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a Dec 08. 2019

소년 시절 Boyhood, J.M. 쿳시/Coetzee

저 애는 특별해


“저 애는 특별해”라고 애니 할머니(이모할머니)가 말했다고, 그의 어머니가 말해줬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특별할까? 아무도 말해준 적이 없다.’

아마 그래서 쿳시는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는 어떻게  모든 것을, 모든 책과 모든 사람과 모든 이야기를 머릿속에 간직하게 될까? 그가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할까?’

나도 내가 죽은   잔존물들이 쓰레기통에 쑤셔 박히고 사진   남김없이 모조리 불태워져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세상에 존재했었다고   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예전  동네에 그쳤던 기억의 범위가  세계로 넓혀진 지금 죽음은 이름 없이 퇴적되어 간다.  하지만, 종종 쿳시같이 예민한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 대해 세심하게 기억하고 기록해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는  번도 깊이 생각해본  없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란 나라 출신으로 혼자 놀기의 진수를 선보이는 영특한  소년의 어린 시절에 대해 코를 박고 읽게 된다. 기록은 우리의 존재를 탄력성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늘려준다  

쿳시는 역자와의 인터뷰에서  책의 ‘10분의 9 해당하는 부분의 진실을 증언할  있는 살아 있는 유일한 사람' 자신 뿐이라며 '소설과 자서전 사이에 분명한 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역자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발동한다.  쿳시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남아프리카 최고 문학상과 함께 부커상을  차례 받았고 2003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우리에겐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인 듯하다.


예전 ‘미녀들의 수다라고 하는  방송 프로에 나온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하얀 피부의 '브로닌' 남아공 출신이었는데 내가 뉴스 등으로 접해 짐작하던 바와는 달리 그녀가 소개한 남아공은 매우 신비롭고 아름다운 남국의 휴양지 같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책은 1940년대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굶주림과 질병이 만연하고 원주민들은 거의 노예처럼 취급 받던 시기여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종차별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으며 보통 우리가 명작이라 일컫는 장점들이 골고루 들어 있는 진지한 성장 소설이다.

소설처럼 변호사인 아버지는 네덜란드 이민자 후손이고 어머니는 교사로 폴란드계 독일 이민자 후손이다. 부분적으로 영국계의 피도 섞여 있다고 한다. 가족은 케이프타운 외각의 우스터라는 시골에서 살았다.
대체로 소설에 묘사되는 일상은 실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말쑥한 더블 재킷 양복에 가죽으로  서류 가방을 들고 출근하던 주택 임대 담당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그가 지지하던 정권이 선거에서 지자 실직하게 되고 도심인 케이프타운에서 우스터라는 시골지역으로 이사하게 된다.

주인공 소년은 기본적으로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별종이다.
 맞는 거에 대한 결벽증적인 혐오와 두려움, 양말을 벗고 맨발이 되는 것조차 수치스러워하는 단호함을 지녔지만, 일단 시도하고 나면  모든 감정이 별게 아니라는  터득하게 된다. 그럼에도   스스로 정한 어떤 금기를 넘어서기 두려워한다. 순전히 ‘수치심때문에.
지나친 어머니의 과보호로 또래 아이들보다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게 자라나고 있음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며 집안의  노릇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보이스카우트 캠핑에서 익사할 뻔한 일도 모두 비밀에 부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아이임을 느낀다.
그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보통 아이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상 그가 아니며 그의 삶에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정말 친했던 친구, 여러 외삼촌들에 대한 이야기, 함께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긴 아버지,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에 대한 부담감을 늘어놓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어릴  보았던 영화와  주인공들, 어린이 라디오 프로, 드라마, 책들에 대한 소소한 기억들, 비싸서 엄마는 함께   서커스에 대한 아쉬움 나열되고, 팍팍한 살림살이에 찌든 엄마의 푸념들과 한데 엉킨 그녀의 부담스러운 사랑을 강요받는데 대한 부담감을 떨치기 위해 모진 마음을 먹게 되는 심리도 표현된다.

