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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Dec 13. 2021

영혼의 종족 3-기괴한 이야기

  서로 마주 보고 춤추며 노래하는 영혼들은 거칠 것이 없다.- 숲 속의 사냥꾼-



 11.

 혜림과 카린, 두 사람은 호텔에서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나와 어젯밤 지나온 짜릿했던 그 길을 되돌아 걸었다. 오늘 아침 그녀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날씨는 제법 더웠으나 한여름 아침 하늘은 파란색 수채화 물감으로 칠해 놓은 듯 선명했다. 두 사람은 내내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중간중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공원을 빠져나와 횡단보도에서 멈췄다. 맞은편 피트니스센터 유리창에 붙어 있는 디지털시계가 그녀에게 보였다. 굳이 영점 몇 초까지 지나가는 시간을 알려주는 잔인한 시계였다. 타다닥거리며 현재를 과거로 빠르게 보내 버리는 끝자리 숫자는 불안감을 퍼뜨렸다. 그녀는 그냥 편안하게 오전 7시 40분 경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출근 시간의 거리는 인파로 넘쳤고 활기찼으나 외적으로 보이는 장면에 불과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지난밤 떠들썩한 분위기와 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반복되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평범한 일상이 오늘따라 왠지 기괴해 보였다. 마치 폭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채 짜증 나고 답답한 TV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물론 그 폭신한 소파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카린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하고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달리는 차량과 이륙하는 비행기의 시끄러운 기계음만 제거한다면 억눌린 잿빛 침묵 자체였다. 저런 상황에서 '좋은 아침'이란 의례적인 인사말은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무리한 요구였다.

 모두가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 곳곳에 표시된 숫자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아니 숫자가 잡아당기고 사람은 길든 온순한 노예처럼 끌려간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39번 공항대로는 앞뒤로 번호판을 단 중대형 SUV 차량이 줄지어 섰고, 버스 정류장에는 타고 갈 번호를 기다리며 무심히 폰을 들여다보고, 커다란 지하철 5호선 출입구 동공 속으로 사람들이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고개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 어디를 바라보든 사람보다 숫자가 눈에 띈다는 것은 분명 기괴한 일임이 틀림없다.

 드라마 속 세상은 사람이 아닌 숫자가 지배했다. 대단한 사람이란 멋진 숫자를 많이 가진 자들을 일컬었다. 숫자가 높을수록 성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에 누구나 동의하지만 다른 삶은 불가능했다. 끔찍하게도 주어진 배역인 노예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드라마 시나리오엔 다른 삶의 방식은 쓰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운이 좋아 요람에서 출발해 무덤까지 선택받은 삶을 살다 가지만 극히 일부만 누릴 수 있는 공짜 선물이었다. 99.9% 대다수는 숫자만 정신없이 쫓다 죽는다. 어느 날 숫자가 줄어들면 인간의 품격과 가치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볼품없어진 본인과 배우자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한다. 가정이 해체되고 심지어 목숨마저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는 짐승들도 생겨난다. 드라마 속 세상은 숫자가 인간의 품격과 가치를 결정하고 정신까지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최종 관리자였다.

 저 사람들 몸 어딘가에도 고대 노예의 낙인처럼 숫자가 은밀히 찍혀있지 않을까? 하긴 13자리 주민등록 번호, SNS 팔로워, 학벌, 직급, 유명세 등 모든 게 찬란한 숫자니까. 한 사람의 죽음을 사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수많은 1/n 중의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지. 정말, 저들 대부분이 어떤 나라 사람들처럼 절대 빈곤으로 인해서 그럴까? 그깟 숫자를 얻고자 버텨내야 하는 오늘 하루는 얼마나 버거울까? 가슴속엔 숫자로 인해 포기해버린 소중한 것들이 쌓여 아우성치지 않을까? 저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늙고 쇠약해진 몸으로 가혹했던 그 시절을 미화시켜 바라보겠지. 만물의 영장 호모 사피엔스는 종의 진화를 거듭한 끝에 결국 숫자가 됐다.

