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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Feb 14. 2024

임금이 정한 동네 연희동 골목길 1.

<골목길의 다양한 이야기 속으로> 제2편, 연희동 골목길

골목길의 다양한 이야기 속으로

   골목길은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2월 13일 화요일 저녁 7시, 이번엔 연희동 골목길을 걸었다. 지난주에 걸었던 청파동 골목길이 포근하고 따뜻했다면 이번 연희동 골목길은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저녁인데도 기온은 봄날씨처럼 포근하다. 몇일 동안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도 오후에 물러가 어느 때보다 가볍게 걷기를 시작한다.


기사식당 거리가 전한 감동

   출발하는 곳은 전철 2호선 홍대입구역 3번 출구이다. 서대문구 연희동의 남쪽에 있다 해서 이름붙은 마포구 연남동부터 걷는다. 지금은 구는 다르지만 연남동은 연희동에서 갈라져 나온 동네다.

   예전엔 이 근처에 기사식당거리가 있었다. 지금의 연남파출소 좌측 연남로 400m부터 우측 동교로 400m 총 800m 구간에 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메뉴의 기사식당이 골목을 메우면서 기사들이 찾는 명소 거리가 되었다. 식당들은 대부분 언제 짬이 날지 모르는 기사들을 위해 밤낮 없이 24시간 운영됐다.

   지금은 경의선숲길이 조성된 후 주변이 상가가 밀집한 제일 핫한 지역이 되면서 임차료가 오르고 주차공간이 없어져 성업중이던 기사식당도 하나둘 문을 닫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옛 모습을 볼 수 없을 만큼 모든게 변했다. 그래도 아직 몇 곳이 남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그곳을 향해 첫 발길을 옮긴다. 드디어 어두운 골목길 한켠에 '감나무집 기사식당'이라고 불을 밝힌 식당이 나온다. 앞마당에 수십대의 택시들이 한 대의 여유공간도 없이 빼곡히 주차돼 있다. '24시간 오픈'이라는 간판도 또렸하다. 놀랍고 반갑다. 오랜 세월 굿굿이 자리를 지키고, 요즘은 인건비 때문에 식당들이 일찍 문을 닫지만 지금도 24시간 문을 열어놓는다는 것, 그래서 기사분들이 언제든 이곳을 찾아 올 수 있다는 것, 그분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잠시 쉴 수 있다는 것, 오랜 세월 묵묵히 자기의 역할을 하며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맡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잔잔한 감동이다.

   이미 짙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운치가 빛나는 경의선 숲길 따라 걷다 반대편 골목에 들어선다. 이곳에도 기사식당인 송가네 감자탕집이 있다. 깨끗이 리모델링돼 옛 모습은 없지만 역시 전통대로 '24시간 오픈' 간판이 붙어 있어 이곳이 오래된(38년 된) 기사식당임을 알리고 있다.


연남동 기사식당거리의 기사식당들


달 보이던 연희동 주택가의 첫 골목

   새로운 경의선을 굴다리로 통과하고, 바로 이어 성산대로를 역시 굴다리로 통과하면 연희동이다.

   가장 먼저 궁동산 기슭의 '104고지 전적비'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연희동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70년대의 골목길 풍경 같이 여전한 모습을 간직한 단독주택가가 산 밑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우리 모두는 어렸을 때 다녔던 이런 골목길에 익숙할 것이다.

   연희1동, 연희2동은 서울에 몇 안남은 주거전용지역으로 주거의 쾌적한 환경 보전을 위해 3층 이상의 개발행위를 할 수 없다. 덕분에 "이곳도 없어질지 모른다" 는 불안감이 없이 언젠가 돌아갈 마음의 고향 같은 골목길 주택가의 향수를 만끽하며 걷는다.

   조용한 주택가 비탈길을 오르다 보니 높은 지대여서일까 밤하늘에 떠 있는 갸냘픈 초승달도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평화를 원했던 수많은 희생을 기억하는 곳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 주택들 사이에 '104고지 전적비'가 서 있다. 추모 글귀나 아무 설명도 없다. "생뚱맞게 이런데 이게 있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주택들 사이에 전적비가 있는 모습이 낯설지만 이 하나의 비가 우리의 한 부분이었고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그날의 역사 속으로 말없이 안내하고 있다.

   6.26전쟁 때 낙동강까지 밀려내려갔던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해 서울 수복을 남겨두고 있었다. 북한군은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서울로 향하던 길목이던 이곳 궁동산(산의 높이가 104m라 일명 104고지) 일대를 완전히 요새화해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곳을 탈환하지 않으면 서울로 진군할 수가 없었다. 1950년 9월 20일 드디어 한국 해병대가 한강을 넘어 공격을 감행했다.

   그것은 죽음을 불사한 혈전이었다.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이며 적을 격퇴시켰지만 희생이 너무 컸다. 전투에 참가한 우리 해병대 중 26명만 생존했고 178명이 전사했다. 북한군은 그 열 배인 1,750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시체가 산을 덮었고 연세대 북문과 연희3동 쪽엔 쌓아놓은 시체가 산을 이뤘다.

