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 빈대가 출몰한다는 기사를 보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2023년 우리나라에 가능한 일인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나고 자랐을 때는 이미 빈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지 한참 뒤로, 나는 빈대를 본적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익숙하기도 했다. 비난의 표현으로써의 ‘빈대’는 익숙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곳을 침범한 불청객인 것으로도 모자라 피를 빨아먹고, 상처까지 내는 빈대는 누가 봐도 해충 아닌가. 그러니 사람에게 ‘저런 빈대 같은 놈!’이라고 하는 건 생각보다 큰 비난일 것이다.
지긋지긋한 해충 빈대는 모기처럼 사람의 피를 빨아먹지만 훨씬 위험한 놈이다. 빈대에 물리면 모기에 물리는 것보다 부어오르는 면적도 넓고, 운이 나쁘면 고열에까지 시달릴 수도 있다. 번식력도 강하다. 그래서일까. 빈대 붙다는 말은 있어도 모기 붙는다는 말은 없고,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은 있어도 모기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은 없다. 그러니까 빈대는, 진짜로 지독한 해충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에게 ‘빈대’라고 칭하는 건 정말이지 모멸감이 들 수 있는 표현이다.
물론 요즘엔 사람보고 ‘저런 빈대 같은…‘이란 말은 잘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멋 모르는 초등학생들은 많이 썼다. 특히 주공 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어른들의 안 좋은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 했던 것이었다. ’ 내 세금으로 먹여 살리는 저런 빈대 같은 사람들‘이란 이기적이고 다소 천박한 인식을 아이들이 뜻도 모르고 쓴 것이다. 그러니까, 돈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는 어릴 적부터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빈대를 보고 듣고 자란 아이들은, 반 빈대주의를 좇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결국 내가 너보다 많이 가졌으니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너는 내게 무시당해도 괜찮다는 ‘반 빈대주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참으로 많은 비극을 초래했다. 갑질은 대표적인 예시다. 교사를 향한 학부모의 갑질, 서비스직을 향한 고객의 갑질, 하급자를 향한 상급자의 갑질까지. 공동체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헌법 제1의 정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 계급과 그로 인한 갈라 치기가 만연한 것이 2023년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사라진 ’ 정‘을 비정함이 가득 채운, 그런 나날들의 연속이다.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려보자. 평등함이 왜곡된 사회는 결국 손 쓸 수 없이 망가져버리고 만다.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과 가치가 ‘우등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그 사회는 이미 병든 곳이다. 설국열차가 크게 흥행한 이유는 단지 영화의 짜임새가 좋고 유명한 스타가 출연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급 음식을 먹는 사람만이 고결하고, 곤충으로 만든 단백질바를 공급받는 사람은 발에 치여도 된다는 사회의 조용한 공감대가 어딘가 불편하고 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덜 가지고, 덜 벌고, 덜 똑똑한 사람들이 잘난 사람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은 오만한 착각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