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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가연 Jan 30. 2024

종이 : 이면지는 자유다.

나는 저렴한 것을 좋아한다. 싸면 쌀수록 완전히 놀이로 갈 수 있다. 나는 글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거기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창작을 하여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모든 생각은 일상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에서 출발한다.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하다가 우연히 떠오른 생각은 젖은 손을 대충 티셔츠에 문지르고 연필을 집어든다. 연필 또한 초몽당연필로 깍지에 끼워져 있다. 그렇게 많은 연필을 두고 아끼는 것에 쾌감을 느끼다니. 한 자루를 언제 다 쓸지, 그 다 쓰는 순간을 위해 마지막까지 세심하게 깎는다. 얼마 안 남았어!


요즘 고급 문구나 다이어리 용지가 많이 나왔지만, 내 가방에 늘 들어있는 노트는 집게로 집은 이면지다. 프린트를 하고 남은 뒷면을 활용한다. a4용지를 반으로 쭉 찢어 a5사이즈로 만들고 그 이면지를 활용한다.


이미 다 써버릴 대로 써버린 종이는 내게 말한다. 걱정 마 부담 없이 무슨 말이든 써봐. 용기를 준다. 그곳에 나는 보통 이렇게 적는다.


청룡의 해. 나는 올해 뭐 할까. 회고의 중요성.

선택과 집중하며 쉬어갈 것.

올해는 아이들을 챙기고 싶다는 마음을 잊지 말자.

어떤 일을 왜 굳이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

우울한 기분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하지 말자.

일에 끌려다니지 말자.


그런 식으로 적어두고, 바라본다. 한참을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을 종이에 쏟아낸 후 들여다보며 그것이 내 감정인지, 더 떠오른 다음 문장들이 없다면 거기서 멈춘다.


그렇게 한참 후에 만년필에 얼룩진 a4용지는 엉망이 된다. 버려야 하는 시기가 오면. 그런 생각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남은 문장은 노트에 옮겨적고. 해야 해서 적어놓은 to do list 중 처리한 것들을 지우고 못한 일들을 옮겨 적는다. 생각보다 꽤 해야 할 일들을 잘 수행해서 옮겨 적을 게 없을 때는 엄청 뿌듯하게 종이를 버린다.


목표한 대로 가고 있구나. 그런 감각. 원하는 것을 적은 종이는 일을 해낸 다음 바닥에 떨굴 때 가슴에서 사이다가 터진다. 이게 뭐라고? 눈에 보이는 나의 작은 성취다.


그 종이에는 매일 떠오른 아이디어들, 잡념들. 보고 싶은 드라마 영화리스트를 볼 것들이라고 크게 제목을 달아 휘갈겨 적어둔다. 하루에 한 번은 그날 날짜를 적고 해야 할 리스트를 적는다. 다 하고 나면 종이를 버리고 못한 일만 다음 날짜를 적어 옮겨 적어놓는다. 때로는 이 방식이 종이를 잊어버려서 난감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일기장과 다이어리는 따로 구분해 두었다. 소장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기장에, 다이어리는 매일의 스케줄링을 위해 보관한다.


때론 다 쓰지 못한 노트들도 이렇게 찢어서 끝까지 사용한다. 다이어리 노트와 일기장 이렇게 두 권 이외에는 모두 이렇게 적은 뒤 책상 아래 날려서 버린다. 끝. 끝.  찢어버리고 직직 그으면서 작업하고 남은 이면지를 책상에서 일을 다 마친 뒤  분리수거 종이박스에 우수수 버릴 때의 쾌감이란!


나는 왜 이렇게 저렴한 것만 좋아할까? 그것이 좀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이 아닐까 서글플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좋은 종이를 많이 가지고 있다. 파브리아노 하네뮬레 수채화전용지 세목, 황목, 중목을 두고도 여전히 다이소에서 산 스케치북에 연습하며 직직 그린다. 아끼고 아낀다. 왜?  더 신중하게 아끼서 그 종이의 값만큼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만 더 늘고서… 이 종이를 쓸래.


그런 속마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종이를 만나도 내가 … 이면지를 더 이상 쓰지 않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이면지는 내게 창작의 자유를 준 친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프린트하며 원고를 읽고, 다 읽은 원고의 뒷면에는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이어지고 이어지는 노래처럼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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