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Jun 15. 2024

숨구멍, 남천나무

매일 걷는 길 한쪽에는 남천나무가 심어져 있다. 가을이면 저기 꽃이 피었나 자꾸 들여다보게 될 정도로 잎이 붉게 물든다. 남천나무를 모르는 사람도 붉은 열매를 보면 아, 하고 아는 척을 하게 될 거다.


오늘 남천나무 꽃을 보았다. 몇 년간 매일 보던 남천나무에 꽃이 피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도 한 달여를 봉오리상태로 있다가 꽃을 피운다. 처음에 하얀 봉오리가 올라온 걸 보고 곧 꽃이 피겠구나 했는데 한동안 그대로이기에 꽃이 아니라 그대로 이파리가 되는 건가 했다. 그런데 드디어 노란 속살을 드러내고 활짝 피어있다. 대추 꽃처럼 눈에 띄지 않는 색도 아니고 흰 꽃이 이렇게 수없이 올라오는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이십 대 때 한 사회운동단체에 간사로 일한 적이 있다. 매거진을 발행하는 게 주 활동이어서 연구자들이 많았다. 여성 관련 글을 쓰는 팀에 끼었는데 그날이 가장 기다려졌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고위인사가 되었지만 그때는 그저 ‘언니들’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 시간이 진짜 재밌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언니는 여고를 다녔는데, 지름길로 가려면 남고 정문을 지나야 했단다. 남학생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빠르게 걸었다. 나름 도도한 여학생이 고개를 숙일 수는 없어 상대의 무릎이 보이는 정도로만 살짝. 그날도 시선을 내리고 총총총 지나가는데 누가 이렇게 수군대더란다. 저 여학생은 맨날 거기만 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들었다. 그게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인지조차 정확히 몰랐으니까. 어느 순간 그 말뜻을 알아듣고 기함을 했다. 너무 기가 막혀 다시는 지름길로 가지 말아야지, 했지만 그게 그렇게 되나. 아침시간이 천금 같은 걸.
다시 그 길을 지나갈 때 눈의 각도를 조금 높여 자기 코끝을 바라봤다. 코만 동동 뜨도록.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도 코끝만 바라보고 다니다 보니 아는 사람이 지나가도 모른 체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는 거다. 언니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시범을 보여가면서 사람 코만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 어떤 건 줄 아느냐고,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을 해서 다들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 뒤로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코끝으로만 가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좁고 편협하게 내 앞길만 헤집었던 것 같다.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많은 꽃들이 내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코끝은 이제 그만 봐야지. 남천나무를 너머 더 멀리 내다봐야지. 이제라도 사방팔방 둘러봐야지.
누가 한 말인지 잊었는데, 생명에는 구멍이 필요하단다. 숨구멍처럼 들고날 구멍 말이다. 구멍을 깊게 파는 것보다 여러 개 파는 게 중요하단다. 여기저기 관심을 넓혀 이곳저곳 들여다볼 구멍을 많이 만들라고 했다. ‘오늘의 꽃’도 그런 구멍 중 하나가 되어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그러운 수레국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