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와 재건에 대한 이야기 <빛이 이끄는 곳으로>

프로젝트 삼다 - 다독 <백희성, 빛이 이끄는 곳으로>

by 슈뢰딩어의 백수

몇 주 전, 1 회독을 마친 건축가 백희성 작가의 소설 <빛이 이끄는 곳으로>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기억에 의존하여 적는 것이니 틀릴 수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스포일러'라고 생각할 만한 부분까지 언급할 수도 있다.


주인공 뤼미에르는 건축가다. 파리에 산다. 건물을 짓는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집만 지어주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신의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진 돈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일단 부동산에 예산에 맞는 집을 찾아달라 요청을 해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예산에 맞는 집이 매물로 나왔다고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를 받는다. 소설은 이 시점에서 시작됐다.


소설 속 뤼미에르의 예산은 7천만 원이었다. 파리에서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파리의 알짜배기 동네, 시테섬에 그 예산에 맞는 매물이 나왔다는 거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재촉하는 부동산 중개인의 연락을 받고 뤼미에르는 그 집으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머문 것이 얼마나 오래전이었을까. 집은 반쯤 흉가처럼 방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 머무는 것이 고역일 정도로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뤼미에르는 거기서 그 집의 주인 피터 왈처의 대리인을 만난다. 집주인 피터 씨는 노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루체른의 요양 병원에서 요양 중이라고 한다. 피터 씨는 어떤 이유로 뤼미에르를 집을 팔 사람으로 선택을 했고, 그 집을 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루체른의 요양 병원까지 가서 피터 씨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집은 폐가와도 같았지만 뤼미에르는 그 집에서 어떤 매력을 느낀다. 집에는 건축가가 알아차릴 수 있는 '특이한' 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집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번아웃이 와서 한 달의 휴가를 받아두었던 뤼미에르는 당장 루체른의 요양 병원으로 향한다.


보통의 차로는 접근도 어려운 외진 곳에 위치한 요양 병원은 수도원을 개조... 라기보다는 보완해서 만든 건물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수백 년 전의 수도원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진 부분을 유리와 철제로 보완해서 만든 굉장히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에 대한 묘사가 이 소설에서 가장 특별한 부분 중 하나다. 건물에 대한 이해가 높고, 다양한 건축물에 대한 경험이 많은 작가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건물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척추가 되는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읽는 입장에서는 근사하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참을 걸려 루체른의 요양병원까지 갔지만 피터 노인이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어 만날 수가 없었고 대리인으로부터 그의 메시지를 전달받는데, 요는 자신이 내는 숙제 (피터의 아버지가 남긴 건물의 비밀을 밝히는 일)를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피터 왈처의 아버지(프랑수아 왈처)는 건축가였고, 그에게 시테 섬의 그 집과 이 요양병원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함께 남겼다는 거다. 아들이 어렸을 때, 아들을 버리고 집을 떠났던 그는 자신이 남긴 어떤 메시지를 아들 피터 왈처가 풀어주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피터 왈처는 눈이 멀어버렸고, 건축가인 아버지가 건물을 이용해서 만든 그 수수께끼를 풀어줄 다른 건축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그 수수께끼를 풀면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아마도 미안함과 애정에 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여기서 조금 의아했던 것이, 소설 속에서 묘사되어 있는 요양병원 (구 수도원)이 너무도 근사해서 '내가 건축가라면 그 숙제에 도전해보고 싶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는데, 뤼미에르에 앞서 물망에 올랐던 2명의 건축가들은, 둘 다 '자신을 테스트하는 거냐'며 화를 내고 돌아가버렸다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어쩌면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직업이 있는 사람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내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이 있고, 마감이 있고, 기한이 있고, 미팅 약속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나 던지며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숙제를 해달라는데, 당장 자기 앞에 놓인 '생업과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면 거기 눌러앉아서 그 장단에 맞춰줄 여유가 없었을 것도 같았다.


뤼미에르는 마침 번아웃이 와서 한 달짜리 휴가를 얻은 상태였고, 마침 건축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곳에 하루 이틀쯤 더 눌러앉아 있어도 부담이 될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4월 15일'이 가까워 그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1년에 단 하루뿐인 4월 15일 전후로만 보여주는 그 건물의 경이로운 모습들마저 보았으니, 어쩌면 그는 프랑수아 왈쳐 (피터 왈처의 죽은 아버지이자 건축가, 수도원과 시테섬의 집을 보완 수리한 사람)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건물의 안과 밖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아, 자연이 건물 내부에 자연스레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그 수도원 병원에는 갖가지 신기한 장치들이 있어서 바람 소리와 새소리를 건물 안으로 증폭시키기도 하고, 1년 중 하루, 정해진 시간에 창을 통해 드는 빛이 각기 다른 각도로 설치된 거울에 반사되어 공간을 금빛으로 채우기도 한다. 이 건물을 지은 프랑수아 왈처라는 건축가가 얼마나 천재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건축과 물리에 대해 무지하므로) 그는 거대한 수도원 병원 건물을 통째로 하나의 커다란 수수께끼 상자, 또는 방탈출 게임처럼 만들어뒀다.


