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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11. 2024

너그러운 수레국화

아파트 화단은 누구 것일까? 요즘은 1층을 분양받으면서 아예 화단까지 1층 몫으로 정해놓는 경우가 꽤 있나 본데, 누구든 가꾸는 사람의 것이라는 게 내 의견이다.


우리 옆 동 화단을 요란하게 꾸미는 어르신이 있다. 날이면 날마다 화단에 나무와 꽃들을 심고 가꾼다. 그런데 대부분 어디선가 뽑아온 나무와 꽃이다.

어느 날 그 장면을 목격했다. 등산복 차림의 어르신이 가방에서 뭔가를 조심스레 꺼냈다. 데이지가 아직 피기도 전인데 흙도 없이 뽑혀 와서 그런지 축 늘어져있었다. 미리 연락을 한 듯 또 다른 어르신이 페트병에 물을 담아 들고 나온다. 두 분이 조심스레 화단 한쪽에 데이지를 심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어디선가 뽑아온 꽃을 심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필이면 내가 지나가는 시간대가 겹친 건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렇게 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화단을 가꾸는 건 좋지만 꽃과 나무를 어디선가 뽑아온다는 게 언짢아서 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던 것 같다.

어떤 것은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어떤 것은 다행히 자리를 잡더니, 듬성듬성 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꽃을 피웠다. 데이지와 금계국, 수레국화 등 오며 가며 눈호강이 되었다. 처음 수레국화를 보았을 때는 종이로 만든 꽃인 줄 알았다. 빨강도 아니고 노랑도 아니고 파랑 꽃이라니. 자연의 색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하지 않은가. 며칠 동안 고민했다. 어떻게 종이 느낌을 살려서 그릴까. 그러다 아예 종이를 오려 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수레국화 덕분에 어르신에게 언짢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오늘, 한쪽에 심어놓은 방울토마토를 발견했다. ‘공동 방울토마토’. 저것은 또 어디서 얻어온 것일까 순간 생각했지만, 이제야 어르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뿌리내리기. 어쩌면 저 어르신도 누군가에 의해 삶의 터전이 옮겨진 게 아닐까. 흙을 만지고 식물을 만져야 사는 것 같은데 아파트에 옮겨져서 당최 마음 붙일 데가 없는 게 아닐까. 빈 화단을 발견하고 드디어 내 몫의 일이다, 기뻐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위해, 모두를 위해 숨구멍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꽃과 나무를 뽑아오던 행위가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왕이면 꽃씨를 사서 뿌리거나 나무를 사서 심었다면 좋았겠지만, 경제적인 여력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자기 땅에서 가져왔는지 누가 아는가. 왜 나는 미리 판단하고 비난하고 남에 대해 엄격했을까.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마을에서 시를 배울 적 일이다. 주 1회 한 달 하고 말았으니 배웠다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그래도 그때 배운 게 내게는 기본바탕이 되어주었다(배운 게 없으면 없을수록 작은 가르침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매일 시의 소재를 고민하다가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대추를 따가던 노인들에 대해 쓰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외치던 나와 알았다고 답하면서도 연신 나무를 흔들어대고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대추를 줍던 노인들, 하루하루 알이 굵어지는 대추를 보며 차례 때 써야지, 작정했던 마음에 대해서도 썼다. 나는 제법 일상의 한 순간을 잘 포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시가 될 수는 있지만 과장은 곤란하다고, 밴드 붙이면 되는 상처를 피가 뚝뚝 떨어진다고 쓰면 누가 공감하겠냐며 한탄했다.

너무 정곡을 찔려 어쩔 줄 몰랐다. 맞다. 나는 어르신의 ‘노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노욕에 대해 지나치게 무섭도록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나를 포함하여. 어르신의 행동을 좋다고 할수는 없겠으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예단하지는 말자.


별일 없이 사는 것은 철없는 것과 다르다. 도덕과 정의는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과시는 시가 아니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나에게는 너그러운 쫌생이라는 걸 이번에도 딱 들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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