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걷'자도 몰랐던 나
사람길 회복의 꿈을 꾸다
걷기도 싫고 찻길도 싫었다
10년 전의 나는 걷기의 '걷'자도 몰랐다. 걷기가 싫었다. 한 블록 이동도 차가 좋았다. 이유는 "왜 걸어. 시간 낭비하게"였다.
길의 매연, 쌩쌩 지나가는 철제 차량들의 위협과 그 무심함이 싫었다. 넓은 차도의 한쪽 길가에서 발가벗겨진 원숭이처럼 걷는 내 모습도 싫었다.
차는 나를 든든히 무장시켜 주었다. 분절화돼 개별로 갇힌 도시에서 갇힌 차를 타고 익명의 편리함을 누리는 것이 마음도 편했다.
이것이 걷기를 모를 때의 나였다. 길이 차도가 되고, 도로는 찻길을 의미하는 요즘 시대가 만든 100% 도시인의 모습이었다. 그때는 사람만 걸을 수 있는 사람길이 도시 이면에 많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때였다.
걷기 위해 길을 찾다
그러던 내가 걷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당신은 고혈압입니다. 저와 같이 치료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라는 말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듣고부터이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번 고혈압이면 평생 고혈압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그 고혈압? 나에게 이런 일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길을 알고 걸은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해 길을 찾은 케이스이다. 걸으려고 찾다 보니 찻길이 아닌 사람길이 있었다.
내가 걷기 한 이후 사람길을 강조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걷지 않을 때부터 찻길이 주는 냉혹함, 분주하지만 고립된 단절의 길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길에서 삶의 길을 찾았다. 바로 이거야! 겉으로 하는 말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내뱉는 환호성이 터졌다. 걷기 못해 건강과 삶이 찌들어가던 내게 사람길은 금광이었고 구세주였다.
사람길은 육체적, 정신적 치유의 길이었다. 차 없이 모두 평등하게 같이 걷는 소통의 길이었다.
사람길 사랑이 사람길 개발로
사람길을 알고부터 미친 듯이 걸었다. 매주 전국의 사람길을 찾아 걸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걷기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됐다.
사람길에 대한 애착이 많았던 나는 차도로 나가지 않고도 서울의 사람길을 연결해 걸을 수 있는 '서울 사람길 100km 루트'를 개발했다. 서울을 평창동에서 우면산 밑의 서울교육청 교육연수원 앞까지 종단하는 '서울도보종단길'을 개발하고, 광나루에서 난지한강공원까지 횡단하는 '서울도보횡단길'도 개발했다. 찻길이 아닌 사람길로 서울을 도보 종단하고 횡단할 수 있다니, 아마 매머드 도시 서울이 도로와 빌딩으로 도배돼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 있을 것이다.
도보 국토종단에 도전하려고 보니
5년을 사람길에 미처 걷던 중 로망이던 도보 국토종단에 도전하기로 했다. 육당 최남선 선생님이 해남 땅끝에서 함경도 온성까지 대각선으로 3,000리라고 했던 우리 국토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빼고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으로 대각선을 그어야 했다.
그러나 걸어갈 길을 찾아보니 도보 국토종단길이 없었다. 그전에 도보 국토종단을 했던 모든 사람들은 최단거리인 국도를 따라 걸었다. 도보 국토종단을 하려면 찻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1960년대부터 내셔널트레일을 지정 관리하고 있는 미국, 1970년대부터 국토 전역을 종단, 횡단, 순환하는 보행자 중심의 길을 조성해 관리해오고 있는 이웃 일본을 비롯해 영국의 National Trail, 뉴질랜드의 Walkway, 호주의 Walking Track, 독일의 Wandering Route 등 소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 모두 있는 도보 국토 순례길이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길의 회복을 위해
차도로는 가기 싫었던 나는 사람길로 도보 국토종단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길 국토종단'이 2019년 1월부터 시작됐다. 10명의 단원들과 함께 매달 둘째 주 주말을 이용해 이어 걷는 방식이었다.
총 17번의 주말을 거치며 34일간 총 946km의 도보 국토종단을 완성했다. 종전의 국도를 따라 걷는 방식은 700km 대를 넘지 않지만 사람길을 새로 개척해 걷다 보니 30% 정도가 더 긴 국토종단길이 되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길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우리 국토의 날것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박제되고 포장된 유명 관광지에서 우리 국토의 본모습을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관심 두지 않고 몰랐던 진정한 우리 국토는 지금도 살아서 생동하며 우리의 삶을 보전하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순연한 우리 국토의 이야기를 <사람길 국토종주>라는 책으로 펴냈고, 국토교통부 국토발전전시관의 '이달의 도서'로 선정됐다.
그 이후 사단법인 사람길을 설립해 사람길 걷기 보급에 나섰다. 사람을 위한 사람길 회복 운동에도 나서고 있다. 사람길 보급과 걷기 인솔을 선도해 줄 걷기인솔지도사 양성과정도 만들었다. 내가 그랬듯,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는 사람길 걷기의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