 하지 그녀는 드라마 속 인간 대한 어설픈 연민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보통 람들이 숫자 앞에서 어떻게 돌변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 세렝게티의 난폭하고 간사한 짐승들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무자비해진다. 그녀는 갑자기 그날 밤 꿈에서 보았던 숲속의 사냥꾼이 생각났다.

 '그래 봐야 세렝게티의 진정한 주인은 사냥꾼이지.'

다행스러운 것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하고 짜증스러운 한 드라마에 더는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혜림은 내심 소극적으로 살아온 자신이 이렇듯 발칙한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에 놀랐다. 그녀는 눈치챌 수 없었다. 지난밤 거침없는 영혼을 만나 그녀의 영혼도 함께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내 흥미가 사라진 혜림은 채널을 돌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른 세상을 걷는 카린을 쳐다봤다. 그는 지구라는 낯선 행성을 잠시 여행하는 이방인 소년 같은 매력을 풍겼다. 아침 더위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그의 순박한 얼굴엔 기쁨이 넘쳤고 여유로웠다. 그의 기쁨은 의심할 여지없이 함께 걷는 여자로 인한 것이었고, 여유로움은 길들지 않은 거친 자유였다.

 그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나이 불문하고, 대체로 남자들은 매끄럽게 길든 본인들의 사고방식을 정답이라 여기고 반들거리는 말투로 강요한다. '남자인 내가 사회생활은 너보다 많이 아니까 내 말을 들어'라는 식이다. 마마보이 성향의 전남편도 그 부분에 관해선 예외일 수 없었다. 현명한 여자는 그 남자가 멍청하다는 것을 알고, 초라한 여자는 그 남자의 얌전한 고양이가 되어 냐옹거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라비틀어진 말만 해대는 멍청이란 사실을 알아챈 얌전한 고양이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갸르랑댄다.

 카린은 그러지 않는다. 이방인 소년은 나약한 순수함을 오히려 강렬히 풍긴다. 함께 있으면 지치지 않는 아이들처럼 즐겁게 노는 느낌이다. 그는 잊혀버린 유치한 언어와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몸짓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매일매일 들뜨게 할 특별한 남자였다.

 그녀는〈사랑을 기다리게도 지치게도 의심하지도 않게 할게요.〉라는 멋진 고백과〈수풀에 누워 별을 듣고, 바람을 보고, 나무와 이야기한다.〉라는 꽃집 벽면에 붙어있던 감미로운 문구를 떠올렸다.

 "잠깐만요."

 그녀가 출근길 바쁜 인파 속에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서로의 숨결이 엉킬 정도로 바싹 붙었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갈라져 지나쳤다. 갈수록 발칙한 영혼의 세력이 커져가는 혜림은 수줍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깨에 걸친 미니 크로스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카린은 무척 낭만적이에요. 어젯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아요? 그리고 꽃집 벽면에 쓰여있는 문구들도 그렇고요. 어쩜 그래요?"

 그녀만의 특별한 남자는 아침 이슬 구르듯 생기발랄한 목소리와 우주의 법칙을 무시하고 한낮에 뜬 별처럼 촉촉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멋지게 대답할 말을 찾았으나 머릿속엔 온통 '아름답다'로 꽉 차 있었다.

 "혜림은 정말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한 말은 질문과 동떨어진 뜬금없는 대답이었으나 순수성에서 나온 완벽한 정답이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은 39살 여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자신을 깊고 순수하게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말했다.

 "그 문장들은 내가 꿈속에서 느낀 감정이었어요."

 "꿈이요?"

 "네, 꿈이요. 믿기 힘들겠지만 난 어려서부터 같은 꿈을 계속 꿨어요. 그리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말해주려고 했어요."

 "들려줘요. 아, 우리 그러지 말고 꽃집에서 얘기해요."

 그녀가 재촉하듯 그의 팔을 감싸 잡아끌었다.