   지금의 이 평화로운 주택가의 반전이다. 우리든 북한군이든 사랑하는 부모와 가족을 두고 전장에 나섰던 꽃다운 젊은이들이었다. 한동안 말을 잃었다. 평화에 반드시 댓가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다만 평화를 원했던 수많은 희생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


아무 설명도 없이 '104고지 전적비'가 주택가 한 켠에 달랑 서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마트와 지금의 연희동의 성립

   다시 주택가 비탈길을 내려와 연희동 중심부를 향해 걷는다. "상가들이 다르네요" 일행 중 누구의 말대로 댄디한 가게들이 길 옆을 장식하고 있다. 화교가 하는 중국집 '진보'와 '이화장'도 보인다. 바로 이어 엄청나게 큰 규모의 '사러가' 마트에 도착했다.

   사러가 마트는 연희동이 주택 밀집지역이 되면서 1965년에 처음 설립돼 지금까지 60년 간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마트이다. 연희동은 전철역이나 교통도 좋지 않고 높은 새 쇼핑센터 건물도 들어올수 없어 사러가 마트가 지금도 동네의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근대식 마트인 '사러가 마트' 의 외부와 내부


   6.25전쟁 후에 시체가 널려 있고 도심지와 동떨어진 이곳 연희동은 판자집들이 즐비한 빈민촌이 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서울에 터전을 잡기 위해 모여들었다. 60년대까지 산기슭을 위시한 주인없는 땅에 대규모 판자촌 지대가 형성됐다. 산 아래 평지에도 지금처럼 큰 주택들이 없었다.

   1969년부터 도시개발계획이 진행돼 판자촌 지대는 아파트 지대로 탈바꿈됐다. 궁동산과 안산 자락에 지금도 아파트가 서 있는 이유이다. 성원아파트는 다시 재개발되었지만 지금도 당시의 5층 정도의 타운하우스 같은 아파트들이 산자락에 묻혀 있다. 단독주택가가 워낙 드넓게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어 높은 층으로 새로 재개발된 아파트를 제외하면 산자락의 소규모 아파트들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연희동의 일부가 되어 있다.


주택가의 작은 갤러리가 전한 큰 메시지

   남다른 의미와 분위기를 가진 사러가 마트 건물 안을 통과해 연희동 주택가 골목길 쪽으로 향한다. 길가에 외국 거리에 온 것 같이 이색적이고 다양한 카페들이 있고 길모퉁이의 호주식 카페 안에 사람들이 그득히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여유롭고 평화롭다.


연희동 골목길의 다양한 카페들


   산기슭 쪽의 '플랫폼 팜파' 갤러리가 있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10년 전부터 연희동 주택가에 갤러리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철이 안들어가고 3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차들의 통행도 많지 않아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동네의 정적인 공간을 예술가들이 선호했을 것이다.

   플랫폼 팜파는 연희동 골목의 소규모 갤러리를 상징한다. 즉 연희동의 갤러리는 새로 건물을 짓는게 아니라 기존 주택의 한 층을 개조해 쓰는 형태가 많은데 플랫폼 팜파도 가족이 살고 있는 주택의 지하층을 개조해 갤러리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직접 가 보니 10평도 안되는 공간인데 이곳을 기반으로 기획초대전도 하고 연극 등의 공연도 하고 아카이브 기획전도 한다는 것이 놀랍다. 사실 삶의 여유와 영감을 주는 이런 생활속 문화 향유가 우리의 삶이고 생활이 되어야 한다. 대규모 큰 빌딩의 상업성이 도드라진 갤러리보다 순수한 예술혼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한 평을 그리워하는 모습의 일단을 보면서 이야말로 예술의 열정이 살아 숨쉬지 않으면 불가능한 대표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희동 작은 갤러리의 대표격인 '플랫폼 팜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골목길의 가치

   골목은 다시 갈라지고 꺾어지고 휘어지면서 지극히 편안한 분위기로 다양한 상상을 자극한다. 저 끝엔 '장희빈 우물터'가 있을 것이다. 이 주택가 골목에 장희빈 우물터라니, 이 또한 생뚱맞다.

   우리는 언제나 문화재나 유적지로 정한 일정 공간에서 옛 유산을 보는데 익숙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만 골목길은 근본적으로 모든 곳이 문화재이고 유적지인 셈이다. 우리는 골목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땅에 수천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골목길은 그 이야기를 듣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기존의 골목길을 흔적도 없이 모조리 밀어버리고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 숱한 영감을 주는 이야기들을 함께 지우는 것이다.

   또한 주택가 골목길은 어디나 지형이 보존돼 자연스레 언덕길이 사람 사는 동네의 연대성을 높이는 입체적 구성미를 만든다. 걷다보니 낮은 담의 한 집이 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 안뜰 소나무 사이로 저 멀리까지 주택가 불빛들이 보인다. 골목길의 특성인 개성과 개방성, 연대성을 한 눈에 증명해 주는 장면이다.


언덕 쪽의 주택가에서 본 연희동의 모습이 평화롭다.


장희빈이 머리를 감았다는 우물터

   길은 다시 굽이쳐 내리막길로 향한다. 길모퉁이에 삐죽하니 옛 우물이 서 있다. 바로 이곳이 장희빈 우물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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