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헤이그의 한 호스텔에서 시작하는 책
바쁘고 자잘한 스트레스에 잦게 시달린 한 주였다. 금요일 자정 맥주 한 잔 반과 삼겹살을 올린 신라면볶음면을 흡입한 후 만족스럽지만 이유 모를 불안이 서서히 느껴졌다. '내일은 신시사이저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러 헤이그에 (혹은 까지) 가는 날이야. 가고 싶었지. 가서 무던히 앉아 잘 따라 하기만 하더라도 나중에 내 창작 프로젝트에 큰 배움이 될 거란 걸 알고 신청한 거지. 그런데 진짜일까? 한 이틀 배운다고 내 삶이 바뀔까? 내가 너무 못해서 외려 창피해하고 스트레스를 왕창 받게 되면 어떡하지? 괜한 고생을 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세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걸어 헤이그에 도착했다. 날씨는 네덜란드 겨울의 트레이드 마크인 부스러지는 비와 울적한 연회색 하늘. 워크숍 장소 문을 열고, 이전에 함께 작업을 했던 아티스트들과 인사를 하고, 오른쪽 중간 자리에 앉았다. '잘했다. 잘 왔어.' 그냥 알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색다른 환경, 목소리, 사용되는 단어들과 감정. 수강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고, 노트북을 열고, 아두이노 (Arduino)를 켜고, 브레드보드 (Breadboard)를 잡았다. 네 시간이나 흘렀다는데, 난 왜 이렇게 신이 나있나?
수업 후 씩씩한 걸음으로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씻고, 자리에 누웠다. 하루 일과를 되짚고, 랜덤 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내고 정리하다 알았다. 놀이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걸. 언젠가 나만의 마당놀이를 만들어 사람들을 초대하여 울고 웃어보고 싶다는 걸.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이 무언인지, 그 노력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함께 생각하고 “느껴보고” 싶다는 걸. 다 큰 성인이라 할지라도 우리 각자 고유한 상처, 우리를 뒤로 또는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기억,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응어리를 품고 사는데, 스스로 그 상처와 기억, 응어리를 꺼내보는 건 어떤 것인지, 이름도 모를 누군가의 상처 꺼냄을 묵묵히 지켜보고 보호해 주는 건 무엇인지.
그 과정을 우리가 잘 만들어진 놀이와 함께 한다면 좀 더 편안히, 안정감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를 위해서,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또 놀이가 부족해 삶이 팍팍해진, 이름 모를 그 누군가들도 위해서.
직관적으로 알았다. 그를 향한 첫걸음은 어떤 놀이를 디자인하고 싶은지에 대한 비전을 적는 것이 아니다. 내 과거 놀이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의 내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수행하는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고 글로 적으며 이해하는 것이었다. 남을 의식하고, 남의 의견에 따라 디자인, 그리고 창작환경이 흘러가버리게 하지 않기 위해선 단단한 나, 그리고 나에 대한 이해가 우선일 듯하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글은 나의 향후 성인을 위한 놀이를 만드는 창작활동,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협업을 도울 수 있는 놀이를 디자인하는 연구를 돕고자 하는 희망에 작성된다. 희망, 그러니 그렇게 되게 만들고자 쓰는 글이 라기보다는, 이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그 꿈에 다다르기 위한 연습의 일부이고, 그 연습을 도와주는 놀이가 된다. 이 비슷한 놀이 디자인을 위한 연구자 혹은 놀이 연구를 위한 디자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놀며 즐거움을 느낀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거나 그 기쁨의 감정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느끼고자 하는 독자님들이 읽고 "통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신다면 그것은 덤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내 일에 주로 영향을 미친 놀이는 대게 내가 한국에서 어렸을 적 친구 가족들과 즐긴 것들이다. 고로,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와 전통이 해외생활에 갑작스레 도움이 된 경험을 하신 독자님들이 읽게 되신다면, 그건 더 큰 덤으로.
반나절 헤이그에서 신시사이저를 만드는 과정 속에 있었지만, 난 네 시간가량 악기를 만드는 방법을 놀이처럼 그리고 놀이로서 배웠다. 시간은 이미 흘러 있었고, 난 맑게 웃고 있었다. 또다시 악기를 만들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았다. 수강생들과의 스몰토크가 좋았다. 누가 누가 잘 만드나 견제하고 경쟁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놀이하는 문화, 공포를 마주하거나 공포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놀이가 개발되고 널리 사용될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서.
반나절 헤이그에서 느낀 즐거움과 연대감이 이 글을 마음속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에서 꺼내놓겠다는 결심과 낙관적인 마음가짐을 만들어 준 것 같다는 감사한 추측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