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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Ssam Feb 12. 2023

1. 암 환자, 정신과 진료실을 가다.

1. 어느 날 갑자기 암 환자가 되었다.

오늘따라 유독 맑은 하늘에 가슴이 먹먹하다.


병원 진료실을 나온 뒤 홀로 화장실로 가 한참을 울었다.

'이럴 거면 혼자 오지 말걸.'

같이 오겠다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혼자 잘 다녀오겠다고 괜히 센척한 자신이 머쓱하다.

"안타깝지만 유방암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2기가 넘는 상황이라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분명 이다음에 의사 선생님이 더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 기억이 없다. "유방암"이라는 말이 계속 머리 안을 맴돌았다. '그럼, 나 죽는 건가? 왜 지금이지? 40을 바라보는 30대지만 그래도 암에 걸리기에 아직 젊은 거 아닌가?'


유나는 음반회사에서 마케팅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피아노로 예고와 음대를 나왔지만 음악가가 되는 건 쉽지 않았다. 다양하게 들었던 음악 덕분인지 클래식과 재즈, 팝 등을 두루 다루는 회사에서 취직할 수 있었다. 동기들 중에서 지금까지 일하는 친구가 별로 없는 걸 보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다. 마케팅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밀리지 않기 위해서 더 늦게까지 일하고 술자리도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이렇게 살다가 언제가 몸이 탈이 나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설마 지금 이 나이에 유방암은 상상하지 못했다.


병원 로비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솔직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정신으로는 이제 막 학원을 다녀왔을 딸아이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딸을 같이 돌봐주고 있는 어머니 얼굴도 볼 자신이 없다. 병원을 간다는 걸 알 테니 어머니는 결과를 걱정하고 계실 거다. 9년 전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만삭이었던 유나는 곧 딸을 낳았다. 어머니는 고민을 하시다가 아버지와 살 던 집을 정리하고 우리와 같이 살기로 했다.

"그 집에 혼자 있으면 떠나간 네 아버지 생각만 나서 힘들어."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서 같이 살고 싶다고 했지만 유나가 딸을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제대로 못할까 봐 챙겨주고 싶으셨던 거다. 덕분에 딸은 할머니의 사람을 듬뿍 받으면서 컸고 그만큼 직장일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에게 엄마가 아프다는 걸, 어쩌면 엄마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홀로 남겨진 남편은 어머니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유나의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게 된다.


'일단 사무실로 가자.'

예전부터 남편과 심하게 다투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면 회사 사무실로 갔다. 회사가 북적이든, 아무도 없어 적막하던 회사 책상에 앉아 있으면 생각이 정리되곤 했다. 팀장이 되고 나니 구석자리를 줘서 혼자 있기에 좋다. 이제 10년을 넘게 지냈던 공간이다. 동료들도 이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얼굴만 봐도 대충 서로를 안다. 1달 전 직장건강 검진에서 유방에 뭐가 있어서 정밀검사를 한다는 건 다들 얼추 알고 있다.

'분명 이사님은 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고 있겠지.'

암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 그만큼 회사에 공백이 생기기도 할 테고, 무엇보다 최근 1달간 계속 멍하게 있으면서 자잘 자잘하게 일들을 놓치고 있는 유나를 뭐라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어 줬다. 음대 선배이기도 해서 대학시절까지 하면 15년 가까이 봐왔던 사이이니 가족만큼 가까운 사람이다. 그게 때론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그만큼 또 편하다. 든든한 지원자이자 멘토.


가족들에게는 문자로 간단히 병원에서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사무실에 있다가 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숨어 들어가는 모습을 가족들은 더 걱정하겠지만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회사는 퇴근시간도 조금 지난 시간이라 조용하기도 했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들에 파묻혀 있었다.

'직장일은 어떻게 해야 하지? 바로 병가를 내야 하나? 그래도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다니다가 도저히 힘들 때 병가를 낼까?'

그러다 문득 유방암이 일을 너무 무리해서 생긴 것 같다. 원치도 않는 술을 이런저런 일이다, 모임이다, 회식이다 등등으로 마셔왔다. 주요 프로젝트를 할 때면 낮밤이 바뀐 채 생활하기도 하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두통이 와서 약을 달고 살았다.

'일하다 암까지 걸렸는데 내가 이 회사 사정을 봐줄 필요가 있을까?'

그러고 나니 이제껏 열심히 일한 자기 자신이 서러웠다. 뭘 위해서 이렇게 살아왔을까.


그렇게 머리 안으로 땅굴을 끊임없이 파고 있을 때 이사님에게 사내 메신저가 왔다.

'자리에 있지? 잠깐 내 방에서 볼까?'

당연히 이사님이 퇴근을 했을 거라 생각했고 내일 출근해서 대강 상황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간 당황스럽다. 그래도 오히려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이사님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에게 대강 이야기 들었어. 걱정 많이 하더라. 너도 많이 혼란스러울 거고."

유나와 남편이 대학동기이니 남편 역시 이사님과 대학 선후배 사이다. 남편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니까 서로 먼저 이야기를 나눴을 수 있다. 유나 입장에서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렇게 상황이 전달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느끼면서도 괜히 나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한 것에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내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사님은 유나에게 명함하나를 건넸다.

"더 플레이스 의원??"

유나는 병원처럼 보이는 명함을 보며 의아한 듯 이사님을 쳐다봤다.

"암 환자를 주로 보는 정신과 의사야. 유능하면서도 좀 독특한 의사. 내 아주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우리 와이프 주치의사. 너도 알겠지만 2년 전에 우리 아내가 난소암으로 치료받았잖아. 그때 참 많이 힘들었는데 이 선생님 덕에 잘 극복할 수 있었어."


"그래도 정신과는 좀..."

갑작스레 정신과 의사를 소개하는 이사님에게 유나는 꽤나 당황스럽다. 오늘은 뭔가 계속 황당한 일이 계속되는 날이다.

"지금 상황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황당할 수 있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미국에서는 암 환자가 암을 진단받는 순간부터 마음 건강을 같이 챙겨준다고 하더라고. 그게 암을 치료하고 극복하는데도 더 도움이 된다 하고. 나나 우리 아내도 경험해 봤지만 지금부터 여러 가지로 생각도 복잡하게 많아질 거야. 불안하고 답답하고. 암 치료도 그렇고 직장일도 그렇고 남편이나 아이에게도 마찬가지고. 한번 속는 셈 치고 가봤으면 좋겠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이미 친구에게 부탁도 해 뒀으니까 내일은 출근하지 말고 여길 다녀와. 앞으로 직장상황을 어떻게 할지는 일단 여기 갔다 와서 같이 이야기하자고."


이사님은 학교 선배지만 직장에서는 항상 나에게 존대를 해 준다. 직원을 존중하는 게 몸에 베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자신이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대학 선배의 모습이 된다. 이럴 때는 든든하면서도 동시에 거절할 수 없는 압박도 느낀다. 다소 내키지는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유나는 거절하기 힘들어진다.

'뭐 일단 한두 번 갔다 오는 시늉이라도 하자.'

신경 써 줘서 감사하다고 찾아가 보겠다고 그렇게 명함을 받아 들고 나오면서 이제는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이사님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도 든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집에 가서 우선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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