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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재 Aug 13. 2023

파라과이 동네서점, El Literato

  - 새로운 동네에서 새로운 서점을 찾아 -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도 8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다. 새로운 부임지에서 가장 먼저 필요했던 장소는 당연 집이다. 집을 구한 이후로는 ‘서점’과 ‘카페’를 찾아 나섰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한다. 자연스레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서점과 책을 읽기 위한 카페가 목말랐다.  

   

먼저 회사 근처의 쇼핑몰로 향했다. 쇼핑몰 안에는 서점이 무려(!) 두 개나 있었다. 종이책의 소멸을 우려하기 시작한 지도 족히 20년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지척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서점이 운영 중이라니. 규모는 자그마하지만 여러 가지 책을 잘 갖춰둔 편이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쇼핑몰 내부에 있다는 사실이 편견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무미건조해 보였다.     


산책도 할 겸 쇼핑몰을 나와 뒷골목을 걷기로 했다. 야외 주차장을 건너 산책을 시작하려는 순간. 서점인 듯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가 보았다. 예감이 적중했다. ‘El Literato(엘 리테라토)’라는 서점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Literato는 ‘문학에 조예가 깊은, ‘문학가’라는 뜻이다. 출입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종이책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입구에서부터 종이책의 아날로그 감성이 전해졌다.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샐러리맨으로서 반가운 시간대이다. 휴일 아침에도, 평일 퇴근 후에도 방문할 수 있다는 애기이니까.     


 < 'El Literato' 의 나무문 >


- 주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아순시온 동네서점 -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리 넓지않은 공간에 빼곡히 책이 들어차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책장이 있는 가 하바닥에서부터 다소 어수선하게 쌓아 올린 책들도 있었다. 아마 입고된 책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이리라. 찬찬히 책을 둘러보았다. 한국에는 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동네서점’이 소소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El Literato 역시 주인의 취향이 드러난 동네서점이다.


<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 >

펭귄 클래식부터 최근 베스트셀러까지. 가게 이름답게 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역사 소설 코너를 살펴봤다. 켄 폴릿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켄 폴릿은 영국 작가이다. 스릴러와 역사 소설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페인에서 근무하는 동안 켄 폴릿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켄 폴릿의 소설은 동네 슈퍼마켓 가판대에도 꽂혀 있었다. 비토리아라는 도시에는 켄 폴릿 동상도 있다.


< 켄 폴릿의 소설들, 남미에서도 인기가 있는 것 같다. >

역사 소설 맞은편 선반에는 찰스 슐츠의 불후의 명작, ‘피넛’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에는 '스누피'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작품이다. 스페인어 판에는 ‘스누피와 카를리토스(찰리의 스페인어식 이름)’라고 적혀 있었다. 피넛의 북 디자인을 보니 던킨 도나츠(?)가 먹고 싶어졌다. 미국의 팝 컬처는 선명한 원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피넛이나 던킨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Made in USA’ 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 '피넛' 스페인어판. 던킨 도너츠처럼 알록달록하다. >
< 파라과이에는 던킨이 없어 아쉽다 >

찬찬히 둘러보다 ‘열두 명의 황제’라는 책을 발견했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이라는 책이 있다. 로마 제정 초기, ‘카이사르 + 11명의 황제’의 일생을 다룬 책이다. 로마 역사에 관심이 많아 책장에서 꺼내 읽어보았다. 저자 이름이 수에토니우스가 아니었다. 영국 출신의 로마사 전문가, 매리 버드의 작품이었다.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시대의 정치권력을 풍부한 도판과 함께 설명하고 있었다. 예술과 역사. 취향 저격인 데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레어템이기도 하다. 보물을 발견한 듯했다. 기쁜 마음으로 구입하고 서점을 나섰다.


< '열두 명의 황제', 귀한 책 득템 >

     



- 책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    


< 책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

가게 앞 유리창 안에는 스누피 장식물이 있었다. 서점 주인이 피넛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유리창 윗 줄에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이야기가 된다.”문학 팬이라면 설래일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그 아래 이어지는 문장이 너무 매혹적이라 마거릿 애트우드의 문장을 깊이 곱씹어 볼 수 없었다.


아래에는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문장이 이어진다. “당신이 읽고 있는 모든 책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그 책을 써 내려간 작가의 영혼, 그리고 그 책을 읽었고 그 책의 스토리를 경험했고 그 책과 함께 꿈꿨던 독자들의 영혼이.”


책에 작가의 영혼이 담겨있다는 생각은 누구라도 떠올려 봤으리라. 하지만 독자의 영혼이 담겨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렇다. 사폰이 말한 대로이다. 책에는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의 영혼이 켜켜이 쌓여 있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혼과 영혼을 연결시켜 준다. 그것은 SNS나 메타버스 같이 IT 기술이 제공하는 연결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미 그 책을 읽었던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분노한다는 뜻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미래의 독자는 그 책을 먼저 읽었던 나의 영혼을 느끼게 될 것이다.


평소 아무 곳에나 ‘영혼’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사폰의 문장에서는 실로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울적해질 때면 El Literato를 찾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책구경도 하고 좋은 책이 있으면 구입하고 사폰의 문장도 다시 음미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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