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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Jul 01. 2024

담장과 사랑, 그리고 꽃

담장, 연정을 품다

   요즘 능소화가 한창이다. 며칠 전 뚝섬한강공원을 걸었는데, 사진 명소인 능소화벽을 지나다 담장이 가진 애틋함의 정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능소화는 궁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 실현한 장소인 담장으로 인해 극상의 아름다움을 품게 되었다. 한국의 담장은 사랑에 있어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까.


담장이 매개한 사랑

   지금으로부터 650년 전인 고려 공민왕 때, 개성의 대귀족의 딸이던 최랑은 지역의 수재이던 이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생도 국학에 가는 길에 최랑의 집을 지날 때면 혹시 최랑이 보일까 하여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곤 했다.

   어느 날 이생이 마음을 다잡고 담장 안을 엿보는데, 때마침 구슬발이 반쯤 가린 정원의 누각에서 수를 놓고 있던 최랑은 이때다 싶어 시를 읊는다.

길가는 저 서생 누구 집 도령일까
푸른 깃 넓은 띠 버들가지 사이로 비치네
오호라, 이몸 변해 제비라도 된다면
구슬발 후려 걷고 담장을 넘어가리

이생은 화답의 시를 써서 담장 안으로 던졌다.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꾀어내듯
사모하는 마음 이미 넘쳐흘러
담장 위 만발한 붉은 도리화 요염한데
바람 불어 꽃이 지니 흩어진 곳 어디일까.

   최랑은 다시 답장의 시를 써 담장 밖으로 던졌다.

도련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해질 무렵에 만납시다.

   두 사람이 귀신이 되어서도 사랑을 나눌 만큼 절절한 인연을 맺은 것은 담장 너머로 사랑의 마음을 전한 결과였다. 김시습의 소설 <이생규장전>의 도입부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여성이 먼저 담장을 넘어가겠다는 적극적 마음을 표현하고 약속까지 정한 것과, 담장  붉은 도리화가 특별히 다가왔다. 당시는 남녀 간 우열이 없는 남녀평등의 시대였음을 엿볼 수 있다. 오히려 소설에선 남자 이생이 소심남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담장 위 만발한 붉은 도리화"가 무슨 꽃인지 궁금해진다.


판타지한 사랑 이야기 <이생규장전>의 두 주인공. 제목의 규는 '엿보다', 장은 '담장'으로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본 이야기'이다.


담장을 넘은 적극적 사랑의 꽃

   이생규장전 속의 도리화는 도화꽃 즉 복숭아꽃으로 '붉은 도리화'는 꽃잎 색깔이 붉어 '홍'자를 붙인 홍도화를 말한다. 바로 만첩홍도화이다. '만첩'은 붉은 꽃잎이 겹겹이 쌓여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만겹'의 뜻이다. 그러니 4월이 되면 담장 위로 만발한 만첩홍도화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만첩홍도는 담장 위로 길게 가지를 뻗어 황홀한 붉은 꽃잎을 담장 밖까지 활짝 피워 보인다. 그 매혹적인 모습에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자동으로 멈추고야 만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담장 밖으로 길게 목을 빼고 있는 모습처럼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 그 적극적이고 당찬 모습이 '사랑의 노예'라는 만첩홍도의 꽃말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아마도 그래서 이생규장전에서 만첩홍도는 최랑의 분신처럼 '담장 위 요염한' 자태를 뽐냈고 '꽃잎이 흩어진 곳 어디일까'라고 한 표현대로 마음에 닿은 사랑의 전령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첩홍도의 정열을 닮은 둘은 결국 죽어서까지 사랑을 나누는 인연을 맺는다.   


2019년 4월 도보 국토종단 길에 전남 광주 양림동거리에서 담장 밖으로 길게 가지를 뻗은 만첩홍도를 만났다.
밀양 금시당 백곡재에 붉게 핀 만첩홍도가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담장 에서 사랑의 간절함이 피워낸 꽃

   담장을 넘지 못해 죽어서 꿈을 이룬 사랑도 있다.

   궁녀 소화에게 신분의 차이는 담장보다도 높았다. 임이 다시 찾아주길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상사병에 걸리고야 말았다. 소화는 죽어가면서 자신을 담장 아래에 묻어 줄 것을 부탁했다. 죽어서 담장 너머 임의 소리라도 듣기 위해, 소화는 담장 바로 밑에서 나발처럼 귀를 활짝 연 붉은 능소화로 다시 태어났다.

   능소화가 담장에 기대어 사알짝 올려다볼 땐 그 사랑의 간절함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만들어낸다.


부산의 한 시골 마을 담장에 핀 능소화(상), 서울 뚝섬한강공원의 능소화벽(하)

   

담장, 연정을 품다

   원래 한국의 담장은 연정을 품었다. 몰래 담장 안에 규수를 훔쳐보며 짝사랑을 키운 것도 담장이고, 그 규수는 그가 언제나 다시 올지 보고 싶어 담장보다 높이 더 높이 널을 뛰었다.

   담장은 사랑의 매개체이기도 했다. 담장 위에 쪽지를 올려놓아 마음을 주고받던 곳도 담장이었다.

   이보다 더 옛날, 한 아내는 담장 저편에 갇혀 있는 옥중의 남편을 보기 위해 널뛰기를 하면서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전설적 이야기는 널뛰기가 처음 생긴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담장은 그리움, 만남, 새 세상으로의 기대를 품고,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왔다. 한국의 담장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위압적이지 않은 담장의 낮은 높이 때문이다. 그 부담 없는 높이로 인해 경계의 역할만 했을 뿐 차별이나 넘사벽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유럽의 도저히 접근할 엄두를 못 내는 성벽이나 중국의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높디높은 담장이라면 한국의 담장처럼 수많은 애틋하고도 정겨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담장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 빌딩과 아파트, 길을 가로막고 선 높은 벽체만 늘어가고 있다. 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담에 기대어 피어난 능소와와 담 위로 삐죽이 얼굴 내밀던 만첩홍도 같은 소박하지만 절한 사랑이 같이 말라가는 것이 아니길 바래본다.


대구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 담장을 살짝 올려다본 능소화가 한국적인 애틋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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