 혜림은 자신도 전에 꾸었던 숲속 연인에 대한 꿈을 그에게 들려줘 둘의 인연이 운명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낡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연약한 새싹이 움터 올라 평평한 이파리 모양을 갖춰가는 광경은 정말 경이로웠다. 엄청난 나비 떼가 칙칙한 고치를 뚫고 나와 동시에 날아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를 전공했고 진화론 주의자인 그녀는 자신이 꾸었던 꿈과 최근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초월적인 힘의 작용과 연결 짓지 않았다. 즉, 그날 꽃집을 하는 카린과 당찬 로운이 인상 깊게 남아 거친 사냥꾼과 숲속 요정이 나오는 꿈을 꿨고, 허약해진 육체와 정신은 소름 끼치는 환영을 만들었고,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이 환청을 불러왔다는 질서 정연한 논리였다. 지금은 단지,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이 그렇듯 서로의 닮은 점을 찾아 맞춰보는 도플갱어 놀이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의 작은 꽃집은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카린의 생각은 랐고 구체적이었다. 그녀와 만나려고 숲속 연인에 대한 꿈을 오래도록 꾼 것이라 확신했고, 이 기회에 로운의 기묘한 능력을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살면서 일어났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현상을 함께할 그녀게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 그것은 그가 풀어야 할 중요한 수수께끼였다.

 루시안, 그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왜, 거의 반 세기 넘게 세상에 흩어져 있던 헬렌과 로운 그리고 레오와 마날을 한 곳에 모아 놓았을까? 혜림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미지의 존재 브리지트일까?

 그는 그녀와의 인연도 극적인 우연의 일치가 아닐 거라 확신했다. 전에 그들을 만난 것처럼 이번에도 분명 루시안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거라 여겼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지옥의 불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약 혜림이 두 개의 반지 중 나머지 한 개의 주인인 브리지트라면, 마지막으로 그녀가 나타남으로써 가까운 시점에 무언가 일어나려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들이 꽃집에 앞에 도착했을 때, 가게 앞 계단식으로 된 진열대에는 키 작은 벤저민과 난쟁이 선인장들이 물기 있는 화분에 담겨 가지런히 놓여있고 실내조명은 켜져 있었다. 카린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구멍에 넣고 돌리자 찰칵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달린 에어컨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실려 왔다. 혜림은 그날 꿈속에서 맡았던 초록의 향기가 나는 듯했다.

 입구 바닥엔, 얼추 50cm  x 50cm x 1.5m 되어 보이는 관처럼 생긴 길쭉한 직사각형 박스가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 이른 아침 꽃 도매상으로부터 배달된 박스 안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종류별로 신문지 싸여 죽은 듯 누워있을 것이다. 그녀는 로운이 화분에 물을 주고 박스를 실내로 밀어 넣고 다시 집으로 올라갔을 거라 여겼다.

 카린이 박스를 한 곳으로 옮기자, 그녀는 비좁은 숲속 오솔길을 산책하듯 식물들 사이를 지나쳤다. 그리고 작업 테이블에 올려있는 전기 포트를 개수대로 가져가 물을 받고 스틱에 담긴 커피 믹스를 머그잔에 쏟아부은 다음 끓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꽃과 초록으로 우거진 이 작은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한쪽이 벽면에 붙어 있는 길쭉한 작업 테이블은 그와 사이에 장해물 없이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

 둘의 마음처럼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머그잔에 부어 카린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어서 얘기해줘요, 나도 꿈 이야기 들려줄게요."

 그러자 카린은 도중에 손님이라도 들어올까 싶은지 현관 유리창에 걸린 '열림' 표지판 '닫힘'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돌아와 그녀가 타 준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 그때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난 같은 꿈을 수시로 꾸었어요. 동화 같은 이야기죠. 어느 숲속 공터 커다란 나무둥치 아래 다정한 연인들이 보였어요. 여자는 자신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죠. 난 여자에게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이라는 인디언식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 숲속에서 한 여자아이가..."

 여기까지였다.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이야기는 끊겼다.

  "어... 어떻게..."

 그녀는 전율에 휩싸였다.

 "왜요?"

