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특성상 해외에서 자주 근무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남미 파라과이에서 근무하고 있다.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은 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도시이다. 마치 정글 속에 도시가 있는 듯하다. 저녁 무렵 노을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이 빚어내는 오묘한 색깔에 황홀하기까지 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이 도시는 더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파라과이는 1인당 GDP가 6천불 정도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 보니 어린 나이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많다. 아이들은 주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위에서 돈벌이를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미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다. 도로 위에는 축구공으로 간단한 재주를 보여주고 운전자에게 적선을 부탁하는 아이들이 많다. 10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지친 표정으로 재주 부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한 없이 슬퍼진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들 하지만 이 아이들의 모진 고생 끝에는 과연 낙이 있기나 한 건가. 동전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가 복잡해진다.
- 암흑 속의 아이, 코제트
< 에밀 바야르 - 코제트 >
불행한 아이들을 그린 미술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에밀 바야르(Emile Bayard)의 ‘코제트(Cosette)’일 것이다. 이 그림은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미제라블’을 위해 그려진 삽화이다. 자기 몸보다 큰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는 코제트의 모습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포스터에 등장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그림 속 사물들은 코제트에 비해 유달리 커 보인다. 빗자루는 중세기사의 거대한 창처럼 육중해 보이고 한쪽 구석의 물통은 크로스 핏 선수가 케틀벨 대신 사용해도 될 만큼 크고 무거워 보인다. 계단도 단차가 너무 높아 잘 못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것 같다. 이렇듯 사물을 크게 그려 넣은 것은 상대적으로 코제트를 작고 가냘프게 묘사하기 위한 트릭일 것이다.
하지만 코제트를 가여워 보이게 만드는 것은 역시 코제트 자신의 모습이다. 닳을 대로 닳아버린 옷을 걸치고 맨발로 빗자루 질을 하고 있는 모습은 동정심을 자아낸다. 이 아이가 걸치고 있는 옷 보다 더욱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다.두려움과 슬픔에 젖어있는 눈동자이다.살짝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눈빛. 사악한 여관주인, 테나르디에가 다가오는 것일까. 머리가 흩날리는 것으로 보아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의 창’이라는 눈동자를 그려내는 것은 모든 미술가들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 준다. 더구나 이 그림은 – 감정 표현에 크게 기여하는 - 색채마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제트의 눈은 진한 애처로움을 전달해 준다. 얼굴 아래위를 가리고 눈만 집중해서 보시기 바란다. 이 아이의 눈동자가 더욱 슬프게 다가올 것이고 그런 만큼 에밀 바야르의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 런던 퀸즈 시어터의 뮤지컬 레미제라블 광고판 >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걸작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레미제라블은 과거 한국에서는 장발장으로 소개되었고 레미제라블의 뜻은 ‘불행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위고가 쓴 소설의 서문에서는 이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준다.
< 무산 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중략) ...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 (민음사 레미제라블 1권) >
무산 계급에 의해 추락한 남성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오랜 감옥생활을 한 ‘장발장’을 말한다. 기아에 의해 타락한 여성은 가난한 여공으로 일하다 끝내 창녀가 되어버린 ‘팡틴’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암흑에 의해 위축된 아이가 바로 그림 속 주인공, 코제트이다.팡틴의 딸로 태어나 사악한 여관집에서 모진 고생을 하게 되지만 장발장에 의해 구원받는다.
이 삽화를 그린에밀 바야르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로 특히 소설 삽화로 유명하다.현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는 코제트를 그린 이 그림만 유명하여 마치 히트곡이 하나밖에 없는 ‘원 히트 원더’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밀 바야르는 레미제라블을 비롯하여 쥘 베른의 '달세계 여행' , 셰익스피어의 '당신이 좋으실 대로' 등 다양한 문학작품에 예술성을 더 해 준 훌륭한 일러스트레이터다. 19세기에는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소설이 널리 보급되면서 삽화가의 활약이 활발하던 시대이다. 혹 에밀 바야르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작품도 찾아보시기 바란다. 단테의 신곡이나 돈키호테의 일러스트는 감탄을 자아낸다.
- 모든 만남에는 직감이 있다
< 장 조프로이 - 장발장과 코제트 >
코제트를 그린 작품을 하나 더 보자. 에밀 바야르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장조프로이(Henri-Jules-Jean Geoffroy)의 작품, ‘장발장과 코제트(Jean Valjean et Cosette)’이다. 추운 겨울날, 한 밤 중에 숲에서 물을 길어오던 코제트를 장발장이 나타나 도와주는 장면이다. 아무 설명 없이 이 그림을 보면 조금 무섭게 느껴진다. 어두운 숲 속을 걸어가는 소녀 앞에 불쑥 거한이 나타나다니. 하지만 소설을 읽고서 그림을 보면 달리 보인다. 레미제라블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그는 그녀의 뒤에서 온 사나이였으나 그녀는 그 사람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사나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들고 있던 물통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던 것이다. 인생의 모든 만남에는 직감이 있다. 어린아이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음사 레미제라블 2권) >
그림 속 코제트는 놀란 것이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소녀는 무서워 보이는 이 아저씨의 도움으로 자기 인생이 완전히 변하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흔히 인생을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장발장이 무거운 물통을 들어주는 이 장면은 아이에게 버겁기 그지없었던 인생의 짐을 대신 짊어진다는 은유이다. 장 조프로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고 이 그림 속 코제트에게서 그의 장기를 엿볼 수 있다.
