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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예 Feb 24. 2019

나는 커서 절대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 안 할 거야!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결혼은요.

2019년 2월 22일,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작가 지원을 하고 기대 안 하는 척, 메일함을 수십 번도 더 확인했었는데, 합격이라는 푸시 알람이 울렸을 때 너무나 기뻤지만, '감히 내가 작가라고 불려도 될까...'조금은 걱정되기도 했다. 내 글을 읽어주시고, 좋아해 주시고, 또 응원해주실 분들이 언젠가라도 생기기는 할까 싶어 키보드 앞에 앉아 아무것도 못한 채 몇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작가로 불리는 내가 좋다. 그리고 감사하다. 그래서 진심으로 글을 쓰고, 글로 손을 내밀어 보고 싶다. 그 시작점에 서서, 나에 대하여, 나의 지난 순간들에 대하여 소개를 먼저 하고 싶다. 


만난 적은 없더라도, 이야기 나눈 적은 없더라도. 나 스스로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나의 아주 작은 일부는 이런 모양이기에, 이런 글을 쓰는 이런 작가가 되었다고 말이다. 




사람의 체질은 10년에 한 번씩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궁금했다. 정신적, 감정적 체질의 변화의 주기는 얼마일까? 나는 어릴 적, 무척이나 활발하고 적극적인 아이였다. 지금은 조금 창피하지만, 꽤나 눈꼴 시게 '나대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무대에 서는 것, 발표하는 것, 주목받는 일에 희열을 느끼고, 칭찬과 보상이 주는 우월감에 우쭐하는 꼬마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말보다는 글을 좋아하고, 마음을 주는 일에 머뭇하며, 남의 시선과 판단에 몹시나 민감한 사람이다. 어쩌다 이렇게 많이 변했을까? 나는 가끔 나의 성장과정과 현재를 천천히 머리로 훑어보곤 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어쩌면 예견되어 있던 것 같다. 비록 결혼 준비를 하면서 있던 일들을 계기로 더 이상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않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지금에 나에게도 지배적인 영향력이 가진 아버지가 있었으므로.


나의 아버지는 종사하시는 업계에서 크게 성공한 편이지만, 가족은 지키지 못한 무책임한 분이셨다. 지극히 나의 시점에서 아버지를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들은 포악함, 불결함, 그리고 공포감이다. 엄마와 나에게 폭언과 비하를 일삼으셨고,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너는 기껏해야 이 정도니, 일등 해야지, 무식한 년."이라는 말을 달고 사셨다. 최근 종영한 SKY캐슬에 나온 차 교수 캐릭터가 가슴속에서 지워내고 싶은 나의 아버지와 너무 비슷해 드라마를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곤 했다. 내가 고1일 때, 아버지의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가정으로서 비도덕적인 행동이 계기가 되어 엄마와 나의 삶을 옥죄어오던 아버지에게서 해방되었다. 부모님의 이혼은 엄마와 나에게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앗아갔지만, 감사하게도 그 대신 자유와 행복, 그리고 매우 특별하고 돈독한 모녀관계를 선물했다. 


엄마와 단 둘이 지내게 되면서, 나는 엄마의 위대한 희생과 사랑,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온전히 나를 나대로 품어준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살던 시절, 많이 지치고 아팠던 엄마가 나를 아버지의 폭력적 행동과 말들에서 보호해주지 못한 것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녀도 참 많이, 분명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도,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 소극적이고 주최적이지 못한 어른이 된 나의 약한 모습들이 보일 때면, 그녀는 많이 속상할 테니까. 그런 그녀와 함께하며, 또 나 스스로를 비춰보며 나의 이상형은 10대 때부터 매우 확고해졌다. 아빠랑 정 반대인 사람. 착하고, 가족을 소중 여기며, 내가 존경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26살 봄, 나는 지금의 그를 만났다. 돌이켜보면 정말 기이한 현상들로 가득했다. 나가지 말까 생각했던 식사 자리에서 만난 그는 내 눈에는 김수현으로 보일 정도로 멋졌고,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 착해! 나 성실해! 나 책임감 넘쳐!"를 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내 물 잔이 비어 물을 채워주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그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지 하루 만에 그 흔한 썸도 없이 연인이 되었고, 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을 때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봄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물론, 앞으로의 나의 글들의 중심이 될 이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두터웠던 콩깍지를 무수히 탓하고, 나 스스로를 욕하고, 그를 비난하고 세상에게 빅 엿을 날리는 등 다양한 대박 사건들을 헤쳐나가야 했다. 가장 안타까운 건, 그 과정 속의 나는 많이 아팠지만, 가까운 사람들도, 그리고 나 스스로도 참 무지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건강하지 못하게 복잡한 감정선들과, 아픈 말들과, 쓰라린 성장통을 통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 어쩌면 감기 같은, 어쩌면 악성 종양 같은 우울증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이라는 아름다워야 할 삶의 터닝포인트를 통해 마주했다. 


어떤 예신들은 결혼 준비가 재미있고 신이 나는 과정이라 표현을 하고, 또 어떤 예신들은 결혼 준비 과정에서 기권을 외칠 만큼 많은 역경을 겪는다고 들었었는데, 내가 후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지 않구나, 세상 엄마들이 다 우리 엄마 같지는 않구나. 결혼은 참 빡세구나! 서러웠다. 나도 엄마에겐 사랑받는 공주님이었는데, 남의 엄마에겐 꽃바구니를 들고 앞에 서서 인사해도 안 보이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이. 




<Preview 다음 이야기>

세상 모든 예비 신랑들에게 금지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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