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북한산에 갔다. 북한산은 언제 가도 실망하는 법이 없다. 오랜만에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설렌다. 칼바위능선으로 가는 초입의 숲길을 들어서서 걷는데 문득 한 문장이 뇌리를 스친다.
길에 길이 있구나.
(앞의 '길'은 사람이 걷는 길이다. 찻길인 도로나 찻길 한 귀퉁이에 사람에게 내준 인도는 사람길이 아니다. 사람길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길이다. 뒤에 '길'은 해답이다. 인생 해답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기술이 아니다. 유쾌한 마음이고 행복이다.)
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신묘했다. 아마도 걷기가 주는 창의 사고의 선물이었던 것 같다.
자연으로 들어서서 걷는 순간 답이 열리기 시작한다. 방해받지 않는 길, 자연과 함께 하는 길을 걸으면 즐거움이 시작된다. 뇌가 드디어 자극받기 시작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음이 행복하면 사람은 저절로 길을 찾아가게 돼 있다. 분명히 '저절로'이다. 억지로 쥐어짠다고 답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뇌를 활성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즉, 뇌를 잘 쓰면 인생 해답은 저절로 찾아진다. 인간의 뇌는 스스로 해답을 찾을 만큼 무한대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뇌를 평생 30%도 쓰지 못한다. 그중에도 뇌를 잘 쓰는 사람이 있고 못쓰는 사람도 있다. 뇌신경세포의 연결성은 자주 쓰면 살아남고 한 번도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뇌를 쓰는 사람에 따라 뇌가 퇴화되기도 하고 계속 성장 발달하기도 한다. 못쓰고 안쓸 뿐이지 인간의 뇌는 10의 15 승개의 연결성을 갖는다. 거의 무한대의 창의적 사고의 바탕을 갖는 것이 인간의 뇌이다.
그런데 왜 뇌를 쓰지 못하는 것일까
뇌가 항상 하는 일은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똑같은 게 반복되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즉 뇌신경세포가 반응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뇌가 정보 자체보다 정보의 차이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매일 유사한 일상이 반복되면 기억에 남는 것도 별로 없는 것은 차이 없이 똑같은 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뇌가 활동하지 않고, 뇌를 반복 루틴으로 제한적으로밖에 쓸 수 없다.
조금 더 설명하면, 하던 일을 계속하면 두뇌의 작용은 자동화된다. 우리가 전문가 전문가 말하지만 어느 분야의 전문가는 그 분야의 일을 처리하는 기계화된 해결절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두뇌 작용으로 보자면 자동화된 루틴인 것이다. 바로 이 자동화, 기계화에 함정이 있다. 그런데, 그 함정에 빠지면 남의 것을 억지로 적용하는 고정관념에 얽매어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그 결과는 비참해질 수 있다. 다 알다시피 창의성의 적은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창의성 교육이다. 바로 이 점에서 자동화된 또는 기계화된 사고를 벗어나 참신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해결책이란 기계화된 해결절차나 방법이 아니라 ‘이질자극 경험’이다. 이질자극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참신하고 자유로운 영혼, 그것이 바로 창의적인 문제 해결의 에너지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세기적인 발명이나 발견의 배후에는 늘 ‘산책이나 여행’이라는,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 등장한다. 교육은 고착적 지식을 주입해 주는 것이 아니라 뇌가 성장하고 창의성이 발달하므로 스스로 나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해답은 뇌를 깨우는 것
결국 창의적 사고를 위해 뇌의 연결성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뇌의 연결성은 어떻게 확보하는 것일까. 바로 경험이다.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경험인 것이다.
새로운 것을 볼 때 뇌는 자극을 받아 새로운 시냅스를 생성한다. 기억을 하고 연관된 옛 기억과 경험 세포까지 활성화한다. 뇌 연결성이 활발해지고 뇌가 성장한다. 경험은 수천수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다. 뇌과학계에서 경험을 뇌에 이식하려는 시도인 '브레인 라이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경험은 지식이 아니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환경의 조성이다. 즉 뇌가 성장하는 자양분을 주는 것이 필요하고, 그 요체는 뇌를 자극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길에서 길을 찾는다"에서 길, 즉 해답이란 방법이 아니라 무한대의 연결성을 갖고 창의적 사고의 원천인 뇌를 깨우는 것이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연결성을 많이 확보하므로 다양한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되고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창의력의 기반이 된다.
