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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03. 2024

단순한 화려함, 양귀비

양귀비.

화단에서 희한한 봉오리를 발견했다. 할미꽃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데 할미꽃이라기에는 키가 컸고 줄기가 얇았다.

오송송하게 털이 나있는 게 잘 나오도록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며칠 후면 개화를 할 테니 그때 꼭 봐야지, 하면서.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그 꽃이 활짝 피어있는 걸 보게 되었다. 꽃양귀비. 마약성분이 있는 양귀비와 구분하기 위해 개양귀비라고도 한단다. 줄기와 봉오리에 잔털이 있으면 꽃양귀비이고 털이 없으면 마약성분이 있는 양귀비이다. 주로 붉은 꽃이지만 분홍도 있고 흰색도 있고 흰색과 섞인 것도 있다.

얇은 꽃잎 네 장으로 극강의 화려함을 펼쳐내다니 최고의 고수다. 봉오리 때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꽃이 피면서 고개를 빳빳이 드는 게 마치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봉오리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후다. 아직 자신을 드러내기 전의 단아함. 파르라니 떨고 있는 청초함. 그런 데서 황홀함을 느낀다.      

사실은 단순한 선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언제든 양귀비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고른 종이는 한지여서 물감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뭐 할 수 없다. 그걸 감수하기로 마음먹고 이 종이를 선택한 거니까.

가끔 고약스러운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런 거다. 제대로 그리지도 못하면서 굳이 한지에 물감과 오일파스텔을 쓰는 거. 그런 엉뚱한 조합을 사랑한다. 쓸데없는 고집이 나를 더 구석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마음에 든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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