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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Oct 14. 2020

춘천 가는 길목에 서서

석파령 너미길

오래 전의 강촌역은 북한강과 접하고 있어 나름 낭만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삼악산과 검봉산 봉화산 등이 자리잡고 있어서 산을 찾는 사람들도 꽤 많았고, 무엇보다 MT 장소로서 유명하여 한 때는 젊은 사람들이 통기타를 매고 찾던 MT계의 성지였다. 가평에서 간이역인 경강역과 백양리역을 거쳐 강촌역에 이르는 기찻길은 경춘선 여행의 백미였다. 특히 이른 오전 북한강의 물안개는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 여행의 질을 상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기차여행의 중심에 강촌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위를 절개해 만든 터널형 플랫폼과 강 건너 삼악산의 위용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강열한 풍경이었다.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불리는 기암절벽을 등지고 굽이쳐 흐르는 북한강을 내려다보는 강촌역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환상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걷어낸 레일 위엔 시커먼 아스콘이 포장되어 있고, 플랫폼 구실을 하던 콘크리트 구조물은 그나마 옛 모습을 살려두고 있었다. 마치 죽은 공룡의 사체 같은 역사는 옛 영화를 묻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휴식 공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잠깐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팁을 주자면, 백양리역에서 강촌역까지 옛 기찻길의 레일을 걷어 내고 흙길을 조성해 놓았는데, 숲과 강을 따라 4킬로미터 이상 이어지는 그 숲길은 친한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걷기 안성맞춤의 하이킹 코스이다. 물론 연인 사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숲길은 내려다보이는 북한강과 함께 차분한 정취를 당신에게 선사하리라 장담한다.      


현재의 강촌역은 10년 전 구곡폭포 입구에 새롭게 지은 역사이다. 전철에서 내린 우리는 역전 가판 커피 가게에서 커피 한잔을 마신 후 택시를 타고 당림리로 들어갔다. 춘천에서 시내버스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트레킹 후 나가는 버스시간을 맞추느라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일행 중에 나보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일인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020년 5월 23일 / 석파령 들머리

당림리 예현 병원 앞에서 내린 우리는 배낭을 추스르고 석파령 들머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림리 바로 옆에 있는 안보리는 조선시대 때 안보역이라고 불렸으며, 동리 이름에 역 역(驛) 자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춘천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과 나그네들이 케어하고 쉬어 가는 마방 마을이었다. 그리고 강변에는 인제나 화천에서 출발한 뗏목들이 쉬어가는 장소이기도 해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일제 강점기 시절, 그러니까 경춘선(1937년 개통)이 개통되기 전까지 가평 자라섬에서 안보역까지 왕복하는 여객선이 운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곳은 한강을 따라 서울로 가는 요충지였다.       


파발마나 조정의 관료들이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공적인 장소가 안보역이었다면, 당림리는 그 말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한 신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이름에 당자가 들어갔다고 전한다. 현재 가평에서 춘천으로 가는 보납산 강변도로는 1920년대에 만들어졌고, 그 지름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개곡리로 돌아 주을 고개를 넘어 안보리로 갔다. 시간상으로 몇 배나 더 걸리는 거리였다.     


아무튼 한양에서 춘천에 가기 위해서는 청평과 가평을 거쳐 안보리와 당림리를 지나 석파령을 넘어야 했다. 한양을 비롯한 큰 도시에서 춘천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리고 석파령 너머에 덕두원리가 있는데 그 마을 이름에 원집 원(院) 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그네들이 숙박하는 일종의 주막거리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암호가 있는 곳에 신영 나루(북한강을 신연강이라 불렀다)가 있어서 나룻배를 타고 춘천으로 들어갔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에는 길이 사방팔방으로 통해 있었으며, 그 산골 곳곳에도 마방과 원집 등이 자리 잡고 있어 몇 날, 몇십 일을 걷는 여정에서의 체력 안배와 야밤에 겪어야 할 위험 요소들을 방지해 주었다. 현재 우리가 볼 때 그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가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하고 걱정을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겐 그런 행위가 당연지사였기 때문에 안쓰러워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숲길을 따라 직선으로 오르다 갈 지자를 작게 한 번 그리고 크게 한 번을 하면 어렵지 않게 능선 안부에 당도한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다니던 길이었기 때문에 능선도 그다지 높지 않았고 다른 고개에 비하면 가파르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석파령에 가려면 조금 더 가야 한다.       

