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거침없고 솔직한 연애 소설
독서모임의 책으로 지정된 책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이라는 주제로 제법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나는 오히려 이 주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한 커플의 사랑을 이야기 안에서 철학적 일반론을 끌어내는, 문학인 듯 철학인 듯 특이한 포맷을 취하는 작품이다.
이전에 그의 저서를 4권 읽었는데, 각각 <철학의 위안>, <불안>, <뉴스의 시대>였으며 너무 재밌게 읽어 전부 소장 중이다. 여러 철학 이론으로 시대상을 섬세하고 다정하게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이번 책에서도 그의 특징은 드러난다.
사랑의 흐름에 따라 총 6가지 단계로 이 책을 정리해 보겠다.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난 영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 비행기 안에서 나누는 대화부터 화자가 그녀를 갖기까지 그녀를 갈망하면서 겪는 낭만적 편집증을 설명한다. 모든 것을 운명에 끼워 맞추고 그녀를 완벽한 여자로 생각하게 만든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는 인연의 의미를 더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이대로 놓치면 마치 사는 동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운명의 짝을 잃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랑 앞에서 인간의 판단력은 정말 흐리다. 이런 인연은 대개 일상으로 복귀하면 생각나지 않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클로이가 이해를 받으며 산다는 느낌이 드는 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위치에 이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녀가 하는 수많은 말과 행동으로부터 아주 느리게 그녀의 삶의 큰 주제들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캐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알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실마리들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조각을 맞추어 이야기를 엮어보는 탐정이나 고고학자와 같다.
나는 그녀가 다른 여자들하고 있을 때는 불편해하고,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훨씬 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굳건하게 의리를 지킨다는 것, 본능적인 씨족 또는 공동체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을 통해서 클로이는 천천히 내 마음에서 복잡한 통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일관성을 지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화나 사람에 대한 취향 정도는 굳이 물어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서로의 벗은 모습을 보는 것, 책에서는 ‘취약점’에 대한 ‘정직성’이라고 표현한다. 관계가 지속되면서 정신적인 면으로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의 우울증, 자존감, 성장 과정에서 겪은 상처와 같은 것을 공유한다. 이러한 것들을 파악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를 통해 나를 더욱 알아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친밀성을 축적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하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안정감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할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하게 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둘은 같이 지내면서 싸우곤 한다. 모든 싸움의 원인이 상대였던 것이 아니다. 피곤해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건데 그게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연인에게 이런 식의 미성숙한 감정처리를 하기 십상이다. 감정이라는 건 공기나 물과 같은 거라서 칼로 잘라서 정리가 잘 안된다. 하지만 정리가 안 되었을 때에도 겉으로는 정리 정돈이 되어있는 사람을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클로이는 갑자기 나에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박효신의 노래 ‘이상하다’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사랑이 너무 좋아서 이후가 두렵다는 가사를 가진 노래다.
습관의 파멸은 클로이를 미지의 이국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 번도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여자처럼 욕망을 자극했다
클로이에 대해서 모든 걸 파악하고 나니 흥미가 떨어진다. 그런데 집이 아닌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클로이의 대처 방식을 보니 그녀가 새로워진다. 이런 게 안정 후에 오는 권태겠지? 새로운 자극은 오래가지 않을 거고. 다시 익숙한 공간에서 만나면 똑같을 거다. 그리고 책에서는 화자가 클로이에게 권태를 느끼는 동안 그녀도 비슷했던 거 같다. 결국 진짜 새로운 흥미에 먼저 손을 댄 건 클로이였다.
클로이는 화자의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났다. 화자는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모른 척했다. 그리고 다급한 마음에 ‘낭만적 테러리즘(질투, 삐지기, 화내기, 울기 등으로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보려 하지만 점점 관계를 악화시키기만 하는 것)’에 빠져들어 관계를 망가뜨렸다. 유책은 클로이인데 관계 악화의 죄책감과 후회는 화자가 훨씬 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화자는 실연의 고통을 겪는다. 퇴사하고 혼자 있으려 하고 아무의 연락도 받지 않아보기도 하고 폐인처럼 살다가 자살시도도 하고 바람피운 그자들에게 태연한 척도 해본다. 그때의 절망감은 너무 심각해서 그로 하여금 우울함에 절여진 생쇼를 하게 만든다. 그런 자신에게 현타가 올 때쯤, 서점에서 만난 레이첼을 보며 다시 삶의 의지가 소생하고 소설은 끝난다.
역자의 말대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들이 적힌 느낌이 있어서 그 점이 가벼우면서도 매력적이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내가 더 긴장해서 읽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학적인 것에도 공감한다. 철학을 좋아하는 나도 이 책의 지나치게 면밀한 탐구가 때로는 버거웠다. 노스탤지어를 떠올림에도 깊이 공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시간들이 떠올랐고 내 안에서 하나의 단행본처럼 간결하게 정리됐다.
이 책을 통해 충분히 지독하게 사랑을 탐구했다. 너무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고 나의 연애가 마구 혼란했던 상황에서 읽었더라면 정말 구구절절 탄식으로 공감하고 읽었을 것 같은 극심한 낭만주의자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