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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Mar 12. 2024

참회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 보니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질렀고 후회되는 일 중 하나는,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측면에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사실이다. 

 정의감 내지는 사람의 도리와 윤리라는 이름의 기준과 표준에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지적하거나 고치려 들었고 그러다 안 되면 싸우고 분노하며 내 속을 끓였다. 그게 배운 사람의 도리며 사회적 책무라고조차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별 효과가 없었으며 나만 상하고 다친 꼴이 되었다. 

    

 먼저 타인을 어떻게 행동하라고 요구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리고 내 기준은 내 것이기에 내가 지키면 그만이지,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는 것은, 지나친 오만으로 그것은 절대군주인 왕(ruler)만이 할 수 있는 잣대(ruler)다. 그러니 지나친 착각 속에 산 것이나 진배없으며 이것이 바로 인간 에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20대에는 민주화 과정에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고 체류탄을 맞으면서도 나의 사명이라 여기며 저항했었다. 직장에서도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화를 냈고 싸우며 비난했다. 그렇게도 못하면 속으로 화를 내며 내 속만 상하고 다쳤던 일이 많았다. 퇴직 후 후련했던 일은 바로 그런 부당한 일이나 사람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아진 것도 별반 없고 나만 다치고 상했으며 인간관계도 나빠지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나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생명의 중요한 법칙을 간과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둠이나 사라져야 할 것들과 맞대응한 결과이며, 어둠을 이기는 방법은 어둠과 싸울 것이 아니라 빛을 발하면 되는 것이다. 내 안의 빛을 밝힘으로써 어둠은 사라지며,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바른길로 안내할 수 있다. 아무리 어둠을 몰아낸다 해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헛수고를 할 뿐. 바로 내가 그렇게 하다 스스로 지친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싸움은 어차피 방향성이 없으며 탈출구도 없다.      

 그래서 그냥 빛을 비추면 된다. 이렇게 생명의 법칙을 간과한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다 허사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 더 깊이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나 원망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서로에 대한 침해와 강요가 일어나는가? 

     

 모두 안에 존귀한 이가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리고 결국은 그들도 어둠을 뚫고서 빛을 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인내할 수 있다면, 내가 굳이 나서서 고치고 개선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더 궁극적인 질문은 내가 어떻게 고치며 뭘 고쳐야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이런 태도야말로 나의 좁고 오만한 에고에서 나온 것 아닌가? 이 모두는 개선될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져야 한다. 인간의 에고는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이건 간에 단지 사라져야 하며 개선하려는 노력 자체가 잘못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내가 한 노력과 내가 받은 상처 모두가 어리석음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누구의 모자람이나 뻔뻔스러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비판하고 저항했기에 나만 힘들었고 내 속만 상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내가 택한 타인의 잘못에 대한 나의 저항과 비판 그리고 그들을 내 식으로 고치려 들었기에 일어난 일로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이 어쨌건 그것은 내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만약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이 같은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가 달랐을 것이며 그들을 훨씬 더 쉽게 빛으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 나도 어리석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받은 상처는 그 모두가 나의 잘못이기에 다 털어버리고, 그들 모두에게도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빌어본다.


 좀 더 성숙한 시각에서 보면 사람을 이러쿵저러쿵 가릴 것 없이 모두를 축복하며 나의 길을 부지런히 가는 것만이 내가 그나마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리저리 내가 먼저 가리게 되면 결국 나도 같은 잣대로 저울질당할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먼저 이런 좁은 소견으로 인해  가까이 있는 천국으로 변환할 수 있는 참된 길을 밝히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모두를 귀한 존재로 대접함으로써 나 또한 그런 존재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나의 부족함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다른 사람의 부족도 너그러이 덮어줌으로써 모두가 서로를 사랑과 이해로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두 안에서 빛과 사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인내하고 지켜봐 주며 내 안의 빛을 닦음으로써 밝히는 것이, 내가 세상과 나눌 수 있는 치유며 축복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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