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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재 Oct 08. 2023

찻잔의 즐거움

- 상파울루에서 만난 커피


현재 근무 중인 파라과이는 남반구에 위치한 국가라 9월에 봄이 시작된다. 한국에 비하면 따뜻하다 못해 종종 덥기까지 한 겨울을 보냈지만 어쨌든 9월의 봄기운은 여행을 부추겼다. 간단하게 짐을 꾸려 브라질 상파울루로 떠났다. 파라과이 인들에게 브라질은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이다.

     

상파울루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는 파울리스타 대로이다. 이 일대의 화려함과 번잡함은 강남 못 지 않다. 여행 첫 일정으로 파울리스타 대로에 있는 일본 문화원을 찾았다. 여러 흥미로운 전시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문화원 내에는 ‘아이조메’라고 하는 카페가 있다. 아이조메는 ‘쪽 염색’이라는 뜻이다. 카페는 별도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전 석 카운터 석으로 이루어진 이 카페는 전시장과 서가, 즉 예술과 책 사이에 스윽 스며들어 있다. 카페 이름처럼.


< 카페 아이조메 >


전시를 둘러본 후 바리스타 앞에 앉았다. 플랫 화이트 한 잔과 브라우니 하나를 주문했다. 잠시 후 받아 본 커피와 디저트 케이크는 일본 전통 찻집의 맛차와 화과자(일본 전통과자)를 떠올리게 했다. 커피나 차에 달콤한 간식을 곁들이는 것은 세계 어디를 가나 보편적인 메뉴인데 특별히 맛차와 화과자를 떠올린 이유는 뭘까. 일단 이 카페가 일본 문화원 내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찻잔에 있었다. 손잡이가 없고 민무늬에다가 푸른빛을 띠고 있는 찻잔. 이 찻잔은 일본식 다완인 것이다. 유럽인이 즐기던 음료를 동양식 그릇에 담아낸 미묘한 조화가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 아오조메의 커피 셋트와 일본 전통 찻집의 맛차 세트 >



    

- 동양 찻잔, 유럽 찻잔, 미국 텀블러

    

앞서 동양 찻잔에는 손잡이가 없다고 했다. 반면 유럽의 찻잔은 손잡이가 있다. ‘아름다운 서양 식기의 세계(카노 아미코, 겐바 에미코)’라는 책을 보면 ‘양식기의 세계’라는 칼럼을 인용하여 나름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칼럼은 일본 찻잔과 유럽 찻잔을 비교한 것이지만 일본의 다도라는 것이 중국과 한국 같은 동북아 국가의 문화와 공유하는 면이 있기에 동양 찻잔과 유럽 찻잔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일본인(동양인)은 식기를 신체의 연장으로 생각하여 직접 찻잔을 잡지만 유럽인은 식기를 도구로 생각하여 – 손잡이를 통해 - 간접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손으로 만졌을 때 뜨겁지 않게 하기 위해 손잡이로 들어 올리는 것이 낫다. 하지만 일본인(동양인)은 자연을 담고 있는 찻잔을 직접 접촉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설명에 100%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민한 시선’이다. 자그마한 차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여 깊게 음미해 보는 태도는 지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자신의 한계를 넓혀준다.


< 손잡이가 없고 소박한 동양 찻잔, 손잡이가 있고 화려한 서양 찻잔 >


동양식 찻잔과 유럽식 찻잔은 손잡이 유무 외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동양의 찻잔은 무늬가 없거나 단순하다. 반면에 유럽 찻잔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디자인 차이는 두 문화의 미의식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동양의 미의식에는 소위 ‘여백의 미’가 있다. 빈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인데 일본 다도에서 말하는 ‘와비차 개념에도 단순함 혹은 부족함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에 반해 서양에는 ‘호러 바쿠이(Horror Vacui)’라는 의식이 있다. 비어 있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그래서 서양 미술은 동양 미술에 비해 화려하고 복잡하게 치장된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러한 의식 차이는 차(커피)를 마시는 목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양은 비워내기 위해 차를 마시는 반면 서양은 - 에너지나 영감을 - 채우기 위해 차를 마시는 듯 보인다. 이러한 짐작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예술이든 비워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다.


< 스타벅스의 1회용 텀블러 >


사실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찻잔은 유럽식도 동양식도 아니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은 미국식 텀블러 혹은 머그컵이다. 스타벅스가 일으킨 두 번째 물결(소위 커피산업의 세컨드 웨이브)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컵은 일단 크다. 뭐든지 사이즈가 큰 미국 답다. 한국인에게 커피의 디폴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게는 큰 컵이 제격이다. 스타벅스는 전 세계에 진출해 있지만 유독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이나 일본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카페도 많다.

 

< 선토리 커피보스의 '보스프레소' >


사족 같지만 재미있는 찻잔(?)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위스키로 유명한 산토리는 캔 커피로도 유명하다. 산토리의 커피 브랜드는 ‘Coffee Boss’이다. Coffee Boss의 다양한 캔 디자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BOSSPRESSO’ 디자인이다. 커피 캔에다 손잡이를 부착한 것이다! 자사 브랜드인 ‘Coffee Boss’에 ‘Espresso’를 결합한 작명 센스에 디자인 콘셉트가 녹아들어 있다. 즉 캔에 에스프레소 잔을 더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작은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이 있어야 이런 재치 있는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다. 이 디자인은 2017년에 독일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다.



 

- 찻잔이 주는 즐거움     


조메에서의 시간은 평화로웠다. 양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조금씩 커피를 음미했다. 뜨거운 커피가 담긴 다완은 한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기에 자연스레 양손을 사용하게 된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찻잔을 쥐고 있는 모습은 예의와 몸가짐을 중시하는 동양 문화에도 잘 어울린다. 손끝과 입속을 통해 퍼지는 온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줬다. 사무실에서 늘 꿈꿔오던 휴가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몰디브에서의 모히토 한 잔 보다는 대 도시에서의 커피 한 . 나에게 평화는 자연 속 고요함이 아니라 도심 속 낭만이다. 동양식 찻잔에 담긴 커피 한 잔은 낭만 그 자체였다.     


커피는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음료이다. 그냥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음료 중에 기호를 넘어 열광을 이끌어내는 상품이 있다면 그건 와인과 커피일 것이다. 커피가 주는 기쁨이라고 하면 먼저 후각과 미각을 떠올리게 된다. 주말 늦잠의 유혹도 물리치는 모닝커피 향과 입 속에 퍼지는 복잡 미묘한 맛은 얼마나 매혹적인 . 상파울루에서 만난 찻잔은 커피가 주는 또 다른 기쁨, 즉 시각과 촉각에 대해 일깨워줬다. 다양한 디자인의 찻잔이 심미적으로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그리고 찻잔이 전해주는 온기는 얼마나 따스한 것인지 말이다.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전해주는 냉기도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커피는 찻잔을 만나 감각이자 위안이자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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