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눈을 보면 일본 만화 속 여주인공들이 떠오른다. 커다란 눈동자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고양이는 신체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두드러지게 큰 동물이다. 얼핏 개나 고양이는 커다란 눈동자 덕에 사람이 가장 귀여워하는 반려동물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확실히 사람은 큰 눈에 약하다. 그렇다고 작은 눈을 가진 분들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중 한 명인 손석구 배우는 작은 눈이 매력적이다. 가수 비의 가느다란 눈웃음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설레게 했는지도 말할 필요 없을 것이고.
< 고양이의 눈을 빼 닮은 '라무'의 커다란 눈동자 >
일본 만화가 중 커다란 눈망울을 가장 잘 그려내는 사람은 다카하시 루미코다. 한국에서는 란마1/2과 이누야샤로 유명하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시끌별 녀석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시끌별 녀석들의 히로인 ‘라무’는 고양이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만화 속에서 라무는 별 볼 일 없는 남자 주인공 아타루를 일편단심 사랑한다. 현실성이 결여된 이러한 설정이 남자들을 매료시키기도 했지만 고양이 같이 사랑스러운 눈매가 컬트적인 인기요인 중 하나인 것도 사실이다.
< 전 세계를 매료시킨 눈빛 >
고양이의 귀여움은 미국 애니메이터들도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같다. 슈렉 2편에서 그 유명한 눈동자 애교 장면이 나왔을 때, 극장 안에서 터져 나왔던 - 탄식인 지 비명인 지 모를 – 감탄사가 생생히 기억난다. 푸스(애니메이션 속 이름)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 지 ‘장화 신은 고양이’라는 스핀오프까지 나왔다. 하지만 눈동자로 애교를 부리는 장면은 고양이의 생리를 생각할 때 그리 와닿는지는 않는다. 고양이의 동공은 어둠 속에서 혹은 긴장했을 때 커지는 것이지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 확장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도 않고 인간에게 사랑받으려 큰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귀여움을 받는 이유는 맑고 커다란 눈망울 덕분일 것이다.
- 어둠 속의 눈 -
< 좌측. 도로 위의 등대, Cat's Eye / 우측. 어둠 속의 고양이 눈 >
한 밤에 한적한 국도나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짝이는 반사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도로 반사등을 영어로 ‘Cats Eye’라 부른다. 밤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고양이 눈동자를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작명 센스다.
앞서 얘기했듯 고양이는 주변이 어두울 때 눈동자를 확장한다. 덕분에 사람보다 6배나 월등한 시력을 가동시킬 수 있다고 한다. 고양이의 놀라운 능력은 야간시력만이 아니다. 고양이는 조용히 움직일 줄 안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덧 내 옆에 다가와 있는 듀콩이(필자가 키우는 고양이)를 발견할 때마다 흠칫 놀라곤 한다.
< 듀콩아,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 >
야간 시력과 조용한 움직임. 이렇듯 고양이의 신체 능력이 '스텔스'에 최적화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고양이도 나타났다. 바로 ‘도둑고양이’다. 요즘 도시에서는 도둑질하는 고양이를 보기란 쉽진 않다. 하지만 과거에는 꽤나 많았던 것 같다. 김득신의 ‘파적도’에서 우리는 도둑고양이의 면모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 김득신의 파적도 >
어둠 속의눈동자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일본 만화 애기를 하나 더 해보자. 80년대 중후반에 걸쳐 ‘시티헌터’라는 작품으로 커다란 인기를 누린 작가가 있다. 호조 츠카사이다. 그는 며칠 전 타계한 '드래곤볼'의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와 함께 주간 소년점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작가 중 한 명이다. 호조 츠카사가 시티헌터 이전에 그린 작품이 ‘Cat’s Eye’다.
< Cat's Eye 삼자매 >
빼어난 미모로 유명한 세 명의 자매, 히토미, 루이, 아이. 이들에게는 비밀이 있다. 낮에는 ‘Cat’s Eye’라는 카페를 운영하지만 밤에는 (정의의) 괴도로 변신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낮에는 사랑스럽고 밤에는 은밀하다. 고양이 눈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이중성은 만화 속 카페 이름과 여주인공들의활동에 그대로 투영된다. 낮에는 생기발랄한 눈동자로 손님들을 맞이하지만 밤이 되면 어둠 속을 꿰뚫는 눈빛으로 목표물을 향해 더듬어간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고양이를 반기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어둠 속의 눈동자가 가져다주는 섬뜩함일 것이다. 고양이의 사랑스러움도 눈동자로부터, 고양이의 불길함도 눈동자로부터. 고양이의 눈동자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 보고 싶다.
- 추억에 잠긴 눈 -
< 뮤지컬 '캣츠'의 포스터 >
뮤지컬계의 모차르트이자 셰익스피어,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대표작 중에는 ‘캣츠’가 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한국에서도 여러 팀의 공연이 올려졌다. 캣츠의 포스터는 단순하면서도 고양이의 생김새와 뮤지컬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잡아내고 있다. 어둠 속의 커다란 눈동자 속에는 춤추는 고양이(혹은 댄서)들이 실루엣으로 어른거리고 ‘CATS’라는 타이틀은 고양이의 흰 수염처럼 보인다. 이런 포스터야말로 현대 디자인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이다.
캣츠는 엉뚱 발랄한 고양이들의 춤과 노래가 한바탕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쾌활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작품이지만 정작 가장 유명한 노래는 슬프고 애잔한 ‘메모리’이다. 늙고 외로운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주책없이 눈물마저 흘러내리려 한다. 누군가 ‘마지막 잎새’의 늙은 화가가 그랬듯이 시들지 않는 담쟁이덩굴이라도 그려주면 좋을 텐데.
< 메모리를 부르는 그리자벨라 >
고요한 시선으로 지긋이 창 밖을 쳐다보고 있는 고양이는 그리자벨라처럼 옛 추억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고양이가 창 밖을 보는 것은 각종동물과 사물들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그윽한 시선 >
고양이는 조용한 동물이다. 아플 때도 내색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양이의 고요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내면에서 추억의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이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상상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더욱 마음이 애잔해진다.
고양이 눈 속에서 느껴지는 그윽함은 인간의 또 다른 친구인 개와 비교할 때 더욱 두러진다. 개는 짖거나 혀를 내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개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개의 눈동자 속에서 그윽함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윽함은 고요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법이다.
< 일본 이카자키 금박염색 공예품 >
듀콩이는 집고양이라 달을 볼 기회가 없다. 그러고보면 달빛에 젖어 추억에 빠질 수 있는 고양이는 그리자벨라 같은 길고양이일 것이다. 세상의 풍파를 온 몸으로 부대끼는 녀석들 말이다. 고양이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밤이 찾아오면 높다란 나무 가지 위로 올라가 물끄러미 달을 올려다보는 고양이의 눈망울을 떠올려본다. 추억은 이토록 달콤하고도애달픈것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