- 세비야의 외로운 아이
< 무릴요 - 벼룩을 잡고 있는 아이 >
장르화라는 장르가 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말장난처럼 들린다. 장르라는 단어는 어떤 유형(type)을 뜻하는 것인데 그냥 장르화라고만 하면 도대체 무슨 장르를 가리키는 것인지. 서양 미술에서 장르화는 민속화라고 이해하면 된다. 고전회화의 전통적 유형인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 초상화 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장르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전하였다. 종교혁명으로 신교를 받아들인 데다가 일찍부터 부르주아 개층이 발달했던 네덜란드는 성당이나 왕궁을 장식하는 거대하고 거창한 작품보다 자기 집에 걸어놓고 감상할 수 있는 소품을 좋아했다. 그런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정물화, 풍경화, 장르화(민속화)이다.
앞서 말했듯 장르화는 네덜란드 화가의 장기이지만 스페인 화가가 그린 유명한 장르화도 있다. 스페인 바로크의 대표 화가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 무릴요(Bartolome Murillo)의 작품이다. 무릴요의 장르화는 고국 스페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독일이나 프랑스에 흩어져 있다. 그중 루브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벼룩을 잡고 있는 아이’를 보자.
자기 집인지 아니면 버려진 집인지 모르겠지만 한 아이가 앉아서 벼룩을 잡고 있다. 옷은 너덜 해졌고 신발도 없다. 발치에는 물동이와 과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먹을 것은 구해놓은 것 같다. 사실 ‘다행히’라는 표현은 썩 적절치 않다. 끼니를 물과 과일로 해결해야 한다면 현대인에게는 다이어트 식단이겠지만 당시의 아이들에게는 처절한 생존활동일 것이다. 이 그림 속 아이는 외로워 보인다.그렇다고 고독하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고독이 바로 외로운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같은 뜻을 가진 단어끼리도 뉘앙스는 다르다. 이 그림 속 아이에게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주는 약간의 낭만적인 느낌도 없다.
왼쪽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빛이 고루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어 얼핏 렘브란트나 카라바조의 작품을 떠올릴 수 있으나 이 그림 속의 빛은 달리 보인다. 즉 무릴요 그림 속의 빛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아이에게 내려앉은 빛은 구원처럼 느껴진다. 외롭고 가난한 아이에게 손을 뻗은 신의 또 다른 모습.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니 외로워하지 마라. 만약 이 그림에 창문이 없고 어둑어둑하다면 그림 속 아이의 모습은 외로움을 넘어 절망적으로 보일 것이다. 무릴요의 그림은 불행한 아이의 모습을 과장 없이 그리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남겨 두었다.
< 무릴요 - 주사위 놀이를 하는 아이들 >
무릴요의 장르화는 후반기로 갈수록 분위기가 밝아진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가 소장하고 있는 ‘주사위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란 그림을 보면 그러한 변화를 확연히 감지할 수 있다.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즐거워 보인다. 무릴요가 어떤 생각, 어떤 감정을 가지고 이 작품들을 그렸는지 섣불리 말할 순 없다. 17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화가 자신이 그리고 싶은 주제를 선택했다기보다 주문자가 요청한 대로 주제를 그려냈을 것이다. 스페인이 무릴요의 작품을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지만 장르화는 주로 외국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즉 스페인 왕실과 교회는 *그랜드 매너를 선호했던 것에 비해 스페인을 벗어난 외국에는 장르화를 좋아하는 손님들이 있었던 것이다. * 고상하고 화려한 양식
따라서 무릴요가 벼룩을 잡고 있는 아이를 그렸을 때 그 아이에게 동정심을 가졌을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가난한 아이들에게서도 희망적인 모습을 보려고 한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무릴요의 성장과정과 인품에 대해 남겨진 기록이 있으니 그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무릴요는 신앙심이 깊었고 자선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교회나 자선시설을 위해서는 대가를 받지 않고 작품을 기증하였다. 더구나 무릴요는 아홉 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로 자라났다. 거리의 아이들을 보면 자신의 불행했던 경험이 겹쳐 보였을 것이다. 무릴요의 풍속화에서 따뜻함 혹은 가난하지만 꿋꿋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성품 때문일 것이다.
- 이웃의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80년대 후반에 인기를 누렸던 수잔 베가(Suzanne Vega)라는 가수가 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뉴욕으로 이사했다. ‘뉴욕 출신의 지적인 포크 가수’라는 이미지가 그녀의 매력 포인트이다. 수잔 베가의 히트곡 중에 ‘루카(Luca)’라는 곡이 있다. 그녀가 살고 있던 아파트 앞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놀곤 했는데 그중 한 명이 왠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루카였다. 수잔 베가는 루카를 아동학대의 피해자라고 상상하며 노래를 만들었다. 실지로 그 아이가 학대를 당했는지는 모른다.
노래는 밝은 분위기이지만 가사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루카라는 아이가 독백 형식으로 가사를 이끌어간다. ‘나는 당신 바로 위층에 살고 있어요, 뭔가 싸움 소리가 들리더라도 뭐냐고 묻지 마세요, 만약 당신이 물으면 문에 부딪혔다고 얘기할 거예요.’ 우리 개개인이 다양한 아동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능력은 없다. 하지만 미약해 보일지 모르는 개인의 힘도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분명 변화가 찾아온다.지금도 여전히 불행한 아이들이 많지만 무릴요나 위고가 활동하던 시기보다 상황이 더 좋아진 것은 사실이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손길을 내밀어줬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코제트나 루카 같은 아이들은 없는지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둘러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