2020년 5월 23일 / 송림원으로 가는 임도 / 옛 산판길

안부는 쉬어가기 적당한 3거리이다. 우리는 그곳에 잠깐 여장을 풀었다. 갈림길에서 왼쪽 임도로 들어가 산허리를 타고 굽이쳐 돌고 돌아 12킬로미터 정도 가면 덕두원리 끝자락에 도착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지루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당신에게 안성맞춤일 것이다. 만약 호기심 수준의 욕망이라면 마지막엔 분명 후회할지도 모른다. 탈출구도 없이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결국은 큐브 속에 갇힌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면 미션을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미칠 것 같은 독한 지루함을 이겨내고 조금은 즐길 여유를 가진다면 당신은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임도 트레킹은 지루함과 두려움과의 치열한 싸움인지 모른다.     


그 임도는 과거엔 전형적인 산판길로서 1990년 관에서 현재의 임도로 확장하였다. 과거에는 소비성 산판이 목적이었지만 현재는 산림관리와 산불 진화 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처음부터 기획하여 만드는 임도도 있지만 대게는 과거부터 누군가 사용해 오던 오솔길이나 산판길을 확장하여 임도를 만들었다.     


산판이라는 작업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벌목과 운반이다. 그런 작업은 현재도 산림산업의 일환으로 관의 주도하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옛날 얘기를 하자면, 산등성이에 있는 선택한 나무를 도끼(현재는 엔진 톱)로 패기 전에 벌목 반장이 정해 준 부분에 수구 작업을 한 후 조준한 방향으로 벌도를 한다. 나무가 넘어가면서 다른 나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인명 피해도 일어나지 않게 기획하는 것이 기술이다. 그리고 산허리에 넘어진 나무들을 운반하기 좋게 단목 작업을 한 후 아래 방향으로 목로(잔 나무들을 모아 만든 길)를 만들어 산판길로 끌어내린다. 이 작업에서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렇게 내린 나무들을 다시 네 사람(나무가 크면 6명 혹은 8명)이 목도로 운반하여 산판길 한편에 적재해 두고, 시기를 잡아 산판길을 이용해 산 아래도 운반한다. 그 과정이 지금은 엔진 톱이나 산판차와 산판 전용 굴삭기  등으로 해결할 수 있으나 오래전에는 모두 인력으로 소화해야 만 했다. 산에서 움막을 지어 살면서 산판일을 하는 것은 정말 지난하고 가혹한 노동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벌목 작업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건축용 나무와 장작용이나 목탄용 등의 중소형 나무도 해당되고, 그런 작업을 하는 데 산판길은 필수였다. 산판길은 벌목과 운반의 핵심이며 그래서 산허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산판꾼들은 멧돼지를 사냥하듯 나무를 찾아 길을 내며 더 험한 산속 깊이 들어갔다.      


이곳 산판길에 모아 두었던 벌목한 나무는 목적에 따라 분리한 후 고단한 과정을 거쳐 안보리 나루터로 운반하였고, 그곳에서 그 나무를 이용하여 뗏목을 만든 후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화악산이나 명지산에서 봄에 벌목한 나무를 여름에 가평천 물이 불면 뗏목으로 가평 자라목까지 운송하였다고 한다. 팔당댐이 착공하기 전인 1966년 전까지만 해도 남한강을 통해 서울까지 내려오는 뗏목을 볼 수 있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오래전부터 한강의 뗏목은 남한강이든 북한강이든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 그 무거운 나무를 육로로 운송한다고 상상을 해보면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서 발달한 운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강을 이용하는 운송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산이 많은 한반도는 그 정도가 더욱 분명하다. 따라서 그 뗏목에 목재용 나무뿐만 아니라 땔감용 장작과 팔 수 있는 생필품 등을 가능한 많이 실어 한양으로 운송했다. 일종의 상선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까지만 해도 춘천이나 가평 등에서 추수가 끝나면 소형 뗏목으로 장작을 싣고 서울의 뚝섬까지 가서 팔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수십 개가 줄지어 떠가는 뗏목의 행렬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인제 아리랑이란 지역 민요가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이 뗏목을 타고 가며 부른 일종의 노동요였다.                     


