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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뜻한 Mar 05. 2019

'달과 육펜스'

예술과 꿈의 사중주

 

 누군가는 '방랑벽' 내지는 '역마살'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허황'되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존경'해 마지않는다.




1. 한 남자가 던지는 인생의 무료함에 대한 펀치

 

 한 남자가 실종된다.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메모만을 남겨둔 채로. 그는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떠날 거라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아내조차. 그 남자의 실종을 둘러싸고 각종 소문만이 난무한다. 누군가는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비밀스럽게 남편의 행방을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달과 육펜스는 자극적이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물과 같다. 하지만 장르가 공포는 아니다.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소설 속 소문처럼, 정말 젊은 여자와 바람이라도 난 것이라면 어쩌면 흔해 빠진 치정 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바람'이 난 진짜 상대는 젊은 여자도, 그렇다고 남자도 아닌, 그의 '꿈'이었다. 그는 예술에 대한 갈망과 바람이 난 것이다.


 처음에 그 남자의 뒤를 쫓던 '그'도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믿었다. 으레 일어나는 세상의 흔한 사건들처럼, 고루한 결혼 생활, 반복되는 업무와 일상에 지쳐서 인생에 싫증이 나서 바람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뒤를 쫓다 결국 만난 '그 남자'의 모습은 그렇다기에는 너무도 단호했다.


 "나는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다시 묻는다. '당신의 아내와 자식들은 어떻게 합니까?' 끄떡도 않는 그 남자를 무책임한 가장이라는 굴레에 씌워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이라도 한 듯이, 그는 이 방랑의 생활을 만족하는 듯 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그 탈출을 염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을 통해 그를 만난 나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꿈틀대는 마음 속 열망을 따르면 무척 하고 싶지만, 차마 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그 '무언가'를 해낸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 그건 부러움, 자신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누더기같은 거처에서 살면서도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경심, 그의 선택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가족들에 대한 염려, 그러면서도 나라면 똑같은 선택을 할 용기가 없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과 좌절, 그래도 내 안정된 현실을 떠올리며 애써 자위하는 마음. 그건 마치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어제와, 그제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야근한 후, 집에 도착해서 튼 TV에서 자유롭게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럽지만 차마 내일 쿠바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 없는 자신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했다.



2. 당신의 꿈은 안녕하십니까?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지루한 일상에 대한 펀치는 잔잔한 호수에 작은 돌로 물수제비한 뒤 물결이 이는 파동처럼, 내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화가라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꿈을 잊지 않고, 언제든 그 꿈이 활활 타올라 삽시간에 자신의 고루한 일상을 태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 남자. 그를 보고 어릴적 호기롭게 '장래희망' 란에 무엇을 적었는지가 떠올랐다. 정말 그 때는 아무런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하지도 않고, 내가 어떤 대학을 갈 수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생각하고 꿈- 어쩌면 이룰 수 없는-을 꾸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내가 과연 어릴 적 꿈꾸던 일이었을까. 아니면 현실과 스스로 혹은 강제로 타협한 후에 얻어진 차선의, 혹은 Plan C, D… Z 일까? 그리고 과연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을까? 내게 먹고 자고 입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내 꿈만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울 만큼의 열정이 있을까? 나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해 스스로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달과 육펜스', 민음사. p 253.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또는 격세유전으로 내려온 어떤 뿌리 깊은 본능이 이 방랑자를 자꾸 충동질하여 그네의 조상이 역사의 저 희미한 여명기에 떠났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과연 나는 '꿈'을 위해 떠날 수 있을까? 그게 지금 내가 위치한 이 곳이든, 아니면 가족처럼 소중한 관계이든. 누워 있는 현실의 안온한 침대를 두고 새로운 곳 - 어쩌면 누추하고 지극히 볼품없을 가능성이 큰 - 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무모한' 것일지도, 그의 주변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무책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모함도, 무책임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나와 같은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천재 혹은 대단한 예술가쯤으로만 알고 있겠지만, 소설 속에서 비춰지는 그의 모습은 그러한 빛나는 명성과 대조될 만큼, 그리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 꿈을 좇으니 무지갯빛 인생이 펼쳐졌다는 그런 유니콘식 발상은, 이 소설에서는 없다. 그래서 더 잔인하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화가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가 떠나온 가족들은 그의 빈자리를 느끼지만 그의 아내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고, 마치 원래부터 그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달라져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도, 교양 있는 사람들이 즐비한 사교 파티도 더이상 없었다. 주머니 사정은 늘 어려워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야만 했고, 그가 죽고 난 뒤라면 모를까 살아 있는 그 당시에는 그의 작품을 비싼 값을 주고 사는 혜안을 가진 사람은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다. 병든 그가 죽은 후 그가 살던 타히티의 집은 불태워진다. 오로지 후세에 비로소 빛을 발하는 작품들만이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메운다.


 그는 알았을 것이다. 이 안정된 생활을 떠나서 도착한 곳이 '낙원'이 아니라 어쩌면 '고난'의 땅에 가깝다는 사실을. 예술이 물질적 풍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온 '그'의 질문에 답한다. "나는 예전의 생활을 하나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다 때려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떨쳐내기 위해 한 말일 수도 있다. 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정당화에 다름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꿈을 좇았다. 현실의 빈곤은 차마 꿈을 향한 열정의 불씨를 꺼뜨리지는 못했다.



 이 작품을 읽은 모두가 알다시피, 이 작품의 '그 남자'는 바로 화가 '고갱'이다. 6년전쯤, 서울시립미술관에 열린 그의 전시회를 보러 갔던 생각이 난다. 타히티에서 완성했다는 그의 작품들이 주는 원색적인 느낌과는 너무도 정반대인 그의 소설 속 인생은, 처참하게도 '날 것 그대로'였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보고, 무지개빛 꿈만을 허황되게 좇는 자의 최후란 이런 것이다고 깨닫고,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도 있다. 혹자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꿈을 좇는 인생을 살기로 비로소 마음먹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둘 다인 것 같다. 솔직히 아직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꿈만을 좇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버릴 마음은 없다. (그렇게 가진 것들이 많지도 않지만.)


 '꿈'은 종종 그럴듯한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밝은 달의 어두운 뒷면처럼 비극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소설 속 고갱처럼 꿈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희생한다. 누군가는 꿈에 눈이 멀어 사기를 당하고 재산을 탕진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좇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한다. 대개의 성공신화가 그렇듯, 사람들은 결과가 좋으면 힘든 과정을 모두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이 결과를 뒤엎을만큼 크나큰 고난이었음에도, 결과만을 보고 사람들은 이내 과정의 어려움을 잊는다. 하지만 만약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 꿈은 이내 '허황된 꿈'이 되고야 만다. 이렇듯 꿈이란 것은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약 고갱이 그저 무명의 화가로만 남아 있었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꿈을 좇기도 전에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와 안정 사이에서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마침내는 꿈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속 고갱의 모습은, 존경하기에 마땅치 않다. 안정을 버리고 궁핍하게 살아도 자신의 꿈을 처참하도록 아름답게 좇는 것. 그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신만은 풍요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갱의 전처의 사주를 받아 그의 뒤를 쫓던 '그'는 결국, 꿈을 좇아 자신이 누리던 현실적 안정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변호하며 말했는지도 모른다.


p 259. 인격이 없었다?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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