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쳐와 망태 할아버지
말 안 듣는 너를 잡아갈 테다
내 인생 최초의 크리쳐는 무엇이었나.
아, 다들 망태 할아버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두려워했던 미지의 존재였다.
나의 어릴 적을 떠올려보면, 그러니까 2000년대에서 2010년대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키워드는 ‘공포’였다. 망태 할아버지부터 빨간 마스크로 이어지는 크리쳐의 역사는 어린이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기에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망태 할아버지는 늦은 밤 잠에 들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놀기 위해 꾀를 부리는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에, 빨간 마스크는 천방지축 초등학생들의 생활 태도를 교정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크리쳐를 들먹이며 아이들을 겁주는 행태는 지극히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괴롭힌 것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경우 크리쳐는 말 안 듣는 어린이를 응징하기 위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위협적은 행동을 하지 않던가. 고작 10살 남짓 아동들에게 부모님 말을 듣지 않으면 성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느니, 입이 찢어진 광인이 너의 입도 찢어버린다느니… 참으로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에야 넷플릭스의 드라마 <스위트 홈>, <경성 크리쳐>에서 다뤄지는 것처럼 인간이 마침내 이겨낼 수 있는, 이로써 강한 인간상을 구축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 크리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크리쳐는 절대적 공포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물론 어린이 한정). 그런데 여기서 또 언짢은 부분이 발생한다.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 가운데서도 약자다. 스스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든 법은 아동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판단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법리의 근거다. 그럴수록 성인이 아동을 보듬어줘야 하는데 자기들 편하자고 겁을 준다니. 일종의 성인 실격이다. 물론 아동 관련 학문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을 다루기 어렵다는 데는 십분 동의한다. 정말로. 하지만 조금 더 바람직한 방법은 없었을까?
왜 어린이들에게 겁을 주는가. 이 질문을 확장시켜 보면 결국 역사의 ‘공포정치’와도 궤를 함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상위 포식자가 먹이사슬의 아래에 있는 존재를 통제하기 위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위협 행위. 범고래는 물개를 사냥하기 전에 이리저리 가지고 놀며 겁을 준다고 한다. 무력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그러니 결국 겁을 주는 행위는 가장 원초적 자연의 행위. 비인간성의 극치다.
아니 그런데, 이 글을 여기까지 읽다 보면 누군가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고작 망태 할아버지와 빨간 마스크에 이렇게 열을 올린다고?’ 맞다. 사실 나는 망태 할아버지는 키오스크 앞에서 허둥댈지도 모르며, 빨간 마스크는 코로나19를 거치며 마스크 군단에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어른이다. 그럼에도 이런 투정 같은 화를 낸 것은, 오늘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어린아이가 눈길에 미끄러진 걸 봤기 때문이다.
한참을 버둥대다 겨우 일어서던 그 아이. 그제야 ‘손이라도 잡아줄 걸’이라는 후회가 밀려들며, 아이들은 참 약하고 바스러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러다 보니 ‘저런 아이들에게 겁을 줬다고? “라는 생각까지 닿은 것이다. 물론 그들도 자라면서 고어 영화 <미드소마>나 아리애스터 감독의 <유전>을 즐겨보는 담력을 지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 근원적 공포감은 마음속 한 구석,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
자그마한 초등학교의 책걸상에도 다리를 달랑거리며 앉아야 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놀이기구가 정글짐에 불과할 그들에게 구태여 또 다른 압도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상은 점점 더 삭막해지고 있는데 말이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려움’보다는, 두려움을 이겨낸 혹은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어릴 적의 기억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망태 할아버지가 널 잡아갈 거야’ 보다 ‘내일은 더 재밌는 날이 기다릴 거야, 잠에 들자’는 말이 더 사실적이고 따뜻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