 "호... 혹시 숲속의 사냥꾼으로 보이는.... 아니 그런 느낌의 남자와 고대 스톨라 복장과 비슷한 붉은 옷에 옆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자였나요? 여자는 남자가 끼워준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환하게 웃었고, 그때 반대편 숲속에서 그들처럼 약간 뾰족한 귀를 가진 여자아이가 나타나자 생명력 넘치는 향기가 나면서 낡은 잎이 떨어지고 새로운 이파리가 돋았나요? 하늘엔 검은 새가 높이 날고요?"

 그녀는 숨 쉴 틈도 없이 연속해서 물었다.

 "맞아요. 그럼?"

 "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밤, 나도 같은 꿈을 꿨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두 사람은 서둘러 각자의 꿈을 맞춰봤다. 같은 영화를 본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우연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건 비슷하게 닮은 것이 아니라 아예 똑같았다. 하물며 사이좋은 부부가 한 이불 덮고 잔다 해도 같은 꿈은 꾸지 않는다.

 "우연이 아니었어..."

 그가 생각에 잠겨 혼잣말했으나 심각하기보다 외려 차분했고 얼굴엔 역시나 하는 미소가 감돌았다.

 "우연이 아니라뇨?"

 그녀는 그의 표정에서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린은 그날 자신의 허락을 받은 로운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대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혹시 등에 꽃문양이 찍혔고 한동안 꿈에서 맡은 초록의 향기가 몸에서 났나요?"

 "나긴 났는데... 그것은 어디선가 묻히고 눌려서... 가만, 그것을 카린이 어떻게 알죠? 설마, 초현실적인 전생과 환생을 말하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 여자아이는 당연히 로운이가 되어야 하지만...."

 그녀는 과학적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에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꿈에서 본 여자아이가 로운인지 아닌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해요. 그것이 로운이 가진 기묘한 능력이죠."

 "기묘한 능력이요?"

 "네, 그러지 않아도 말해주려고 했어요. 꿈에서처럼 실제 로운인 생명력이 넘치는 초록의 향기로 새로운 생명을 자라게 하고 그 향기로 사람을 치유하죠. 그리고 사람들 내면에서 뭔가를 발견해요. 로운이 말로는, 헬렌과 나 그리고 뉴욕에 있는 두 친구처럼 혜림 안에 반짝이는 것이 있다고 했어요. 그것은 사람마다 고유의 성격이 있는 것처럼 각각 다른 느낌을 줘요. 헬렌에게는 풍요로움과 자상함이, 내게는 순수하고 거친 강함이, 혜림에게는 맑고 발칙한 용기가 떠오른다고 했어요. 그날 가게 앞에서 처음 봤을 때 로운이가 운다고 말했어요. 안에 있는 반짝이는 것이 몹시 슬퍼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끌렸던 것 같아요. 그날 로운이 정작 도와주고 싶었던 대상은 슬픔에 찬 반짝이는 것이었죠. 그리고 로운이 넣어준 향기에 그 반짝이는 것이 자극받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조금 있다가 로운이가 오면 보여주라고 할게요. 그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군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우리를 만나게 했고, 그 계획은 수십 년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짜여있었다는 것이죠."

 혜림은 느닷없이 밀어닥친 믿을 수 없는 현실 미스터리물 이야기 혼란스러웠. 황당한 이야기였으나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서로가 상대방 꿈속에 어와 본 듯 똑같았고, 자신처럼 그 신비로운 향기를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향기라 말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카린은 신의 유무와 상관없이 강한 존재를 섬기는 행위 자체가 자유의지에 반한다는 사람다. 그런 그가 지금 초현실적 이야기를 고 있다. 그녀는 매우 절묘게 딱 들어맞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초록이 우거진 작은 공간은 침묵에 빠졌다.

 카린은 오래전 어떤 멍청한 대장장이가 만들었다는 두 개의 반지중 나머지 한 개의 주인이 그녀라 확신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좀 더 가까워졌다는 것쯤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것은 거짓과 편견으로 쌓아 올린 오만한 인간 문명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일 것이라 여겼다. 어떤 경우든 그녀를 포함해 소중한 모두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불타오르는 의지와 달리 겉모습은 지극히 평온했다.

