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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곰 Mar 08. 2019

004

절망경험자

004

도무지 어떻게 해도 담담한 기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상형마저 담백한 사람을 꼽을 만큼 누구보다 평온함을 사랑하는 내게,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건 곧 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리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일도,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것도, 하다못해 숨을 쉬는 것까지도 모든 게 부자연스럽고 낯설게 느껴진다. 어떤 것 하나가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 여파로 내 여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어리석은 공포감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다.
내가 거쳐 온 많은 자기계발서들은 평정을 찾는 법에 대해 참 간단히 말하곤 한다. 사실 무척 간단한 일인 건 맞지만, 간단한 일들마저 어려워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간단하게 무언가를 전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뻔한 얘기만 해서가 아니라, 혹은 근거 없는 좋은 말만 해서가 아니라, 결국 내 싸움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거라서 그렇다. 방법을 모르거나 답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답이 바로 다음 페이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한 페이지를 넘길 기력조차 없어서 나는 가라앉는다.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인 걸 나도 잘 알지만, 그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먹어지던가.



어릴 적이라는 말을 쓸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지금보다 10여 년 전의 나부터 대학 시절까지의 나는, 늘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결과를 얻는 사람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프기도 했고, 아픈데도 욕심을 부리다 실려가보기도 했고, 하고 싶은 게 있는데도 몸이 아파서 할 수 없어서 서럽게 울어본 적도 있다. 그래서 오만하게도 나는 절망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절망의 얼굴은 내가 본 것보다 더 다양했다.
쓸데없이 변신의 귀재인 절망은, 그 때 그때 힘들어하는 사람의 상황에 맞춰 극적으로 등장한다. 나는 그 학창 시절 내 절망의 색깔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게 절망이었을지언정 절망의 전부는 아니었다. 대학 졸업 이후, 대학원,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겪으면서 나는 절망의 다른 얼굴을 마주한다.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던 걸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보다 훨씬 더 취약해진다. 그게 절망의 가장 얄미운 점이다. 이 정도면 나는 산전수전 다 겪었어, 라고 생각하며 조금 더 단단해질 때쯤 점 하나 찍고 등장해서 ‘이래도?’라고 묻는 것. 처음 절망을 겪을 때는 내세울 자존심 없이 온전히 절망하고 내 불행을 원망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절망을 마주할 때에는 마땅히 원망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다. '이것도 헤쳐왔는데'라는 생각이 절망경험자의 자존심이 되고, '그것도 해냈는데 고작 여기서'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의 기대치를 올려놓는다. 어떻게든 이겨냈다는 경험 때문에 이번에 이겨내지 못하면 이건 오롯이 나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절망적이고 더 취약해진다. 잃을 게 훨씬 많아진 셈이라 타격이 더 큰 것이다.


사실 인간은, 아니 나는 정말로 유약한 존재라, 때때로 근본 없이 운명을 원망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유형의 타인을 미워하는 것도 아닌데, 운명을 좀 원망한다고 나쁜 일도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실컷 원망을 하고 나면, ‘내 탓이 아니’라는 느낌에 묘한 위로를 받으며 수습할 의지가 생긴다. 그렇지만 절망경험자가 되고 나면, 운명만을 원망하고 있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미 한 번 운명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뭐든 내 탓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일어나기가 더욱 힘들다. 사람은 스스로를 원망할 때 가장 약해지는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심사대에 올려놓는 것에는 큰 용기가 따른다. 그리고 심사대에서 여러 번 낙방하게 되면 심사대를 원망하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게 필요한 일일 수도 있고, 사실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반성에 이르고, 끝없는 자기반성에는 끝없는 책임 부과와 절망이 따른다. 또한 안타깝게도, 심사대에서 여러 번 낙방한 사람의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으면, 이제 막 심사대에 올라야 하는 사람도 같은 기분에 잠긴다. 앞으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실제로 무너졌을 때의 좌절. 지나간 사람들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또 막상 겪으면 다른 게 사람 일이라, 이 예비 절망경험자들은 절망초행자임에도 ‘준비를 했다는 기대’로 인해 준-절망경험자가 되어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그리고 절망의 가장 소름 돋는 점은, 그 비슷한 수순도 세부적으로는 전부 다르다는 것이다. 저마다의 절망은 전부 다른 모습이라 위로는 언제나 깊숙이 닿지 못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절망경험자가 되어 심사대 앞에 서 있다. 담담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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