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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May 14. 2024

허페이 견문록 안후이 청동기 시대

3일 차 세 번째 글

허페이의 택시 기사의 말에 고민을 하며 필자는 박물관에 도착했다.  사실 중국의 박물관들은 필자에게 있어 판도라의 상자 같은 곳들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21세기 들어와 고고학적 발굴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이나 21세기 고고학 발견이 그 이전의 고고학적 성과를 넘어선다고 한다. 필자처럼 중년의 나이(행정 상 금년까지는 중년이다)인 사람이라면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고대 역사는 이제는 너무나 적은 분량일 것이고 상당한 가능성으로 잘 못 배웠을 수 있다. 그래서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각지의 박물관을 가보는 것은 마치 자주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나 어플을 업데이트하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안후이 각지의 유물을 담고 있는 이 안후이 박물원의 우선 신석기시대를 보면 유물의 전반적 양상은 매우 양호하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유물은 그 양과 질에서 세계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에 안후이처럼 석기시대부터의 역사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반면 산시(山西)처럼 공룡 화석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든가 쓰촨의 싼싱두이(三星堆)처럼 코끼리 상아가 나온다든가 다양함이 중국 유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시대야말로 우리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에 국가와 문자가 성립한 이후인 청동기 시대부터가 진정한 역사 시대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중국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답게 풍부한 고대 청동기 문명을 보여준다. 중국의 고대 국가는 하, 상, 주라고 말하지만 은허의 발굴로 증명된 상나라 이전의 하나라에 대해서는 유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상나라가 현실적으로 유물로 증명되는 고대 국가인데 안후이 지역은 적어도 상나라 시대부터 문화적 영향을 입으며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찬란한 상나라의 엄청난 청동기들에 비해 안후이의 청동기들은 양식이나 수량이 적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상나라 중심지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나라의 문명을 받아들여 이런 수준까지 발달시켰다는 것이 놀랍다.

위 사진의 청동기들을 보면 당시 안후이 지역의 청동기가 은허나 얼리토우(二里頭) 지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토기로 발견된 잔과 똑같이 생긴 청동기는 이들 청동기들이 토기로 사용되던 것들을 청동기라는 재료로 대체한 것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상나라는 청동기 제련 기술을 국가 일급비밀로 취급하여 절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상나라 외의 국가들은 대부분 신석기에 머물렀고 따라서 무기들도 석기여서 상나라 군대에 대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원자탄을 실은 ICBM이나 F-35 스텔스 전투기인 셈이다.


우임금이 치수를 하여 천지를 다스리고 천하를 구주로 나누어 각 하나의 청동기 솥을 두어 천하를 안정시켰다고 하는데 필자는 이 말을 군사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은허에서 발견된 대형 청동기 솥은 수만 명이 10년 동안 투입돼서 만들어야 하는 분량의 청동을 사용했다고 한다. 필요시 언제든 수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주조할 수 있다는 과시이기 때문이다. 즉 우임금이 천하 구주에 9개의 대형 청동기 솥을 가져다 놓은 것은 여차하면 솥을 녹여 무기를 만들어 대규모 군대가 즉시 준비된다는 과시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나라의 실제 판도가 낙양을 중심으로 동서로 200km, 남북으로 100km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 청동기 시대가 진행되면서 상나라 영향력의 거리도 증가하였다. 안후이 지역이 이 황하 문화권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은 이렇게 유물을 통해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작은 변형은 보이지만 대체로 상나라의 청동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상나라를 세운 군주 당(唐)은 짧은 기간 동안 안후이성 북부의 보저우(亳州)에 수도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안후이 지역은 오(吴), 초(楚), 월(越) 나라 등에 넘어갔고 그 후에는 이름도 생소한 소(萧), 동(桐), 송(宋), 채(蔡), 서(徐) 등의 국가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진이 천하통일하면서 그 이후는 후대의 역사에 따라 움직였다. 안후이라는 현재의 명칭은 청나라 강희제 때 안칭(安庆府)과 후이저우(徽州) 두 도시의 첫 글자를 따서 안후이(安徽)로 정했다고 한다.

https://zh.wikipedia.org/zh-cn/%E5%AE%89%E5%BE%BD%E5%8E%86%E5%8F%B2


결국 안후이는 역사의 주역이 돼 보지 못하고 5천 년을 내려온 셈이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이들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 안후이였는데 이 또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받던 지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후이상(徽商)이라 하여 안후이 지역 상인들이 많았던 것도 경제적 빈곤을 해소하려 노력했던 이유라고 하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태평천국의 난을 증국번이 진압했을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것도 증국번의 제자 리홍장이었고 리홍장 또한 안후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리홍장을 많이 동정한다. 아마 조직에서 가장 괴롭고 어려운 일을 도맡으면서도 부와 평가를 빈약하게 받은 그의 생애가 필자 개인의 경력에도 조금은 겹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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