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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키 Nov 26. 2020

친절한 말 한마디

불친절한 하루 끝에 떠올리기

무례한 데다 하대하는 사람과 상식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나눠야 했던 저녁. 상한 마음을 달래려 생각해 보았다.

친절한 사람을 만났던 일을 생각해 보자. 기분이 좋아질 거야.


먼저 떠오른 사람은 3년 전쯤 스친 전주역의 역무원이었다.

감기도 아닌데 온몸에 뜨뜻하게 열이 오르고 후들대는 몸살기가 돌았다. 가까스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역으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어서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사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 그런데 불행히도 역에는 약국이 없었고, 역을 나서서 광장과 길을 건너 약국을 찾을 정신도, 힘도 없어서 역무실에 길듯이 가서 힘없는 목소리로 "저... 혹시 진통제 있나요.." 물었다. 아마 이렇게 물어보면 생리통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그러거나 어떻거나 그땐 너무 아파서 빨리 먹고 기차 안에서 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3시간 남짓을 기차 안에서 열과 싸우고 식은땀을 흘리며 가는 건 못할 짓이었다.
그냥 보통 사무실 같아 보였던 역무실은 거의 비어있었고, 젊은 남자 직원 한 명과 중년의 남자 직원 한 명이 있었다. 젊은이는 "어, 구급약통이 어딨더라.." 하며 캐비닛을 열었는데 약통 속엔 반창고와 붕대밖에 없었다. 그걸 본 나는 문고리를 잡고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그때, 다른 한 분이 "어! 잠깐! 괜찮아! 약이 많은 직원이 있어!" 하며 날듯이 뛰어가시는 거다.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드디어 금광을 찾았어! 혹은 포기하지 마! 이 사막 언덕 너머에 오아시스가 있어! 하는 듯 기쁘고 뿌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 정도가 되었다. 낡은 유니폼을 입은 그분이 누군가에겐가, 혹은 어딘가의 서랍을 열어 약을 가지고 달려와 진통제 두 알을 내 손에 까주실 땐 정말이지 무슨 마약중독자가 금단현상 끝에 약을 만난 기분이 그럴까... 싶고 그분은 초로의 구세주가 되었다
진통제 두 알을 삼키고 기차에서 거의 졸도하다시피 쓰러졌다가 서울역에서 제정신으로 깨어날 수 있었다.

아, 정말 고맙고 친절한 분이었지. 전주역 역무원 님 감사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감사한 분이다. 또 뭐가 있더라...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마음이 찌르르 울란 적도 있었지.

몇 달 전 정말 오랜만에 대형마트에 갔다. 주차장에 차를 넣고 매장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를 향하는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어서 후다닥 탔다. 누군가도 함께 탔는데 문이 닫힌 후 엘리베이터는 상냥한 목소리로 "올라갑니다."라고 말했다. 응? 매장은 다 아래쪽에 있는데? 주차장에서 주차장으로 올라가다니? 예상치 못한 방향에 순간 짧게 "어?"란 소리를 냈다. 그러자 먼저 탔던 이가 "아.. 제가 차를 어디다 댔는지 깜박해서요. 한 층만 올라갈 거예요."라며 머쓱한 투로 말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표정이 연상되는 목소리였다. 참 친절하기도 하지. 별것 아닌 혼잣말에 자기 실수까지 털어놓으며 한 층만 올라가니 안심하라는 마음 씀씀이가 다정해서 그분이 내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계속 곱씹으며 좋아했다. (좀 변태 같네)


또 한 번은 업무 상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인터뷰이셨던 아주머니가 "가는 데 얼마나 걸려요?" 물으셨다. 한 시간 반쯤 걸린다고 하니, 포장된 땅콩 전병 몇 개를 손에 쥐어주셨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여자는  빈 속에 다니는 거 아녜요. 속 따뜻하게 하구 다녀." 하시며 주머니에 넣어주셨더랬다.( 쓰다 보니 유독 뭔가 먹는 이야기가 많네...;)

그 밖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다가 스친 내 손이 너무 차다며 손을 꼭 잡아 녹여주신 사서 분도 계셨지. 외국 여행 중에 만난 현지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자신의 열쇠고리를 풀어 선물하신 적도 있었고...


아, 친절한 마음을 많이 받았다. 고마워라. 나도 누군가에게 친절한 기억을 줬었다면 좋겠다.

그래. 이런 순간들을 반창고 삼아 오늘의 쓰라린 마음을 덮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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