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피크로 올라가는 피크트램은 오른쪽에 앉아야 홍콩의 마천루가 잘 보인다고 해서 염치 불구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뛰어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드디어 오늘 그 유명한 홍콩 야경을 보는 건가?'라는 생각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유리창 밖이 회색빛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분명 트램을 탈 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멀쩡해 보였다. 쾌청까지는 아니었지만, 절대 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트램이 빅토리아 피크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억수로 퍼부기 시작했다.
트램에서 내린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어디론가 우르르 달려갔다. 나도 얼른 가까운 상점 안으로 뛰어들었다. 비는 한 30분 동안 퍼붓다 그쳤지만 이번엔 안개가 문제였다. 안개가 너무 짙게 끼어 있어 건물 형체도 보일락 말락이다. 아무래도 야경을 보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서 주윤발이 바바리를 입고 이쑤시개를 잘근잘근 씹으며 마천루를 내려다보던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안개로 뒤덮인 홍콩 도심을 내려다봤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와 스적스적 란콰이풍으로 걸어왔다. 란콰이퐁 거리에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니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났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Mid Level Escalator, MLE)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이터 중 하나로 길이가 약 800m 정도라고 한다. 한 개의 단일 에스컬레이터로 이루어진 구조는 아니었고, 약 20개의 에스컬레이터가 끊어질 듯 이어져 있었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곳이다. 센트럴 마켓에서 시작되는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중경삼림>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는 영화 팬들이 있을까.
네 번째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중경삼림>에서 왕페이가 왕조위의 방을 훔쳐보던 곳이다. 그녀는 이 에스컬레이터에 쪼그리고 앉아 왕조위가 사는 집을 올려다본다. 예전에는 영화에서처럼 네 번째 에스컬레이터에서 무릎을 굽힌 채 왕조위의 방을 올려다보는 영화 팬들이 많았다고 한다. 슬쩍 신발끈을 묶는 척하면서 쪼그려 앉아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중경삼림>에서 경찰관 왕조위는 왕페이가 점원으로 일하는 조그마한 패스트푸드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왕페이는 우수에 젖은 이 남자를 보며 남몰래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던 어느 날 왕조위의 옛 애인이 가게를 찾아와 왕페이에게 이별의 편지와 함께 그의 집 열쇠를 맡기고 떠난다. 왕페이는 옳다구나! 하고 왕조위의 집에 무단 침입해서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식탁보를 제 마음대로 바꾼다. 침대에 떨어져 있는 거시기 털을 손에 들고 즐거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왕페이는 메아리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 사랑에 빠진 청춘이었다. 반면에 집 안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도 전혀 눈치 못 채는 둔한 남자 왕조위는 비누를 보고 "야, 너 다이어트했니?'라는 둥, 걸레를 보고 "울지 마."라는 둥 하며 돌아오지 않을 지난 사랑을 그리워한다. 바로 곁에 새로운 사랑이 다가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런 그의 곁에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부르며 사랑을 키워가던 왕페이는 결국 사랑을 접고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나 버린다.
왕페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타이밍이 안 맞아서 엇갈려 스쳐간 인연들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응답하라 1988>에서 류준열은 사랑을 잃고 이렇게 말한다.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은 타이밍이다. 내 첫사랑은 그 거지 같은 타이밍에 발목 잡혔다. 운명은 그리고 타이밍은 그저 찾아드는 것이 아니다. 주저 없는 포기와 망설임 없는 결정들이 타이밍을 만들어낸다. 나는 더 용기를 냈어야 했다. 나빴던 건 신호등이 아니라 내 수많은 망설임이었다."
극의 흐름을 잘 살린 멋진 내레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청춘일 때 사랑을 잃어버리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정말 망설임 없이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하기만 하면 사랑이 이루어질까? 간절하면 그 사랑이 결실을 맺을까?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타이밍은 한 사람의 노력과 용기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밍의 다른 이름이 바로 운명이지 않은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나가자 캐슬 로드가 나타났다. 캐슬 로드는 홍콩의 길답지 않게 오래된 돌담이 많은 거리였다. 돌담에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푸른 이끼가 잔뜩 끼여 있었고, 힘을 잃은 넝쿨들이 아무렇게나 자라나 있었다. 왕가위 감독은 이 한적한 길에다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해 놓고 <아비정전>을 찍었다고 한다.
영화 속 이름 없는 경찰 (유덕화)과 수리진(장만옥)과의 접점이 바로 그 공중전화 박스였다. 바람둥이 아비(장국영)를 사랑하는 수리진은 아비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아비는 구속받는 걸 싫어하고, 결국 수리진은 아비를 떠난다. 아비와 헤어진 수리진은 거리를 순찰하던 이름 없는 경찰을 만나 위로를 받는다. 이름 없는 경찰은 무언가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전화를 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지만 전화는 오지 않는다. 결국 경찰이 떠나고 나서야 수리진은 뒤늦게 전화를 걸지만,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다. 돌이켜 보면 내 청춘의 인연도 그렇게 스쳐지나가 버린 것 같다.
<아비정전> 하면, 나는 반사적으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린다. <아비정전>이나 <노르웨이의 숲>이나 모두 청춘의 어긋난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비정전>과 <노르웨이 숲> 속 인물들은 모두 청춘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추구하는 바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사랑에 대해서는 젬병이다. 사랑을 하려면 부지런히 상대의 마음속 뜰 안을 살펴야 하는데, <아비정전>이나 <노르웨이 숲>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 뜰만 골몰히 쳐다보고 있다. 본인의 마음속 뜰에 피어날 꽃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 그들의 인연은 어긋나고 만다. 그리고 그리움과 후회는 아주 뒤늦게 찾아와 그들의 심장을 야금야금 파 먹는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오전 10시 15분부터 밤 12시까지는 위로 올라가고, 오전 6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아래로 내려간단다. 그 말인즉슨, 올라올 때는 좋았지만 내려갈 때는 계단으로 걸어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한 15분쯤 걸어 내려가자 에스컬레이터의 시작점인 퀸즈 로드 센트럴이 나타났다. 내려오는 길이라 힘들진 않았다.
숙소인 청킹맨션으로 돌아가기 위해 땡땡이 트램을 타고 가는 길. 울긋불긋한 간판이 내뿜는 화려한 빛이 비에 젖은 노면에 반사되어 유난히 번들거려 보인다.
90년대 홍콩 영화를 추억하며 살기에는 너무 바쁜 세상이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 그 시절의 영화를 떠올리며 뒤를 돌아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영화를 핑계 삼아 내 청춘의 떫은 사랑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갯속으로 점점이 사라져 가는 낡은 트램의 땡땡 소리가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