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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Ssam Apr 10. 2023

살아가는 와중에도 죽음을 기억하라

삶을 완주한다는 것

과거의 죽음

지금은 많이 낯선 풍경이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주택 대문 옆이나 아파트 공동현관 옆에 등불이 있으면 누군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도 해서 나와 상관은 없지만 누군가 겪고 있을 상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어린 나이지만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상당히 보기 힘든 생경한 기억입니다. 


지금의 죽음

지금의 죽음은 철저히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약해진 모습을 어느 순간 일상에서 우리는 보기 힘듭니다. 어느 순간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들어가서 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연세가 많더라도 건강하고, 몸이 아프더라도 심각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지냅니다. 누군가가 죽음을 고려할 정도로 건강이 심각한 상황이라면 가까운 가족들만 밀접하게 대하고 주변 사람은 단편적인 이야기로만 알게 됩니다. 질병이나 노쇠로 인해 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이제는 거의 다 병원에서 맞이합니다. 이후의 장례과정 역시 일상환경이 아닌 낯선 병원에서 치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잃어버린 시대

우리 사회는 죽음을 잊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죽음을 숨긴 시대입니다. 죽음이란 우리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드문 불행과도 같은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 않죠. 2022년 총 사망자수가 37만 명이 넘으니 우리 사회는 하루에만 평균 1000명 이상의 사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그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은 드물어서가 아니고 우리가 감춘 채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두려움을 억압 회피, 그렇지만 언젠가 찾아올 운명

감추었다고 해서 죽음이 우리 주변에 없는 것 아닙니다. 마치 타조가 위협적인 상황에 쳐하면 모래 안으로 머리를 박는 것처럼, 현대사회의 우리는 죽음이라는 공포를 마치 있지 않은 것처럼 숨겨둔 셈입니다. 이는 본능적인 죽음의 공포를 감정적으로 억압하고 회피하는 심리적 방어기제입니다. 이런 억압과 회피를 이용하면 우리 마음은 다소 편할 수 있습니다. 잊고 살아가니까요. 하지만 막상 그 죽음과 관련된 위협이 현실적인 자극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그 억압된 공포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암이 공포로 다가와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암입니다. 아무리 초기암이나 치료가 쉬운 암이라고 하더라도 암은 혹시 모를 극단적인 상황을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우리가 억압하고 회피하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극됩니다. 이런 공포는 종종 모든 암에 대한 치료를 잘 마치고 난 후 어떻게 보면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살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 안은 채 조마조마 살아가게 만듭니다. 준비가 안된 상태로 억압된 공포의 버튼이 눌려졌기에 이후에 통제가 안 되는 거죠.


조기완화치료의 필요성

그런 연유로 최근 암 관리에서는 조기완화치료(Early palliative therapy)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완화치료는 병을 완치하기 위한 치료가 아니라 완치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암으로 인한 불편감을 줄이기 위한 치료입니다. 과거에는 호스피스라고도 했지만 지금은 완화치료라는 표현을 더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스피스는 말기암 상황에서 임종까지의 관리 측면이 더 있는데, 최근에는 의학의 발전으로 전이가 된 암이라고 하더라도 치료를 하면서 수년간 삶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말기암의 경계가 모호해지다 보니 완치목적은 아니더라도 암으로 인한 불편감을 완화하는 치료라는 의미에서 완화치료라고 합니다. 신제적으로는 암으로 인한 통증이나 기능장애를 관리하는 치료이고, 정신적으로는 절망적인 암 상황으로 인한 우울, 불안, 불면, 혼동 증상을 관리하는 치료입니다. 과거에는 이미 암이 너무 전이가 된 상태이거나 암의 완치를 위한 치료가 실패했을 때 완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진행암의 진단 시기부터 암 완치를 위한 치료를 시도하면서 완화치료를 함께 병행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조기완화치료의 효과

얼핏 생각하기에는 암 치료에 집중하면서 암을 극복하는데 신경을 써도 모자랄 판국에 암으로 인한 극단적 상황을 암 진단 시기부터 관리하는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암으로 인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암치료만 하는 게 암을 극복하는데도 필요하다고 말이죠. 완화치료는 정말 암을 더 이상 의학적으로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을 때 그때 받아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의학연구에서는 진행암에서 완화치료를 초기에 암치료와 병행했을 때 생존기간도 더 늘어날 뿐 아니라 그 기간 동안의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 암이 진단된 상황에서는 어쨌든 우리가 억압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극될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도 그런 걱정과 염려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안 쓸 수가 없죠. 그런 정서적 불안은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면역체계 등 신체적인 부분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암에 대한 우리 신체적, 정신적 관리 모두에 있어 조기 완화치료는 도움이 됩니다. 내가 암이라는 공포의 자극이 찾아왔을 그 시점부터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훗날 안타깝게도 절망이라는 상황을 받아야 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없었다면 절망은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공포로 다가오고 그 순간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못한 채 얼어붙어버리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막상 죽음이 절망인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 절망인 셈입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갑작스레 찾아왔을 때 영향

제가 처음으로 경험했던 죽음은 외할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20살 무렵이었으니 아직은 정정하다 여겨질 연세였는데 뇌졸중과 뇌출혈이 겹치면서 비교적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본인도 그렇고 모든 가족도 생각지도 못할 때 할머니의 임종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외할머니에 대한 애도가 채가시기도 전, 우리 가족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바로 외할아버지의 치매였습니다. 그간 외할머니께서 정정하시던 때에는 외할아버지의 치매증상을 외할머니가 가족들 모르게 상황을 무마하면서 돌봐오셨던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죽음 이후, 우리 가족은 그간 숨겨져 있던 외할아버지의 힘겨운 상태를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외할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여러 낯선 상황들로 인해 치매 증상은 급격하게 악화되었습니다. 미리 알고 준비를 했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돌봐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 모든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많은 가족이 최선을 다해 돌보려 애썼지만 결국 여러 혼란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당시 아마도 본인이 외할아버지의 곁에서 수발을 들며 돌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그간 알고 있는 인자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지금의 횡설수설하고 어리숙한 치매 노인의 모습은 감추시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억압하고 회피한 현실의 상황은 결국 언젠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물밀듯이 덮쳐옵니다. 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향후 언젠가는 올지도 모를 죽음에 대한 준비는 설령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압도되어 버린 채 혼란스러움 속에 맞이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암과 상관없이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가져오는 삶의 소중함

'메멘토모리'라는 말이 있죠.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전 중세시대와 초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메멘토모리를 상징하는 예술작품을 집에 두고 순간순간 죽음을 기억했다고 하죠. 여기서의 죽음은 절망이나 고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해 지금 삶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내 삶에서의 가치와 의미를 항상 추구하라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삶에서의 고통이나 절망도 덤덤히 받아들이면서 그 가운데서도 내가 가져가고 남길 수 있는 삶의 소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만민 앞에 평등하기에 오히려 우리는 그 공포 앞에 얼어붙기보다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 소중한 삶의 시간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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