 백수라고 말할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떠올려보면 지금 이런 엄마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속 편한 자리인지 모른다. 게다가 이제는 엄마이고, 작가라는 꿈을 더해서 부족함이 없는 형태의 자아를 형성했다. 이 상황이 내게는 감사할 뿐이다.
헌데 지금 느끼는 이 안정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일까? 아닌 것 같다. 타인의 인정에서 오는 것일 뿐이다. 더 이상 누군가가 내게 궁금해하는 눈초리로 뭔가를 설명하라고 하지 않는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대한민국이 원하는 보통의 여자라는 것이 이렇게 편리할 줄이야. 이 상태를 위해서 나는 꽤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일에 대한 열정, 가사노동을 통해 뺏기는 시간, 육아를 하며 보내는 육체노동 등. 나는 이 보통을 위해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부모님은 세팅해 주셨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더 완벽하게. 적어도 4년제 인서울의 대학을 나올 것, 이십 대 안에 괜찮은 남자를 만나 얼른 시집을 갈 것, 결혼하고 1-2년 안에 아이를 낳고 언니와 같이 어울려 아이를 키울 것, 이런 가치관은 저절로 내 무의식 안에 흡수되었고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게 되었다. 정확히 같은 기간으로 언니와, 나와, 남동생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남동생도 언니와 나처럼 둘째를 낳을까? 우리는 참 규칙을 잘 지킨다.
우리는 부모님의 가치관이라는 컨베이어벨트에서 자랐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하면서, 그 이외의 모든 선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출산과 육아를 집중적으로 하는 기간 동안.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십 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과연 나는 같은 선택을 할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선택을?
안 할 것 같다. 내 아이들을 보고 싶어서라면 백번 이백번이라도 다시 이 길에 들어서겠지만, 아이를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완전히 혼자 살아보는 일. 나 스스로 이 세상에 서서 독립된 존재로 살아내는 일을 해보고 싶다. 그런 시험을 겪으며 부모님의 안전망을 벗어나보고 싶다.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이십 대 시절의 나에게는 자기 확신이나 투쟁심보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새벽 시간대에 외출을 하거나 외박을 하거나 혼자 여행을 가는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통금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이 조금만 늦으면 천둥처럼 소리를 지르며 친정아버지를 화를 내셨다. 여자다움. 순종적인 얼굴로 입을 가리며 웃기를 종용받았다. 모든 결정은 타인의 알람과 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삼십 대 후반을 바라보며.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 언제나 했던 질문이 '이게 맞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답이 정답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타인의 기준으로 따져보아도 이것이 객관적으로 맞는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메타인지와는 다른 결이다. 자기 확신이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주변에 당신들이 보기에는 어땠는지 물어왔던 것이다. 나의 이런 태도는 지인들을 만나면 언제든 결정을 미루며 네가 하는 것은 다 좋아라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네가 다 알아서 해. 나는 괜찮아."
그런데 사실은 괜찮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을 알기에 이제 삼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의견을 말한다.
"마라탕과 고수가 들어간 음식만큼은 먹지 않을 거야."
친구에게 그렇게 말하면, 그것을 뺀 나머지에서 메뉴를 고른다. 이것만큼은. 나는 그런 선을 정하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혼자 뿌듯해한다. 나도 뭔가 결정한 것이라고.
그런데 남편과 만나서 찌그락빠그락 싸우다 보니, 남편은 언제나 나와 싸울 때마다 '어쩌라고?'라는 태도였다. 네가 그렇게 느꼈더라도 본인 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대한 확신에 차 있고, 타인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영향을 받아도 자존심 때문에 티를 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외골수 같은 태도는 연애시절에는 남자다워 보이는 것으로 오해했다. 괜찮은 외모일 때말이다. 지금은 그렇게 미화하기는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언제나 '이게 맞나'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을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의 결정에 따라서. 남편은 어째서 나와 결혼을 했을까. 남편은 네가 하자고 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기를 방어한다. 알 수 없는 그의 태도에 대해서 이제는 좀 알아차리게 되었다. 연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 할 뿐이지 나와 똑같이 그도 확신이 없고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린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타인에게 이게 맞냐고 묻지 않다. 내가 느낀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확신을 같지도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바쁘게 살면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타인에게 관심이 크게 없고 적당히 서로 편하게 지내면 된다. 이게 맞는 것도 없고, 타인의 감정에 어쩌라고 대꾸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가 좋겠다.
지금 이 순간. 적당히 지내는 내가 좋다. 이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