주로 고관대작의 집을 건축할 때 쓸 목재는 품질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인제 지역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인기 있는 건축자재였다. 하여, 기록에 의하면 조선 중기 이후에는 남한강과 북한강에 인접한 산야에 목재용 식목 정책을 강구하고 실제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다르게 보면 한양 주변은 물론이고 경기도 지역에도 그만큼 건축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나무들이 거의 다 벌목되어 없어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나마 나무의 중요성을 뒤늦게나마 인식한 것이다.     


요즘 산에 다니다 보면, 웬만한 산에서는 아름드리나무를 쉽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수령이 수십 년 이상 되는 나무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백 년 이상 되는 소나무가 가끔 보이기는 하지만 면적 당 나무수를 따졌을 때 희귀할 정도로 적은 게 현실이다. 그만큼 나무는 인간의 욕망과 직결되는 중요한 물질이며, 석유처럼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수는 감소하는 운명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연재해로 아름드리나무가 죽었다면 적어도 부패 과정을 볼 때 수십 년 동안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그런 현상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결국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벌목하였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수령 백 년 이상 되는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전에 인간의 욕망이 개입되었다는 의미이다.      


특히 250년 전 난방용 석탄 채굴을 위해 만든 증기기관의 동력원으로 석탄을 사용했던 서구와는 달리 대한민국은 불과 70년 전까지만 해도 나무는 신탄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난방 취사용 연료였다. 조선시대 당시 기록에 의하면, 나무의 중요성이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석탄의 에너지화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석탄을 캐고 운반하는 방법이 너무나 막막했기에 실용화한다는 것은 요원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무연탄으로 연탄을 만들어 실용화했고, 그것도 시골에는 언간 생심이어서 70년대까지도 나무가 취사 난방의 주 연료였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산야는 황폐화의 시간과 범위가 길고 넓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식목일 하면 떠오르는 공통적인 추억이 있을 것이다.      


사실 큰 나무들이 사라진 마지막 이유는 일본에 의해서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자신의 영토에 있는 산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들은 조선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다.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여 벌목을 하게 한 결과 마치 강원도에 철길을 내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듯이 벌목과 운송 과정에서도 수많은 주검이 발생했다. 무자비한 목재 수탈이었다. 혹자는 그 당시가 산판의 황금기라고 했다. 턱도 없는 싼 인건비에 품질 좋은 소나무를 얻을 수 있는 조선은 일본에게 있어 엘도라도였을 것이다. 이 시간 이후, 산행 중에 아름드리나무를 발견하면 긴긴 세월 생존해 온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할 게다.       


일명 제무시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후 미군이 두고 간 군용 GM사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차를 제무시라고 불렀는데 당시 그 개조차를 산판에 많이 사용을 하였다. 서울에서도 벌목한 잡나무를 싣고 털털거리며 달리는 제무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살던 왕십리에 제재소가 있었는데 그곳을 드나들던 제무시를 자주 보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조금 더 세련된 제무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산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요즘의 산판은 과거와 달리 국가 차원에서 산림 보호를 위한 선별적 벌목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목재는 석유보다 더 오래전부터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었다. 이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주고부터 나무는 인간의 욕망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군불에 구운 고기 맛은 인간을 탐욕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면서 목재는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사실 석유가 발견되어 성형성이 뛰어난 플라스틱이란 물질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무는 더 가혹한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쯤이면 지구에서 목재 전쟁이 수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아무튼 석유가 목재의 일부분을 대체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목재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살아서는 지구에 산소를 공급을 하고, 죽어서는 수많은 용품으로 가공되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고 있지 않는가.     


