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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Oct 13. 2022

# 28. 첫 면접, 한 달 만에 만나는 내 심장

2015 10월부터 2017 9월까지.

 2년의 시간 동안 나는 전업주부의 삶을 살았다.

법원에 이혼서류를 접수하고 취업이 될지 안될지 불안한 시간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오랜 시간 애먹이지 않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이 되는 듯했다.

한 대학의 정보통신처에 계약직 교직원으로 취업해서 첫 출근을 하던 날이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오른다.


세팅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 앉아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약간의 현타감으로 업무를 시작하던 그날.

정규직 선임 과장의 첫 업무지시는 내가 업무에 사용할 PC 포맷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컴맹까지는 아니지만,

인터넷이나 끄적이고 한글이나 다룰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알려주는 이 하나 없이 매뉴얼 문서 하나 주고 갑자기 PC 포맷이라니.


- 과장님, 저 포맷 한 번도 안 해봤다고 면접 때 말씀드렸었는데요..


- 주변에 물어봐서 해봐요. 인수 인계자료도 있잖아요. 금세 할 수 있어요.


넌 금세 할 수 있겠지.

전임자한테 인수인계도 못 받았는데 한 번 알려주면 안 되겠니?


사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처럼 사회생활에 다시금 익숙해졌다면,

그리고 나에게 이혼과 아이와의 이별이라는 인생의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별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음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의 멘탈은 유리 멘탈을 넘어서 셀로판지 수준도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냥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망가질 때로 망가지고 한없이 연약해진,

아들을 떼놓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나약한 젊은 엄마였을 뿐이다.


포맷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업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어렵게 부여잡은 생존의 문턱에서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시간 우리 아들이 무얼 하고 있을까.

매일같이 보던 엄마가 어딜 갔나 찾고 있진 않을까.

도대체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내 인생이 도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꼬여버린 걸까.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막을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해서 였을 것이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목젖까지 흘러내린다.

옆에서 함께 근무했던,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던 직원이 깜짝 놀라 쳐다본다.


- 샘~ 제가 도와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그때까지 자세한 내 사정을 몰랐을 그 어린 샘은

별 희한한 여자를 다 봤다고 느꼈을 것이다.

서른여섯이나 먹은 여자가 포맷하라고 했더니 모니터를 쳐다보고 꺼이꺼이 우는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내가 일했던 그곳은 정규직 교직원 여섯 명과 계약직 직원 세 명, 그리고 근로장학생 3~40명 정도가 함께 근무를 하는 구조였다.

나는 교내의 소프트웨어나 PC 관리와

그곳에서 근무하는 근로장학생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진행했다.

근로장학생들은 경제적으로 조금 어렵지만 학업성적은 좋은 학생들이 선발된다.

집이 어려운데 열심히 공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학생들을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또 아들이 떠오른다.

우리 아들도 저 학생처럼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곳에서 근무했던 2년 동안 끊임었이 했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옆에서 함께 근무했던 열 살 어린 조교샘과 내 업무를 도와 근로 일을 해줬던 수많은 학생들 덕분에 정말 죽지 못해 살아냈던 그 힘들었던 시기를 버텨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젊은 혈기들과 어울려 하하 호호거리지 않았다면

난 그냥 무너져버렸겠지.


다행히 이전에도 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해 본 적이 있는 터라 일은 금세 손에 익었고 차츰 직장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열심히 돈벌어서 반드시 4년 안에 내 아들을 다시 데려오겠다는 그 목표 하나로 그동안 올곧게 다져왔던 깊은 자존심 따위 멀리 던져버리고

갖은 구박과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드디어 아들을 만날 수 있는 면접일이 되었다.

법원에서 확정일자를 받기로 한 12월이 되기 전까지 3개월 동안은 한 달에 한 번. 9시간의 짧지만 간절한 내 아들과의 면접이 매끄럽게 이어질 것이다.

여차해서 전남편이 면접 이행을 안 해 내가 나쁜 마음을 먹고 법원에 출석해야 하는 날, 나타나지 않기라도 하면 이 더럽고 질척대는 이혼 절차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또 한 번 겪어야 할 테니.

자기도 생각이 있고 뇌가 작동하는 인간이라면 아이를 잘 보여주겠지.


당시 나는 자차도 없는 상황이었고, 집도 매우 좁아(물론 지금도 그 집에 산다)

어린 아들을 지하철을 태워 집으로 데려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부모님과 오빠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만났다. 아들을 데리러 가려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오전 7시에 출발을 해야 한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날인데, 심장이 평소의 두 배의 속도로 뛰고 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아들의 사진을 붙잡고 울다 해가 뜰 무렵에나 겨우 선잠을 잔다. 겨우 잠이 들어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매우 짧은 그런 잠.