뇌를 깨우는 것을 방해하는 현대인의 위협들
첫째, 안전욕구로 인해 탐험을 안 하는 것
일례로 길을 잃어본 사람이 길을 잘 찾는다. 사업도 실패해 본 사람의 성공 확률이 높은 것과 같다. 그만큼 경험이 중요하다. 내가 어디 있고, 어디로 가는가, 어떤 길을 갈까를 찾는다고 할 때 새로운 길을 탐험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탐험을 안 하려고 한다. 탐험 욕구보다 인간의 보호본능, 안전에 대한 욕구가 앞서서 탐험을 통한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길을 찾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길을 잃을 용기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다. 경험의 중요한 기능은 뇌를 깨우는 것이지 지식이나 방법이 아닌데 자꾸 기계화된 절차나 방법만 찾으려고 한다. 배워서, 남이 알려주는 대로 길을 가려다 보니 실패하고 만다. 내 경험이 필요하다. 뇌 안에 나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금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잘못 든 것이 아니라 나의 뇌 안에서 나만의 지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속도를 따질 필요도 없다. 꾸준히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며 가다 보면 누구보다 앞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둘째, 끝없는 스트레스 환경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지금 당장 생존의 위협을 가하지는 않지만 끝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끝없는 긴장상태에서 정해진 자동 벨트를 따라갈 뿐이다. 여기에 창의성이 낄 수 없고 새로운 경험이 생길 여지가 없다. 자동 벨트에서 이탈하는 순간 죽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스트레스란 끝없이 용수철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용수철이 늘어나다 한도에 다다르면 더 이상 탄성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번아웃이 되고 만다. 극단적으로는 정신질환까지 생길 수 있다. 많은 도시인들이 ‘캐빈 피버’(cabin fever)를 앓고 있는 이유이다. 불과 1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걷기는 인간 삶의 중심에 있었다. 인간은 야생동물처럼 수십만 년간 광활한 초원에서 하루 3만 보 이상을 걷거나 뛰어다녔다. 자유와 직립보행은 인간을 창의적 사고를 하는 인간이게 만든 원천이다. 그런데 매일 좁은 공간과 정해진 도로 안에 갇혀 사는 현대의 인간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겠는가.
길에서 길을 찾다
해법은 아주 간단하다. 반복 루틴을 벗어나 자유롭게 들로 산으로 사람길을 걷는 것만으로 현대인이 겪는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산길은 시속 2~3km도 될 수 있고, 둘레길은 시속 4~5km도 될 수 있다. 걷기의 가장 큰 제1의 가치는 스트레스 해소와 새로운 자극이다. 빠른 속도, 즉 차의 속도로 가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걷는 속도로 가면 모두 보이기 시작한다. 뇌에 그만큼 많은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고 뇌가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가로서 영화 공연 전시를 보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멋진 관광지나 리조트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자기의 몸이 참여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머리로만 꿈꾸고 느끼는 반쪽의 행복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면 몸이 같이 참여하는 자극일수록 좋다. 걷기는 몸이 참여하는 자극이다. 육체와 근육을 같이 움직이게 만들어 뇌의 만족감이 크다. 높은데 오르면 몸 쓰기와 원거리의 풍경이 주는 숱한 자극들까지 뇌와 콜라보를 이루게 해서 뇌자극 효과를 배가시킨다. 몸을 쓰면서 동시에 뇌를 자극할 수 있는 것은 걷기밖에 없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 뇌 안에 내 삶의 지도, 나의 길을 만드는 요체는 새로운 경험이고 뇌를 자극하는 것이다. 즉 이질자극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삶의 진정한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길에서 길을 찾다", 즉 사람길을 걸으면 저절로 삶의 길을 열어준다.
사람들은 내가 걷기 전의 얼굴과 걷기 후의 얼굴이 다르다고 말한다. 아마 오늘도 걷기 후의 내 얼굴을 누군가 보았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