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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Aug 15. 2022

짙은 추억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서울 종로구 | 광화문 광장 & 삼청동

 누구나 저마다의 안식처가 있기 마련이다. 광화문이 그런 곳이다. 신문로와 세종대로로 불리는 그 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의 추억이 거리마다 깃든 곳이다. 일터로 향하는 평일이 아니더라도 쉬는 날이면 광화문으로 가는 녹색 7212번 버스를 타고는 했다. 


 특별히 대단한 곳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종각과 광화문역에 위치한 두 곳의 대형 서점에서 건조한 책 냄새와 한 장 한 장 넘기는 책장의 느낌을 코 끝과 손 끝으로 느끼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나만 알고 싶은 정동의 카페를 가기도 했고, 봄이면 만개한 분홍빛의 벚꽃과 자줏빛의 모란을 만날 수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뒤 벤치에서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으며, 궁궐임에도 많은 이가 찾지 않아 돌계단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경희궁에서 플레이 리스트가 두 번이 반복되도록 허공에 띄워진 두 발로 오랫동안 박자를 맞추는 날들도 있었다. 광화문에 위치한 국내 굴지의 자동차 부속품 회사를 다닐 때는 일을 하다 스트레스를 크게 받으면 (구) 러시아 공사관 앞을 지나 이화여자고등학교와 덕수궁을 지나 다시금 회사로 돌아오는 꽤 먼 거리를 걷고는 했다. 


 그런 광화문 앞의 추억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존재들에게 내어 주어야 했다. 언젠가는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또 언젠가는 노란 리본을 매단 천막에게, 그리고 최근 2년 가까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굴착기에게 내주어야 했다. 


 지난 8월 6일, 강릉으로 향하는 KTX를 타러 서울역을 향하던 그날. 1년 9개월 만에 드디어 광화문 광장이 새 단장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높이 쳐 둔 가림막을 거둬냈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한 탓에 집을 가기 위해 무조건 지나야 하는 광화문이었지만 집으로 바로 향하는 탓에 둘러보지 못했다가 이제야 카메라를 들고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KT 광화문으로 가는 신호등까지의 짧은 거리도 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보도블록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그 위로 사람들의 흥미로움으로 가득한 발자욱들이 더해지니 활기가 띈다. 예전 광화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직장을 다니고, 같은 시기 나의 자매는 세종문화회관 옆 지하에서 직장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여름이면 광화문 광장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직장 건물의 화장실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 씻기는 탓에 건물 화장실의 바닥이 흙탕물로 가득해 점심시간이면 둘이서 볼멘소리를 하곤 했었다. 그게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일인데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새로운 광화문 광장에도 역시 분수가 있었다. 분수마다 더위를 잊기 위해 뛰어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알 수 없는 미소가 나도 모르게 지어진다. 신이 나서 목청껏 지르는 소리도, 첨벙첨벙 발을 구르는 탓에 휘어버린 물줄기의 방향도, 물가에 주저앉아 엄마를 향해 힘껏 흔드는 아이의 가는 팔목도, 그들을 귀엽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온화한 미소까지 마음에 담긴다. 광화문이 드디어 시민들에게 돌아온 기분이 든다. 그간 정치적으로, 때로는 누군가의 짙은 욕구로, 또 어느 때는 집단 이익을 위한 이기심으로 얼룩져 가려졌던 광화문 광장의 순수함과 순기능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햇빛 차단용 우산을 꺼내야 할 정도로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에겐 태양빛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분수가 만들어낸 터널로 뛰며 입가로 퍼지는 미소와 장난기 가득한 눈빛의 어른들을 보니 그간 고된 삶을 버텨 오느라 그것들을 잠시 한 켠으로 미룬 것일 뿐, 완전한 상실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추억 상자 속의 광화문이 다시금 꺼내지고 있었다. 


