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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현 Nov 29. 2019

10. 세계를 상상하며 살기

0.
근황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7월부터 모교 교학팀(학사행정부서)에 일하게 됐습니다. 믿었던 토익스피킹에서 처참한 성적을 받았던 까닭에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 되었죠. 장그래가 생각나네요. 무튼 이달 말에는 KOICA를 통해 남미 볼리비아 공공행정 부문에 지원했습니다. 최종 합격하면 2년 동안 볼리비아에서 살며 기술학교의 행정 부분을 서포트 하게 될 것 같네요. 스타트업에도 서류를 넣었는데, 하루 만에 불합격 통지를 받았죠. 어른이 된다는 건 거절을 견디는 과정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여기는 포르투입니다. 포르투의 바다는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입니다. 저 뒤의 파도가 보이시나요? 3m 정도 되는 파도가 치던 날이었습니다. 후배가 살고 있어 만나러 갔죠. 대서양 근처에 아는 사람이 산다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1.
보통 저는 여행길에서 누군가의 직업, 나이, 전공 등을 먼저 묻기보다 여행 계획이나 다른 관광지에 대한 의견을 듣는 편입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토론으로 이어지거든요. 낯선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의 성격을 형성한 조건을 먼저 파악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을 바탕으로 바이오그래피를 상상합니다. 이런 상상은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되거든요. 무엇(What)에 대해 질문하기보다 왜(Why) 혹은 어떻게(How)를 먼저 묻는 셈입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덴마크 친구와 사나흘 정도 걸었을 때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어요. 전공이 뭐야? 친구는 세계 보건(Global Health)이라고 답했습니다. 18살인 친구라 이게 학부 과정에서 공부가 가능한 건가 생각했죠. 한국에서 보통 어떤 학문에 접근할 때 세부 이론과 방법론을 먼저 배우고, 큰 영역으로 확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시작 지점이 공공 보건도 아닌 '세계' 보건이라니요.


앨런은 강려크한 녀성이었습니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겨 5cm정도 되는 구멍이 생겼는데(...) 걷더라고요. 자기는 육체적인 도전이라고 합니다. 전에 어머니랑 300km를 걸었다가 집으로 돌아갔었고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번에는 완주해보기로 결정했답니다. 막내 동생 데리고 가는 느낌으로 20일 정도를 함께 걸었죠.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엄청 빨리 걷습니다. 손병호 게임을 가르쳐줬는데, 50시간 쯤(...) 했던 거 같습니다.


2018년 2학기에는 유행성 질병에 대해 배웠답니다. 에볼라, 스페인 독감, 에이즈 같은 것들.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학부 1학년은 이런 질병의 차이점과 탄생 원인, 전파 과정 따위를 교수가 포괄적으로 강의한 다음 각국의 대응 방식(디테일)을 학생들이 조사해 발표하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세계 보건 전공이라니. 세계 문학 전공이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2.
미국인 간호사 친구와 유럽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생장에서부터 800km 함께 걸었죠. 그리고 100km 정도를 더 걷고 헤어졌다, 피니스테레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24시간을 함께 보낸 것만 거의 20일 이상이었죠. 전에 잠깐 적었던 것처럼 친구는 참전 군인이자 필리핀에서 태어난 미국 이민 1세대였어요. 친구의 직업은 임상간호사(Nurse practitioner)로, 집집을 왕진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와 결합한 형태로 일하는 중이었죠.


처음에는 그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왜 의사도 아닌 간호사가 집으로 가야하지? 친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미국은 집과 병원이 차로 두어 시간 정도 걸릴 때가 있거든. 땅이 넓으니까. 그리고 의료보험이 너무 비싸서 응급차를 부르는 것도 고민하고 해야 되거든. 거동이 불편한 어른이나 응급환자에 대해서 방문하고, 정기적으로 관찰하고 뭐 그런 거야."