 혜림은 그날 첫 만남 이후 의미 없이 넘겨버렸던 자신에게 일어났던 낯선 변화를 되짚어보았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아니 확 달라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외면과 형제들의 따돌림으로 인해 가능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격과 판이했다. 전남편 태훈과의 결별도 지저분하게 끌려가지 않고 깔끔히 처리했다. 철밥통이라는 공립학교 교사 자리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스스로 부족한 여자가 되어 부족한 내 남자를 선택했다. 지난밤 그와 잠자리는 섹스가 아니라 난생처음 경험해본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이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변화는 그날 두 사람을 만난 후 일어났고, 기괴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발칙한 용기를 지닌 또 다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대범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달라진 자신의 삶을 인식했다.

 그러고 보면 의문스러운 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본 비행기 추락 시 빠르게 다가서는 초록의 광채만 봐도 로운인 범상치 않은 아이가 분명했다. 게다가 친가나 외가 쪽도 있을 텐데 태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데려온 것도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LU798기 추락 보도를 되돌려 생각하면 비정상적이었다. 몇몇 유튜브에서 추락 원인과 관련된 음모론에 열을 올릴 뿐이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아기에 관해선 단신 보도로 마무리됐다. 로운인 추락 현장으로 달려간 수많은 취재 기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전에도 후에도 이상하게 잊혔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믿지 않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요. 그런데 로운이 생명력 넘치는 향기로 사람을 어떻게 치유하고, 그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고, 누가 우리를 만나게 했다는 것이죠?"

 "우선 로운이부터 말해 줄게요. 로운이를 데리려 갔을 때 헬렌은 암이 온몸으로 퍼진 말기 암 상태였어요. 다 포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때만 기다리고 있었죠. 헬렌이 젖병을 물리고 씻기고 재우고 하면서 로운이로부터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향기가 나와 몸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기의 고사리손이 닿은 헬렌의 피부 곳곳엔 어김없이 데이지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헬렌에게도 진한 초록의 향기가 났죠. 그러고 암세포가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어요. 친구인 레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파리에 살던 거리의 화가인데 큰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얼굴과 몸이 뒤틀리고 오른쪽 손과 다리가 마비됐죠. 심각한 뇌졸중 상태였죠. 더는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커녕 살아가기도 벅찬 상태였는데 로운이가 치료해줬어요. 그 후로 레오는 로운이에게 그림을 가르쳐줬고, 둘은 가끔 센트럴파크로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죠. 마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는데, 부인이 이미 둘씩이나 있는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팔려 세 번째 아내가 될 처지였죠. 그녀는 집안사람들 눈을 피해 도망치다 신의 이름으로 벌인 길거리 자살 폭탄 테러로 만신창이가 됐죠."

 그는 설득력 있는 말투로 힘주어 말하지 않았다. 지난 흥미로웠던 추억을 끄집어내듯 물 흐르듯 순조로웠고 그리움이 배어있었다. 듣는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의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됐다.

 "로운이가 아기 때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헬렌과 내게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고 했어요. 반짝인다는 것은 순전히 아이다운 표현이죠. 나 같으면 빛나는 것이라 했을 덴데... 하여간 아직 혜림을 포함해 7명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어요. 간혹 뿌연 것이 보인다고 했지만, 그조차 매우 드물어요. 우린 그것을 영혼으로 추측했지만 확실하지 않아요. 사후 세계와 전생, 환생 같은 것들은 밝혀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죠."

 영혼이란 말에, 그녀는 그때 귓가에 속삭였던 환청과 집요하게 쫓아왔던 차가운 형체가 퍼뜩 떠올랐다.


 그래,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해.

 맞아, 영혼은 언제나 진실의 길로 안내하지.

 영혼은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니지...

 대부분 그냥 생명체일 뿐이지...


 '그럼 그게 전부 현실이었단 말이야!'