이렇게 시작한 불면증은 이혼 이후 5년 동안 계속되었다.


면접 당일.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온 가족이 출동을 한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차를 가지고 예전에 내가 살았던 그곳으로 오시기로 했다.

일단 아이를 픽업하면 부모님 집으로 데려가서 내 공간보다 몇 배는 넓은 곳에서 아이를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부모님까지 함께 왔다는 걸 그 집에 알리고 싶지 않아 아이를 픽업할 땐 나 혼자 나갔다.

배가 몹시 아팠다.

수능 때 시험 보기 전 날 살금살금 배가 아팠던 것처럼 불편한 긴장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이제 몇 분만 참으면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었던 내 아들을 만날 수 있다.

따뜻한 아이의 볼을 만지고 내 품에 아이를 꼭 안을 수 있다.

울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이를 꽉 물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이 오고, 저 멀리 아이 아빠가 아들을 데리고 나온다.

울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던 나의 다짐은 그 자리에서 내 두 다리와 함께 무너진다.


내 아들.

내가 그토록 품에 안고 싶었던 아들이

저 멀리 몇 미터 앞에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간다.


한 달 만에 나를 만난 아들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미 주 양육자였던 엄마와 한 번의 커다란 헤어짐을 겪었던 터라 아이는 제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며 달려드는 나를 피해 까무러치게 울어댔다.

그때의 내 아들의 나이는 고작 두 살.


- 엄마야, xx야. 엄마라고


전 남편의 품에서 아이를 강제로 빼내 아들을 안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해줬다.


- xx야 엄마야, 엄마야, 엄마야.


그제야 점차 잠잠해지는 내 아들.

그렇게 안고 싶었던 내 아들을 한 달 만에 내 품에 안았다. 하지만 아들의 표정이 어쩐지 예의 그 얼굴이 아니다.

사랑스럽고 장난기 많던, 눈웃음이 눈부시게 예뻤던 내 아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하고 어두운 아이는 나와 눈을 맞추지도 빛나게 웃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노랫소리에

엉덩이를 씰룩대며 춤을 추지만 그 예쁘고 조그만 얼굴은 도통 웃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자니 또 한 번 내 가슴이 찢어진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내 아들이 웃음을 잃었다.

이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아 나는 또 억장이 무너진다.


면접일 전날, 아이가 어리다 보니 챙길 게 많았다.

기저귀, 아기용 물티슈, 따뜻한 보리 차, 아이가 먹을 음식과 간식.

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과 여벌의 옷, 아기 손수건, 혹시 모를 체온계와 해열제까지.

그 물건들을 준비하며 아들을 만날 생각에 들었던 감정은 순수한 기쁨도 아닌 그렇다고 설렘도 아닌 긴장감과 불안감, 그리고 초조함.

미안한 마음을 넘어서 내 영혼까지 쓸어버린 죄책감까지 더해져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만이 날 지배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웃음을 잃은 아이의 변화를 눈치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조카를 만나러 온 오빠까지.

온몸으로 아이와 놀아주며 함께 했다.

그제야 아이는 조금씩 예의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조금씩 보여주며 이내 편안해지는 듯 했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른다.

고작 9시간.

졸린지 연신 눈을 부비는 아들도 엄마와의 헤어짐을 아는지 아이는 결코 잠이 드는 법이 없다.

행복한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아들을 데려다주러 가는 길.

아들도 헤어짐을 눈치챘는지 여지없이 통곡을 한다.

잘 울지 않던 내 아들이었다.

제 아빠에게 안기면서도 엄마 머리채를 그 조그만 손으로 휘어잡고 놓지 않으며 악을 쓰고 운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왜 우리는 그 잠시의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렇게 소중한 아이를 안고도 끝내 가정을 지켜내지 못했는가.

나는 내 숨통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는 아이를 힘으로 제압한 전 남편이 돌아섰다.

아이와 남편의 모습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있는다.

도대체 이 눈물은 언제까지 흘러내릴까.

매일같이 우는 나도 지겹다.

하지만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

가슴이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때 까지 울고 나면

내 팔다리를 잘라내고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과 공포감이 온몸을 엄습한다.


그렇게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세 번의 면접이 지난,

12월의 어느 날.

이혼 확정을 받기 위해 관할법원에서 다시금 그를 만났다.


이제 몇 분 후면 우리는 정말 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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