 광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식재한 초목은 묘목 정도였다. 세월이 지나면 더욱 키가 자라고 잎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곳에서 추억을 만드는 이들 모두가 물을 먹고, 양분을 받고, 빛을 받아 크게 자란 나무처럼 오늘 함께한 이들과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 크고 풍성한, 그리고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때 삶을 지탱해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으면 했다. 

 이제 삼청동으로 향했다. 삼청동은 여러 사람들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지만 특히 엄마와의 추억이 곳곳에 있는 곳이다. 아주 오래전, 나는 내 첫 카메라인 파나소닉의 루믹스 LX-5를 들고, 엄마는 아주 오래된 캐논의 필름 카메라를 들고 삼청동을 가고는 했었다. 법련사 옆 지금은 없어진 비 오는 날 가족들이 먹었던 냉동 피자 가게, 엄마가 좋아하던 정독 도서관, 이탈리아 레스토랑 수와래, 삼청동 수제비, 덕성여자고등학교에서 수능을 본 자매를 기다리며 교내에서 기르던 토끼를 보던 날도 떠오르고는 한다. 


 어느 순간부터 삼청동은 고유의 멋이 사라졌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했던 거리는 사람이 줄었고, '임대 문의'라는 종이가 붙은 공실이 넘쳐나는 점포들, 지금은 모두 빠져나갔지만 개성 넘치던 취급 품목은  한때 대기업 화장품 가게들이 장악해 명동과, 종로와 다름없는 화장품 거리가 되었었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이곳을 가끔 오고는 한다. 다행인 것은 휑하기 그지없던 거리에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좋아하던 방앗간 떡볶이집에서 먹는 단 맛의 식혜도 줄 서서 먹어야 했고, 엄마가 좋아하던 수제비 가게에도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근처는 관광객이 더 많았다. 유명 커피 가게도, 최근 유명세를 타는 베이글 가게도, 편집샵도, 소품 가게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쉽게도 수와래는 문을 닫았지만 상권에 활기를 느낀 게 얼마만일까.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골목마다 아직 남아있는 구옥들은 변해가는 세월 속에도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연의 힘으로 깎여 나간 기와도, 색이 바랜 대문의 색도 여전한 곳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후함이 더해져 멋이 더해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이 그러하다. 보호수가 된 나무들이 그러하고, 한옥이 그러하다. 삼청동과 가회동, 안국동, 재동처럼 한옥과 양옥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곳들이 조금은 서서히 바뀌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시간이 흘러도 이곳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걷고 걸어 정독도서관 앞으로 가본다. 정독도서관은 여전했다. 주차를 하기 위해 늘어선 차들도 여전했고 낡은 옛 건물도 그대로였다. 아주 어릴 때도 있었던 벤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 익은 풍경이 주는 편안함은 언제나 좋다. 첫사랑과 이곳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날의 기억도, 성인이 된 후 만난 연인과 데이트를 하던 날의 기억도 잠시 스쳤지만 엄마와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던 날이 유독 생각이 났다. 독립을 한 지 벌써 7년이 됐고 평소에는 엄마에 대한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유난히 많이 생각이 났다. 


 정독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다.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장난감으로 만나는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라는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장난감인 레고로 표현해 아이들이 쉽게 접하게 한 점이 인상 깊었다. 끊임없이 전시 주제를 생각하는 큐레이터들의 노력이 엿보였고, 건물 외벽에 레고로 전시의 주제와 오브제를 확실히 표현한 점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선명하게 다가와 좋았다. 

 삼청공원 입구까지 걷고 왔던 길을 되돌아 청와대를 지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추억 여행으로 얻은 에너지를 연료 삼아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오래 기억하는 추억에는 애정이 담겨 있나 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들을 수면 위로 꺼낼 때 대부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좋지 않은 기분이 드는 추억의 대부분에는 애증이 담긴 것 같다. '그래도 OO은 좋았지'라는 생각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인왕산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한다. 인왕산에 얽힌 오래된 추억에도 애정이 섞이지 않은 일이 없는 것을 보면 짙은 추억에는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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