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리 Jan 21. 2022

남편의 커피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원효대사님 말씀


 남편은 일 년 내내 ‘뜨아’파다. 한여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은 손에 꼽는다.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섞다니, 커피 양이 적어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란다. 그는 커피 상품권을 정기적으로 구매하고, 가끔은 1+1 쿠폰이 오늘까지라며 뛰어가서 아무도 안 시킬 것 같은 시즌 음료(aka. 이상한 과일 슬러시)등을 사왔다. 1년에 커피 값을 얼마나 썼는지를 신이 나서 계산하기도 하고, 스타벅스의 굿즈를 종류별로 줄서서 받아온다. 


 많은 커피 애호가가 그렇듯 그는 아침에 출근해서 한 잔, 점심 먹고 한 잔, 늦은 오후나 저녁에 또 한 잔을 마신다. 자기 직전 베란다 의자에 앉아 네이버 스포츠 뉴스를 검색하며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게 그의 낙 중 하나다.


 그는 본인이 카페인에 내성이 생겼다고 믿었다. 카페인을 아무리 많이 섭취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왔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진 않았지만, 술 담배를 안 하는 사람에게 커피까지 마시지 말라는 건 가혹했다. 몇 달에 한 번씩만 “하루에 두 잔만 마셔라”고 근엄하게 충고했다.




 어느 날 그가 응급실에 제 발로 걸어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저녁이었다. 응당 퇴근했어야 하는 그는 오지 않고 “퇴근길에 병원을 들르겠다”고 전화를 했다. 퇴근길에 갑자기 숨이 가쁘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어지럽기까지 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는 거다. 그는 장수집안 출신이다. 나는 그의 심장이 튼튼하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으나,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응급실에 갔다. 


 창백하게 질린 그는 코로나 시국의 응급실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4시간을 대기하며 엑스레이 피검사 심전도검사를 한 결과 그는 전신이 튼튼하다는 소견을 받아들었다. 의심했던 역류성 식도염마저도 딱히 증상이 일치하지 않았다.  조금은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귀가했다.


 그 이후 그는 명확한 병명을 찾기 위해 대학병원에서 한 달여에 걸쳐 또 각종 검사를 했다. 그는 반쯤은 실망스럽고, 반쯤은 다행스럽게도 역시 전신이 튼튼하다는 전문가의 재확인을 받았다. 그리고 각종 검사를 거치다 발견한 작은 용종을 떼어내는 시술도 받아 한층 건강해졌다. 





커피 네가...어떻게...@pixabay Myriams-Fotos




 그의 증상의 원인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원인을 찾은 것 같다며 비밀스럽게 뭔가를 털어놨다. 그가 지목한 범인은 커피였다. 증상이 나타난 날에 섭취한 음식들을 복기한 결과, 항상 저녁 라떼가 있었다는 거다. 커피를 많이 마신 날 저녁에 마지막으로 라떼를 마시면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됐다고 했다. 


 그는 유당불내증이다. 아침에 찬 우유를 마시면 배가 꾸룩꾸룩한다. 뭔가 소화가 안되는 듯하면서도 기분이 묘하고도 어지러운 그 느낌이 호흡곤란으로 느껴졌나 보다. 

 만병의 근원은 마음에서 온다. 원효대사님도 일찍이 발견하셨듯이. 숨이 안 쉬어진다고 생각하면 숨은 안 쉬어진다. 그러니까 그의 병은 카페인 과다섭취와 유당불내증, 그리고 마음의 병이 합쳐진 복합적인 결과물이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그는 이제 저녁 라떼를 끊고, 웬만한 커피는 디카페인으로 주문하기로 했다. 장족의 발전이다. 와이프나 부모의 몇 년간의 잔소리도 줄이지 못한 카페인 함량을 줄였으니까. 


 그는 내년에도 커피를 상당히 마실 테다. 나는 그가 커피값을 내고 받아온 굿즈들을 얌전히 잘 받아 쓸 예정이다. 왜냐면 커피는 기호식품이고, 기호가 없는 인생은 좀 심심하니까.  


작가의 이전글 동생의 야구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