 하나 제대로 하는  없는 아버지가 2 크리켓 투수라 자신도 학교에서 크리켓 타자로 뛰게 되면서 크리켓 게임을 진실되고 무자비한 진짜 삶으로 여기게 된다.  역시나 모두와 다른 취향과 외골수의 기질을 가진 그는 게임에서 실패를 경험한다.  
키우던 ‘코사크 불린 개와   주고  중고 스미스 자전거와 함께  기쁨, 아프리칸스라고 하는 흑인 노예 출신의 아이들의 가난과 불결함 그리고 그들의 외설스러운 말투에서 이질감, 성에 대한 오해와 이해력 부족에 시달렸던 자신의 경험이 나열된다.

  아이들의 매끈한 다리에 집중하거나, 욕망과 쾌락, 순진함, 성적인 표현과 관련된 단어와 표현들에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백인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그러나 인종적으로 훨씬  땅과  어울리며 우월한 종족으로 보이는 호텐토트족 아이들이 땅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굶주림 때문에 자신들에게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푼돈을 얻어가는 거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어려 있다.

현명한 어머니 덕분에 그는 인종 차별보다는 원주민을 지혜롭다고 여기거나 존경할  있음도 배운다. 그건 친절하고 정직하고 용감한 남자가 뻐기기 좋아하는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왕자가 된다는 교훈과 연결 지어 이해한다.

정치적 색깔로 터무니없이 아이들을 체벌하는 선생이나, 자신의 집에 하숙했던 영국인이 자기 집에서 머물며 집안일을 돕던 일곱 살짜리 유색인 아이가  일이 싫어 달아나자 혁대로 체벌을 했던 기억들,  유색인 아이 에디의 장래에 대한 막연한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어머니가  정상적으로 굴라는 채근에 “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싫어요.”라고 항의하는    선생이나 영국인 때문일 게다.
물론 세상 자체도 정상적인 시절은 아니었다. 언제는 정상적이었던 때가 있던가? 게다가 어른들 자체가 매우 모순투성이에 점잖은  형식적인 말을 늘어놓기 일쑤이니 반항아적인 그가 어떻게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정해 놓은 정상의 범위에  수가 있으랴!

그는 사람들은 둔하고 어리석은 삶을 산다고 보고, 어머니는 느리고 아둔하다고 짜증 내지만,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유일한 어머니와  집안사람들에 매달린다.

그는 세상에서 농장을 가장 사랑한다.
농장은 그의 존재를 규정할 정도다.
그를 농장에 붙들어 매는 은밀하고 성스러운 말은 '속해있다 belong'이다. (...) 나는 농장에 속해 있어. 그가 진정으로 믿으면서도 마력이 끝나버릴까 두려워 밖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 간직하는 말은  말과 다르다. 나는 농장의 소유야. (...) 이것이 그가 가장 은밀한 마음속에서 조차 최대한으로 밀어붙일  있는 지점이다. (...) 푸엘 폰테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농장은 그들  누구보다 위대하다. 농장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자신이 농장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책엔 관한 , 그는 확고한 자신만의 선별 기준이 있다. 진지한 책을 읽고 위대한 사람이 된다는 꿈도 있다. 역시 좋은 책에 대한 견해 또한 아버지와는 완전한 불일치를 이룬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꼰대 같은 아버지의 명시에 대한 찬사야 말로 가식적이라고 생각한다.

신문 외에는 요즘 아무것도 읽지 않는 아버지에게서 시를 읽는 소년의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가 상상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어렸을  농담하고 웃고 덤불 뒤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뿐이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른들을 신뢰할 수가 없다.

그리고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악영향 또한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적이고, 정치 편향적이며, 가진 자들에게 치우치고, 불공평하거나 능력을 억제해서 어린 영혼이 짜부러 들게 만든다.

엎질러진 잉크처럼 주체할  없이 글을 쓰고 싶은 그에게 학교는,

'우스터에서 학교에 다닐  (...). 사물의 일상적인 표면 밑에서 날뛰는 잔인성과 고통, 증오가 날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같았다.  (...) ‘케이프타운에서(...) 학교는  이상 거대한 흥분이 감도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쪼그라든 협소한 세계이며, 다소간 온화한 형태의 감옥이다. ‘

이런 곳이었다.

미완의 글이지만,  정도에서 그냥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책을 선정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랄까..


#소년 시절, #Boyhood, #쿳시, #Coetzee



작가의 이전글 영화, 우리의 20세기, 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