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화는 도망쳤다. 시린 압록강 물살을 온몸으로 헤치고, 뒤쫓는 군견의 울음소리를 등 뒤에 두고, 달빛에 젖은 중국의 겨울 들판을 홀로 건넜다. 닷새를 굶은 배는 웅크리면 쥐처럼 울었다. 해가 뜨면 크고 작은 공장 마당에 숨어들었고, 밤이 오면 다시 걷고 또 걸었다. 국경을 건넌 순간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중국 땅에서의 하루하루는 여전히 목숨을 건 외줄타기였다.
그렇게 석 달 동안 동남아의 작은 골목과 무수한 국경을 전전했다. 경계심과 절박함, 그리고 한 줌의 희망만이 그녀를 살게 했다. 마침내, 그녀는 '천국'이라 불리는 남쪽 땅, 한국에 도착했다. 서류에는 새 이름, 새 인생이 적혔다. 최경화, 스물일곱. 하지만 밤이면 잠에서 깨, 북한에서의 기억이 산산이 깨어졌다.
국정원 조사실의 하얀 형광등 아래, 경화는 상대를 처음 봤다. 서른아홉. 단정히 빗은 머리와 서늘한 눈매, 냉정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 이기호였다. 질문은 차가웠지만 목소리엔 묘한 믿음과 연민이 섞였다. 경화의 입장에선 그저 무서운 조사관일 뿐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켠에서부터 불쑥 일어나, 그 남자의 피로한 눈가를 바라볼 때마다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면담이 끝날 때마다 그가 마지막에 건네는 "수고했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묘하게 남았다.
하나원에 입소한 이후 세상은 좀더 밝아진 듯 보였다. 통장을 개설하고, 휴대전화를 받고,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밤이면 기호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연락 한 번 할 수도, 다시 마주칠 방법도 없었다.
2
경화는 그림으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다. 자신처럼 넘어온, 부모를 잃은 아이들, 혹은 북한 사투리를 버리지 못한 작은 손들에게 물감과 붓을 쥐어줬다. 미술대 졸업장이 서울에선 별로 쓸모 없다고 느꼈지만, 그녀에게 그림은 또 다른 언어였고, 감정을 나누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어느 오후, 작업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오랜만에 보는 기호였고, 그 곁엔 까만 눈망울의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그의 딸, 시화. 경화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오랜만이네요. 강사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아이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그 미묘한 공기가 그들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차를 함께 마시며 나눈 대화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기호는 경화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었고, 경화는 조심스레 자신의 일상을 들려줬다. 아이는 그림 종이 위에 색색의 꿈을 펼쳤고, 기호는 멀리서 그 모습을 미소 짓고 지켜보았다. 몇 번의 만남은 두 사람을 점점 더 가깝게 만들었다.
3
어느 날 해질녘, 경화와 기호는 동네 공원을 걸었다. 노을이 번져가고, 한적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과거와 미래를 조심스럽게 나눴다.
“경화씨, 가끔은 무서웠어요. 혼자 아이를 데리고 산다는 게. 그런데 지금은 이제 외롭지 않아요.”
기호의 고백에 경화는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으로, 정처 없이 떠돈 시간이 길었다. 조심스럽게 손이 맞닿고, 서로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곧 결혼하게 되었다.
경화는 시화를 친딸처럼 대했다. 처음엔 경계하던 아이도 어느새 경화를 엄마라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저녁이면 셋이 나란히 식탁에 앉았고, 소박한 웃음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 많은 날들이 평화롭게 흘렀다.
기호는 결혼 후에도 국정원에서 일했다. 점차 높은 자리로 승진했고, 중요한 국가기밀을 다루는 위치에 오르게 됐다. 시화는 대학에 진학했다. 경화의 사랑과 헌신 속에, 가족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성장했다.
4
2025년 가을, 세계 정상들이 모인 APEC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국 대통령이 특별 방문한 경복궁, 그 역사적인 근정전 안은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이기호 역시 현장 경호 책임자로 있었다.
순간, 멀리서 날아온 총성이 경복궁 뜰을 가로질렀다. 미국 대통령이 쓰러졌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호는 본능적으로 총탄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달렸다. 인근 호텔 옥상, 복도 끝에 섰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검은 복장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의 이마에 흐르는 땀, 매섭게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익숙함.
경화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
“경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던 거야?” 기호의 목소리는 떨렸다.
경화의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여보 미안해. 평양에 두고 온 딸을 위해… 어쩔 수 없었어.”
기호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경화는 다정한 아내이자, 시화에게는 헌신적인 엄마였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의 뒤에는, 북에서 가족을 인질로 잡고 보낸, 20년 계획의 침투 킬러라는 진실이 있었다.
경화는 총구를 천천히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그래도… 당신과의 시간은 진짜였어.”
기호는 소리쳤다.
“안 돼! 경화야!”
한 순간, "탕!" 울렸다.
경화가 쓰러졌다.
5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기호는 주저앉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경화야… 왜… 왜 나를 속였어?”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한 마디는 희미했다.
“사랑했어, 정말… 당신과, 시화와…”
차가운 밤공기 속, 기호의 울음이 어둠을 갈랐다. 그는 아내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밤하늘에는, 더 이상 노을이 남지 않았다.
남쪽 하늘에선 가을바람만이 쓸쓸히, 떠돌고 있었다.
교차되는 운명과 진실, 이해할 수 없는 거짓과 사랑. 그 모든 뒤엉킨 마음들 속에서도, 경화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던 것은 결국 ‘가족’이었다.
그리고, 남겨진 자의 절규 속에서 세상은 변함없이 아침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