 영혼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속삭임과 그의 추측은 이번에도 정확히 일치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파랗게 질려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하마터면, 그 충격에 카린은 그녀를 안은 상태에서 의자와 함께 뒤로 갸우뚱하며 넘어가려 했다.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그가 휘청이며 재빨리 일어나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 잡아 중심을 잡았다.

 "그게 다 사... 사실이었어!  정말 영혼이 맞아요. 무서워요."

 그녀는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달달 떨었다.

 "얼마 전 여기 찾아오는 그 날 무슨 일 있었죠?"

 그가 겁먹은 어린아이 다루듯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물었다.

 "몹시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형체가 나타났고, 내 몸 안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죠. 그때 전에 듣던 환청이 들렸어요. 차가운 것이 영혼의 냄새를 맡았다고 하면서 영혼을 지키려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있는 이곳으로 가라는 소리였어요. 여긴 안전하다고 했죠. 난 그것을 여태껏 환영과 환청이라 생각했고요."

 "그 차가운 것이 하나였어요. 아님 여럿이었어요?"

 "하나 여럿?.... 하나 같았어요. 기괴한 형체를 알아요?"

 "5년 전 뉴욕에서 나와 로운이 그리고 헬렌도 그것들을 봤지만 정체는 모르겠어요. 그러다 없어졌죠. 혜림이 본 것처럼 몹시 가웠어요.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시종일관 분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투 차가운 형체를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바싹 끌어안았다. 그의 거침없는 의지가 그녀를 감쌌다. 그가 바로 숲속의 거친 사냥꾼이었다.

 카린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 했을까?

 해맑고 순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이 깊고 강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토록 강한 사람이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그가 반드시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것들이 없어졌다고 단순히 생각했지 '없어졌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알아채지 못했다.

사실 그는 '없어졌다'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이 짐승을 볼 수 있고, 로운이 치유와 반대되는 능력도 가졌고, 차가운 것들의 생김새와 뱉어낸 말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그녀에게 지금 알려준다는 것은 무척 곤란한 문제였다.



 그가 의자를 서로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옮겨 놓자 그녀가 다시 앉았다. 혜림은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 그의 투박한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이렇게라도 해야 놀라운 이야기를 마저 들을 수 있을 듯싶었다. 그녀가 들을 준비를 마쳤다는 표시로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이제 계속해서 말해줘요?"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가 그랬는지는 알아요. 루시안이란 사람이고 그는 60년 전, 헬렌이 5살 때 처음 만났어요."

 "루시안은 카린과 로운의 성씨이고 헬렌 집안의 성씨가 아닌가요?"

 "아뇨. 헬렌 부모님의 성은 존슨이에요. 우린 그를 루시안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때가...."

 카린은 오래전부터 자신과 주변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화를 들려줬다. 미스터리물과 판타지를 합쳐 놓은 이야기에 그녀는 순간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들어야 했다. 워낙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이 있었기에 그가 이야기하면 그녀는 나름대로 정리해서 되물었고, 그때마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헬렌이 5살 때 루시안을 놀이터에 처음 만날 땐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면, 지금쯤 백 세가 가까워야 하는데 헬렌과 나이대인 육십 대 중반으로 보이고, 그가 가난한 헬렌 부모 명의로 건물을 사주고, 15살 된 카린이 그 집에 들어가기 15년 전부터 카린 루시안과 브리지트 루시안이란 여자아이가 서류상 살고 있었다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카린과 브리지트가 태어날 때부터 쭉 지켜봤단 의미고... 헬렌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루시안의 본래 모습은 젊은 사람이라고 언젠가 로운이 말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 집에 처음 도착하고 얼마 후 헬렌이 영어 이름을 정하라고 했어요. 좀 전에 말했듯, 간혹 '깨어나 카린'이라는 소리가 허공에서 울리듯 들렸어요. 그래서 철우란 이름을 영문으로 쓰지 않고 카린으로 바꿨죠. 당시엔 어려서 몰랐어요. 카린과 브리지트, 두 사람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을요."