우연과 호기심, 집념 같은 것들이 더해져 뤼미에르는 마침내 건물의 숨겨진 방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두 권의 일기를 발견한다. 하나는 피터의 아버지, 프랑수아 왈처의 일기였고, 나머지 하나는 아나톨 가르니아라는 뜬금없이 등장한 여자의 일기였다.


앞서 뤼미에르는 건물 밖에서 프랑스아 왈처의 무덤 옆에서 아나톨 가르니아라는 여자의 무덤을 발견했지만, 아나톨 가르니아가 누군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궁금해하던 차였다. 성이 다르니 프랑수아의 부인도 아닐 것이고 그녀에 대한 단서는 없었다.


그들의 일기를 통해서 '4월 15일'의 비밀의 단서가 드러나는데, 4월 15일은 아나톨과 프랑수아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날 프랑수아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서 갖게 된 새 집 (불이 나서 폐허가 된)을 보러 갔다가, 집의 현관 앞에 노숙자처럼 앉아있던 아나톨 가르니아를 만났다. 거적데기를 걸치고 몸이 반쯤 찌그러진 듯 앉아있던 아나톨은 마녀처럼 보이는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큰 화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생전 본 적 없는 경이로운 건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었다면 책을 더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재미는 없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누구 하나 매력적인 사람도 없고, 특히 건물에 매력을 느낀 부분을 '비밀스러운 여인의 유혹'이라고 묘사한 부분에서는 탄식마저 나왔다. 하이 고야.


그런데, 아나톨 가르니아와 프랑수아 왈처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이 소설을 참고 본 보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는 '그래서 뭔데? 뭔데?' 하며 책장을 넘겼다면, 이제부터는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자연스레 책장이 넘어갔다.



아나톨 가르니아는 프랑수아 왈처가 산 집 (이제는 뤼미에르가 사려고 하는 시테 섬의 그 집)의 원래 주인이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상냥했고, 가족과 행복했다. 어느 날 터진 전쟁은 그녀의 남편을 빼앗아갔다. 몇 년의 간절한 기다림 끝에 남편은 돌아왔지만, 몸뚱어리뿐이었다. 남편의 영혼은 전장 어딘가에서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남편이 있었고, 아버지가 있어 희망이 있었다. 아나톨이 집을 비운 어느 날, 아이들과 남편이 있던 집에 불이 났고 전쟁터에서 겪은 일로 불에 트라우마가 생겼던 남편은 아이들도, 스스로도 구하지 못했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든 아나톨은 심한 화상을 입은 채로 모든 것을 잃었다.


죽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녀가 일찍이 온정을 베풀었던 노숙자들이 기어이 그녀를 살려냈댄다. 갈 곳이 어디 있었을까. 막대한 병원비를 대느라 팔아야 했던 그 집, 가족들과의 추억이 있는 그 집. 아나톨은 그 집으로 돌아갔다.


아나톨은 프랑수아에게 가정부로라도 그 집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프랑수아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은 같이 살기 시작한다.


아나톨은 어떤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프랑수아도 똑같이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었겠지? 그러니까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될 수 있었을 거다. 분명 아나톨은 전신에 화상을 입어 한 손은 아예 손가락이 다 들러붙어버렸고, 몸 한쪽이 완전히 굽어 등을 펴고 걸을 수도 없었다. 화상을 입어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봐야 했던 지옥과 가족을 모두 떠나보낸 지옥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나톨에게서 프랑수아는 사랑을 느꼈다. 아나톨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을까. 그 모든 일을 겪고서도 망가지지 않은 아나톨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프랑수아가 아나톨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그 사랑의 흔적이 집에 고스란히 남는다.


등이 굽은 아나톨의 키에 맞춰 계단 난간의 높이를 낮추고, 손가락이 녹아 붙은 손으로도 잘 잡을 수 있도록 난간의 손잡이를 다듬었다. 점점 눈이 멀어가는 아나톨이 넘어지지 않게 벽에 홈을 팠다. 아픈 몸도, 망가진 외모도, 보이지 않는 눈도,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다. 밤마다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일기를 하루씩 거꾸로 써가며 통곡하는 아나톨을 위해서 프랑수아는 집에서 아나톨이 아이들과의 시간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허브가 가득한 정원에서 뛰어놀다 들어와서 품에 안기던 아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정원에 허브를 심고, 현관을 열면 바람이 들어 아나톨이 아이를 품던 그 순간을 다시 느끼게끔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이 양철통을 두드려 아이가 갖고 놀던 실로폰 소리가 나게 했다.


