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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Dec 29. 2020

<그리고, 베를린에서>가 전해준 치유의 실행

누구든 탈출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을 억누르는 무언가에서,

자신의 안위를 보호해주는 무언가에서,

겉으론 편안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요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탈출.


그런데 사실, 누구든 쉽게 결정하진 못한다.

탈출 이후에 찾아올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하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숨도 쉴 수 없을 거 같으면,

그때는 일어나야겠지

그런데 어디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할까?


그 '방향'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

넷플릭스 4부작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이다.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그곳엔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가 있다.

20세기 중반쯤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지금. 21세기 뉴욕의 한 마을이다.

외부와 모든 통로를 차단한 채 자신들만의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규칙을 지키며 사는 이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도망 온 유대인들의 후손인데, 드라마에서 언듯 보기에도 굉장히 풍요로워 보인다.

실제로도 뉴욕에 사는 유대인 공동체 사람들은 다들 부자라고 한다.


이 곳의 한 소녀 에스티.

그녀의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니, 그 공동체를 떠났고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로 지내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할머니 손에 길러진 에스티는 막연하게 결혼 생활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결혼하면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될 거라는 할머니의 가르침 아래 18살 부푼 꿈을 안고 중매로 결혼을 한다.

하지만, 유대인 공동체에서 여자는 단지 아이를 낳는 기계일 뿐이다.

결혼한 지 1년이 되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에스티는 시댁의 비난, 압박, 감시를 받게 되었고, 마음에 상처가 쌓이고 쌓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유일하게 소통하는 외부인 피아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에스티!

그렇게 자신의 조상을 학살했던 나라, 그리고, 자유의 나라 독일 베를린을 향해 탈출한다.

그녀가 사라지자, 당연히 그녀의 남편 모이셰와 시댁은 발칵 뒤집히고,

특히나 에스티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댁은 모이셰와 사촌 형 얀키를 베를린으로 보내 그녀를 무조건 데려오라고 한다.


한편, 베를린에 도착한 에스티는 우연히 음악원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하나씩 하나씩 숨겨왔던 열정을 드러내며 도전을 시작한다. 그리고, 베를린에 살고 있는 그립던 엄마도 마주친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다 쉽지 않다. 부딪히고, 좌절하고, 흔들리는 삶.

에스티의 베를린은 힘들다.

그래도, 울고, 웃고, 꿈꿀 수 있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원작은 데보라 펠드만의 자전적 회고록 <Unorthodox>이다.

제목처럼 주인공 에스티의 여정은, 유대인 공동체 입장에선 다분히 이단적이다.

21세기에 가능할 수 있을까 싶은 상황이 벌어지는 하시디즘 공동체의 입장에선, 그 무엇이든 이단이고 위협이지 않을까.

그곳에서 여성은 교육을 받지 않으며, 남성은 율법만을 배운다.

결혼을 한 여성은 머리카락을 남편 외의 다른 남자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삭발을 하고 가발을 쓴다.

아이는 무조건 많이 낳아야 하는데, 극 중에 나오는 대사에 의하면 홀로코스트에서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 수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단지 '문화'라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지독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러한 철저한 율법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부모님을 수용소에서 잃었고, 그 트라우마는 후손에게 이어지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도 전해진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도 달라졌을 텐데, 19살 소녀에겐 트라우마도 율법도 모든 게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참을 수 없는 건

그녀의 삶이 율법과 규정이란 이름 아래 시댁으로부터 착취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하시디즘 공동체는 독일인을 악마라 여긴다고 한다.

그런데, 에스티가 처음 베를린에 도착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다정한 독일인이다.

자유롭게 커피를 주문하고, 또래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얘기를 한 에스티는 가발을 비롯해 자신을 숨 막히게 조이고 있던 것들을 벗어버리고 호수에 몸을 담근다.

이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세례가 생각나는데,

세례는 단순히 한 종교의 일원이 되는 것을 넘어, 이전의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걸 의미한다.

가톨릭에서 세례성사를 받을 때 요즘은 머리에 물을 붓지만, 초기 교회 시대 1~3세기에는 온몸을 물에 담그는 침수세례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세례 받는 장소도 흐르는 물이 있는 강가나 샘, 바다였다.

이스라엘에 있는 요르단강 세례터에 가면 세례 갱신식을 하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강물에 몸을 푹 담그는 이들도 있다.

그건 어쩌면 내 마음을 재정비하는 하나의 의식.


에스티 역시 세례를 받듯이 호수에 들어가 몸을 풍덩 담갔다가 나온 후 새롭게 출발해 보는데,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다.

뉴욕에선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풍족했지만, 베를린에선 당장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자유가 생긴만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한껏 꾸미며 빨간 립스틱도 바를 수 있고, 조금 자라 숏컷이 된 헤어스타일은 베를린에서 힙하게 보인다.

이제 에스티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되든 안되든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에스티를 통해 삶을 돌아본다.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꿈꾸고, 커다란 집에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무리 100평에 살아도 마음속 헛헛한 부분이 있어 밤마다 눈물 흘린다면 무슨 소용일까.

지향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지향, 바람, 소망에 대한 내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바라보는 노력도 중요할 것이다.

에스티는 자신이 살던 곳에선 여성은 감히 할 수 없었던 '교육'도 받고, '사랑'의 감정도 느껴보고, '엄마'의 삶도 이해해 보려 한다.

그건 바로, 내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차근차근 실행해 보는 움직임이다.

그런 에스티에게 남편 모이셰가 기어코 찾아와 '니가 베를린에서 혼자 잘 살 수 있겠냐'라고 한다.

잘 사는지 못 사는지 그 기준이 뭘까?

태생부터 신념이 다른 남편 모이셰는 에스티의 탈출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단한 학자가 하는 말,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 유명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스스로의 마음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뭘 좋아하고, 뭘 원하고, 무엇에 화가 나고, 무엇 때문에 힘든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솔직함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걸 억누르는 상처부터 치료하고,

조심조심 다독이며 실행해보자.

팬데믹으로 인해 무엇이든 실천하기가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는 지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서는 에스티를 보며,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을 보살피고 있는지 점검하게 된다.

 

에스티 역할을 연기한 배우는 쉬라 하스(Shira Haas), 1995년생이며 이스라엘의 여배우이다.

표정이 살아 숨 쉬는 그녀의 연기 덕에 드라마는 더욱 생생했다.


예전에 영화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미 몇몇 나라에서는 정신과 상담할 때 '영화 혹은 콘텐츠를 통한 치료'가 통용된다고 한다. 어떤 어떤 상처를 받아서 어떤 증상을 보이는 사람에게, 의사는 '몇 시에 어떤 작품을 어떤 환경에서 보세요'라고 약을 주듯이 처방을 내려주는 거라는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이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 내는 모두에게 약 처방처럼 전하고 싶은 작품이다.

4부작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기가 생기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오늘도 노력하는 모두에게 응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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