김 까를로씨는 크리스에 이은 명예 한국인입니다. 다른 한국인 친구들이 명예 한국인 자격을 남발했는데, 한국 중심적인 사고라니. 한국인의 상상력은 위대합니다. 한국식 이름도 지어줬는데 김철수였나(...) 무튼. 김철수씨가 까미노 자원봉사자를 만나 화살표를 덧칠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임상간호사는 진단에서부터 꽤 전문적인 시술과 응급 수술까지 가능한 의사급 간호사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의 경우에는 위생병(Medic)이었기에, 외상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석사를 마쳤다고 하네요. 제게는 이 조합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다. 남자, 간호사, 필리핀 태생의 이민자. 차라리 의사가 되는 게 좋지 않은가...


"의사가 되기까지 밟아야 하는 과정이 너무 지겨울 거 같아서. 나는 충분히 많은 죽음을 지켜봤는데, 의사는 최종 판단자거든. 그리고 판단이 틀릴 때도 많지. 결과는 환자의 생명 그리고 막대한 비용으로 연결되곤 하지. 책임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내가 군을 떠난 것도 같은 이유일 거 같아."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 간호학부를 졸업하고 의무병으로 지원한 친구였습니다. 네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친구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자기가 관여하고 지킨 사람들에게는 미국인이지 않겠냐고 말했죠.


3.
저는 의사와 간호사, 공공보건이나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습니다. 생명, 사람을 살리는 직군에 있다는 믿음.


KOICA는 군 복무 당시 알게 되었죠. 명목상 대통령 경호부대에서 복무했는데요, 부대에 종종 KOICA 분들이 찾아와서 제대하고 할 거 없으면 봉사 지원하세욧! 뭐 이런 강연을 하고 떠났습니다. 당시 제 전공과 관련한 직군이 있었다면 지원했겠지만 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상태였죠. 고졸이라고 어찌나 무시를 받았는지... 그렇게 사는 것에 치여, 학부와 대학원을 거치면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었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한국인 간호사 친구가 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를 느껴 걷고 있다고 했죠.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와 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하는 중인데, 하루는 대뜸 KOICA 일반봉사단으로 면접을 봤다고 말하더라고요.


뭐 장소가 중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거기 있었다는 거, 삶의 고민을 함께 나눴다는 거 그런 게 중요하죠. 저는 사람 뒷모습을 도촬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왜냐하문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은 걸 상상하게 해주거든요. 무튼. 뭐. 그렇다는 겁니다.


친구의 지원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해외생활을 해볼 수 있다는 것, 외국어를 배울 기회라는 점. 회화가 되기 시작하면 실습 강의를 할 수도 있다고 했죠.


저는 잘 모르겠어요. 볼리비아가 남미 최빈국이라는 건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거라면 차라리 해외에서 하는 게 좋지 않나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봉사라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아요.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시도해볼 수 있을 거고,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다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에 서류를 제출했어요. 공공행정 부분 전공자가 아니라서 서류가 붙는다는 보장도 없어요.


대학에서 근로장학생으로 6년 정도 일했거든요. 5개인가 부서를 옮겨다녔고, 2년 조교 근무하고, 지금은 평사원으로 전문대학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해서 전공자보다 실무적인 부분으로다가 어필을 하면 먹히지 않을까 싶슾샢습니다.


사람이 참 우스운 게, 지원하고 보니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능하다면 글쓰기 프로그램도 운영해보고 싶어요. 글쓰기는 언제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그리고 결과를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요. 제 글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합격하면 가보려고요.


진행 상황은 늘 그렇듯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꿈이라도, 아직 세계를 꿈꿀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4.
내가 무엇을 시도하고 있다는 걸 말하기 부끄러워진다면 내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고, 당당하다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이 바쁘고 적응하는데 정신이 없어 몇 달 만에 이야기를 업데이트 합니다. 성공했냐 실패했냐보다 중요한 건 작은 도전이라도 멈추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게 아닐까요. 어느 선배의 말처럼 아직 열심히 살 때라고 생각해요.


기차를 타고 까를로와 함께 산티아고에서 12시간, 바르셀로나에 도착합니다. 당시 기온이 15도 정도였는데, 바다에 뛰어들자고, 뛰어들면 50만원 주겠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냥 미친놈처럼 들어갈 걸, 니가 돈 주겠다고 하지만 않았더도 내가 들어갔을 텐데. 이런 미국식 사고 다매요! 라고 외치고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바다에 뛰어들 걸 그랬죠. 까를로는 어떤 세계와 어떤 다음을 상상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헤어졌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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