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젊은 80대 언니

가족에 대해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

by 어른이 된 피터팬

내가 어렸을 때, 북가좌동 이모 집에 많이 놀러 갔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북가좌동 이모"는 익숙하다.
그 이모를 10년 넘게 못 봤었는데 오늘 드디어 만나 뵈었다.

우리 외할아버지의 누나의 따님이신 할머니 댁에 놀러 간 것이다. 그 할머니의 올해 연세는 80세이고 그분의 따님이 북가좌동 이모, 미란이 이모다. 엄마는 그 할머니께 언니라고 부르고 미란이 이모는 엄마보다 여섯 살 많은데 촌수에 따라서 우리 엄마를 이모라고 부른다. 엄마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분께 이모 소리 듣는 것도 이상하고 미란 조카라고 부르기도 어색하다며 그냥 미란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했지만 질서를 지켜야 된다며 정 그렇다면 미란 조카님이라고 하라고 하신다. 아.. 어렵고 어색하다.

어렸을 때 뵙고 엄청 엄청 오랜만에 뵈어서 잘 생각은 안 나지만 그래도 미란이 언니 얼굴을 보니 어렴풋 기억이 남아있었다. 80세이신 할머니는 내 기억상 처음 뵌 것 같은데 나이가 드셔도 정정하시고 고우셨다. 미란이 언니는 00 의대를 나와서 강남 00 병원에서 일할 때 급성 류머티즘 관절염이 왔다. 결혼을 포기하시고 30대에 연세대에 들어가 식품공학을 따시고 40대에 미국으로 가셨다. 미국에서는 한의학으로 박사를 따시고 미국에서 한의학 교수를 하시다가 얼마 전에 서울에 있는 의대 교수로 오셨다고 한다.


미란 언니가 미국으로 간 계기를 들어보니 싱글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자신을 교수로 받아줄 학교가 그때는 한국에 없었다고.. 가서도 물론 엄청난 고생을 하셨지만 그래도 미국에선 교수 기회를 딸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미란 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성했다. 장애는 차치하고서라도 40대에 미국으로의 유학길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멋있었다. 아직 20대 중반인데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레 겁먹고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미란 언니의 엄마이신 80세 할머니(내게는 이모인데 입이 안 떨어진다ㅠ)께서는 나랑 대화가 잘 통하실 정도로 깨어 있으신 분이다. 여성의 자아실현을 강조하시는 분이시고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주장하신다. 우리 엄마의 기가 세서(기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시나 엄마의 바람이나 생각을 내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시며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어떤 성향인지 잘 들여다보고 존중해주라고 엄마께 당부하셨다. 힛. 우리 6촌 이모 멋져!

그리고 거기에 저울 체중계가 있길래 오랜만에 한 번 올라가 봤는데 이모께서 다가오셨다. 나는 부끄러워서 정확한 숫자를 확인도 못하고 꺄~! 하며 체중계에서 내려왔다. 이모께선 몇 키로?라고 물으셨고, 나는 비밀이에요~ 부끄럽잖아요~라며 이모의 두 손을 잡았다. 이모는 내 팔을 쪼물딱 쪼물딱 하시면서 "왜~ 괜찮아~ 미국 애들은 햄버거랑 피자 많이 먹어서 몸이 이~따만 해. 우리나라가 마른 거야. 너는 건강한 거야. 괜찮아."
또 한 번 이모의 매력에 심쿵했다. 오늘 여러 번 이모의 매력에 빠졌다. 우리 이모는 얼굴도 예쁘지만 생각이 너무 멋지다.

그리고 엄마가 미란 언니랑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는 이모를 따라서 개들에게 밥 주러 갔다. 이모네 참다래 농원에는 개가 5마리가 있다. 어미 개랑 세 마리 새끼 그리고 외삼촌 개. 외삼촌 개는 똘똘이인데 얘가 제일 잘 생겼고 그 외는 무섭고 지저분하게 생겼다. 그래도 난 그 무서운 외모에 숨겨진 순박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강아지들을 막 쓰다듬고 밥 주고 하는 모습에 이모는 너는 무섭지도 않냐. 이모는 처음 얘네 봤을 때 무서웠는데 잘도 겁이 없다고 막 웃으셨다. 이모를 도와 개들에게 밥도 주고 물도 주고. 개들이랑 놀다가 이모랑 들어가려는데 손 씻어야 한다며 퐁퐁을 손에 찍 짜 주신다. 퐁퐁으로 손을 씻기는 처음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는 또 계속 먹었다. 쁘띠첼 요거 젤리에 수박에 군고구마까지. 할머니들은 원래 먹을 거를 계속 주시는 존재인가 보다.


집에 와서도 이모가 계속 생각난다. 80세 연세에 젊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 이모가 참 멋지다. 다음에 또 놀러 가고 싶다. 나중에는 미국에 있는 미란 언니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이렇게 6촌을 만나서 또 한 번 가족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행복하다. 이 소중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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