책의 앞부분에서 수도원 병원의 건축이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면, 뒷부분에서 프랑수아가 시테섬의 집에 갖가지 장치로 아나톨의 과거를 재현하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 이상의 벅찬 감정이 느껴졌다. 인간의 마음 따위야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하잘것없다고 여겨왔는데,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공간을, 심지어 그녀의 남편에 대한 추억까지, 재현하는 그 노력은 말도 못 하게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과거의 시간에 사는 아나톨과 그런 그녀를 사랑으로 바라보며 사는 현재의 프랑수아에게 '앞으로'를 만들어주는 사건이 생긴다.


어떤 여자가 갓난아기를 현관에 버려두고 간 것이다.


아나톨과 프랑수아는 그 아이를 거둬 부모로서 아이를 키웠다. 그 이상의 표현은 없다. 아기에게 아나톨은 그저 엄마였고, 프랑수아는 그저 아빠였다. 그 아기가 피터다.


피터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실상은 버려진 자신을 아나톨과 아버지가 자식으로 키웠고, 그러다가 아나톨이 죽었다. 이후 사정이 나아진 생모가 자신을 찾으러 왔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그 사정들을 어찌 설명할 길이 없어 피터와 생모를 두고 자신이 그들을 버리는 양 떠났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아들이 '엄마' 아나톨과의 추억을 기억하길 바랐기에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한 것이었다.


그 뒤로는 그냥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이어진다.


재미있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여운이 남아 눈물도 좀 났다.



입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말들은 다 이해가 되는데, '내 핏줄이 아닌데'라는 말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세상의 그 어떤 가정도 혈연으로 시작된 가정은 없다. 가족이 되는 데에 '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부부가 가장 잘 안다. 아니, 부부가 가장 잘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안다. 아나톨은 아기 피터를 만났을 때에 이미 눈이 완전히 멀었고,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기에 고작 몇 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몇 년을 아나톨은 다시 엄마로 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결코 불행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게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낳지 않은 아이의 엄마가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아나톨의 이야기는 특별해서 마음에 더 남은 것 같다.


시설에 아기들을 보러 다니던 때에, "정말 더 눈에 밟히는 애가 있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있었다. 보자마자 품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은 아기가 있었다. 그래서 정을 닫았다. 당장 데려올 수도 없고, 어차피 다음에 가면 그 아기는 없다. 나는 이제 그 아기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폐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더없이 망가진 것. 추해지고, 기능하지 못하게 된 것.


아들을 생각하며 프랑수아는 무너진 수도원을 다시 지었다. 원형을 살리지 않고, 남겨진 과거의 모습은 그대로, 상처의 흔적도 그대로 남기고, 그 경계를 분명히 남기며 완전히 새로운 소재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시테섬의 집도 그랬다. 불에 타서 망가진 집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았다. 그가 새로 고친 집에는 아나톨의 망가진 몸의 흔적이 남았다. 아나톨의 과거가 더해졌다. 피터와의 미래도 남았다.


아나톨의 몸과 영혼은 더 없는 폐허였다. 불에 타서 죽어가는 자식을 몇 날 며칠을 지켜봐야 했던 어미가 어디까지 무너졌을지 내가 어찌 감히 알겠나. 하지만 4월 15일, 거꾸로 가는 그 일기를 적기 시작한 그날부터 아나톨의 폐허는 재건되기 시작했을 거다. 프랑수아에게 사랑받는 여인으로 살던, 피터의 엄마로 살던 아나톨은 고귀한 여인이었다. 루체른의 수도원 병원이 아름다웠던 만큼, 떠나는 아나톨의 영혼도 그리 아름다웠겠지.


나는 이 책에서 딱 한 단락만을 받아 적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천장의 찢어진 틈을 자세히 보니 유리로 막혀 있지만 투명해서 하늘과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오래전에 항해를 떠난 배의 낡은 갑판 아래,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 같았다. 또한 이 건물의 깨진 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흔적이 되었다. 만약 천장의 찢어진 틈을 감쪽같이 메웠다면 이 집이 겪었던 격동의 과거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건물은 과거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새로운 삶을 부여받아 지금의 병원으로 되살아났다.

- <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


이 책이 나에게 가르쳐준 교훈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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