한 예로 바레인에 주로 서식하는 백향목이란 나무가 있다. 살아서 2000년 이상을 산다고 하는 그 백향목은 구약성서와 근동 역사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나무였으며, 사이즈도 나이만큼 상당하여 여타의 거목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막과 광야 지역이 많은 중동에서 나무는 귀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국가에서 탐을 냈지만 운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침만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집트는 역시 요즘으로 말하면 중국의 굴기처럼 상상을 뛰어넘는 사고력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한 굴기로, 그 백향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레바논을 출발해 지중해안을 따라가는 기나긴 항해 끝에 나일강으로 가져왔다. 그만큼 백향목은 피라미드에 버금갈 정도로 욕망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대표적으로, 파라오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관을 바로 백향목으로 만들어던 것이다.    

바레인의 백향목 / 흔히 삼나무라고도 한다

너무 멀리 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다 보니 석파령 마루에 도착했다. 사실 당림리 예현 병원에서 마음 놓고 오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이다.     


석파령은 화악 지맥의 종착지인 삼악산으로 오르기 전의 마지막 고개이다. 유명한 산을 접하고 있는 고개가 그렇듯 석파령 또한 산악인들의 노고가 진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석파령은 한양과 춘천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2년 현재의 도로(당시는 비포장 2차선 도로) 만들어지기 전까지 가평에서 춘천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석파령을 넘어야 했고, 또한 신연강을 나룻배로 건너야 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지금은 비록 찾은 사람이 거의 없는 방치된 둘레길 수준이지만 문화 역사적 측면에서는 문경새재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석파령 마루에서 거나하게 차려온 음식으로 산상만찬을 한 후 너미길로 접어들었다.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숲길은 오후가 되면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고 평온함과 맑은 녹음 향기가 지친 산객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산길이 다 그렇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그런 평화로움과 함께 옛사람들이 걸었던 발자국을 조금이라도 되새겨본다면 작은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도로까지 한 시간 정도 내려가서 시내버스를 이용해 춘천으로 갈 수 있고, 운동량이 모자라다면 의암호까지 쉬엄쉬엄 한 시간 정도 더 걸어도 무방하다. 의암호 변의 데크길을 걸으며 강 건너 두릅산 의암봉의 절경을 감상하는 것도 한 편의 훌륭한 일정일 것이다.           


길을 찾아다니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그 길의 역사성을 발견할 경우가 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관청의 게시물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든지 혹은 읍내 택시 기사한테 물어야 간신히 알 수 있는 길의 역사들을 말이다. 확장된 신설도로나 터널 등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적으로 비포장 옛길은 신설 도로에 묻어지기도 하고 때론  도마치 고개처럼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석파령처럼 지방자치단체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소극적으로나마 관리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옛사람들이 다녔던 길을 밟으면 무언가 그들의 삶의 체취를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광의적인 역사성이 아니라 거친 고개를 넘는 민초들의 굵은 땀방울과 낙타와 같은 끈질긴 두 다리에서 그들의 삶의 여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길에 나의 발자국 하나 남기는 것도 어색하지 않을지 모른다.     

2020년 5월 23일 / 주막거리가 있었던 덕두원리 마을

우리는 텅 빈 버스정류장에서 10분 정도 지나면 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차선도 없는 텅 빈 도로를 뒤로하고 돌아다본다. 산등성이 사이로 우리가 지나온 고개와 골이 실가락처럼 길게 휘어져 내려오다 마을에서 멈춘다. 석파령 언저리에 태양이 걸려 있을 무렵 그 고개를 넘어온 지친 나그네는 이 어디쯤 주막에서 여장을 풀고 막걸리 한잔을 들이켰을 것이다. 내일 아침 신연 나루터에서 떠나는 배를 타야 춘천 읍내로 갈 수 있을 게다. 그때 우리가 타야 할 시내버스가 언덕배기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침묵에 잠겨 있던 허공을 깨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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