 "그럼 브리지트는 만나봤어요?"

그녀는 내심 둘이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카린이 만났다고 하자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은근히 실망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처음 봤을 땐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가 브리지트인지 몰라봤어요. 두 번째 만났을 때 비로소 그녀가 내 영혼의 짝이란 것을 알았죠. 매 순간 간절히 보고 싶었고 함께하고 싶었어요. 이성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어젯밤 고백을 했죠.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쓰라린 대답을 각오하고요. 그러자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줬어요. 그리고 우린 함께 밤을 보냈고, 방금 그녀의 꿈 이야기를 듣고 브리지트라는 것을 알았죠."

 그가 말을 마치고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그러자 미스터리물로 엉켜있던 그녀의 뇌가 정지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남자가 왜 그렇게 능청스러워요. 지금도 푹 빠졌는데 더 빠지게 만들고."

 그는 정말이지 사랑을 기다리게도, 지치게도, 의심하지도 않게 할 남자였다. 미소를 잊지 않은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목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진한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그를 아는 세상의 여자들은 린다 빼고 모두 바보라 생각했고 자신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제거하고 맑은 영혼의 눈으로 바라봐야 보이는 남자였다.

 그녀는 초현실 미스터리물이고 뭐고 간에 자신이 영혼을 가진 브리지트라는 것에 무조건 흥분됐다. 그와는 루시안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다. 그리고 그가 15살 나이에 집을 나와 철우라는 이름을 버리고 카린 루시안이 됐듯, 자신도 김혜림이란 이름을 버리고 브리지트 루시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학대받던 시절의 이름으로 계속 불리는 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멈췄던 대화가 이어졌다.

 "정말 알 수 없군요. 루시안이 속 시원히 말해주면 될 것을, 마치 잘게 조각난 복잡한 퍼즐을 짜 맞추는 느낌이에요. 루시안은 그 퍼즐을 우리가 맞추길 원하고요. 완성됐을 때야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겠죠. 카린이 인류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그것 때문인가요?"

 그녀는 어느새 수수께끼를 푸는데 합류해 적극적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혹시 브리지트라는 이름에서 뭐 떠오르는 것 없어요?"

 그가 묻자 그녀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고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브리지트요?"

 "맞아요, 켈트족이 북유럽에 나타나기 훨씬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환상의 여신이자 여왕의 이름이죠. 내가 19살 때로 기억해요. 거실 테이블에 두 개의 작은 목함이 놓여있었죠. 루시안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가끔 불쑥 나타났죠. 목함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링 반지가 각각 들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알 수 없는 문자가 다르게 새겨져 있었어요."

 반지라는 말에 그녀는 꿈에서 본 브리지트가 반지를 살펴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목울대의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그가 계속 이야기했다.

 "헬렌이 잠시 살펴보더니 그중 하나를 냉큼 집어 껴보곤 이 반지는 자신이 끼어야겠다고 하자 루시안은 그러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머지 반지는 누구것이냐고 묻자 루시안은 말했어요. 오래전 어떤 멍청한 대장장이가 만든 반지인데 영혼의 전쟁으로 사라진 브리지트의 것이라 하면서 그녀는 사람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떠올리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어요. 난 그 반지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훗날, 그 목함을 연구소에 가져가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을 해봤어요. 반지는 생물이 아닌 광물이라 연대측정이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그랬더니 그다지 낡지도 않은 것이 만 년 전 만들어진 것이라 나와 다른 곳에 가져가 측정해봐도 결과는 매번 같았죠."

 반지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그녀 또한 다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에 울음기가 차올랐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유치한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숲속의 사냥꾼 카린이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 브리지트에게 다시 끼워줘요."

 "다시 끼워줄게요."

 "그날은 멋진 리시안셔스 꽃다발도 직접 만들어준다고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그녀는 이제 이야기의 놀라움보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유치한 사랑놀이와 그 유치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전공한 세계사 알고리즘에 미스터리 명령어를 넣어 분석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그렇다면 신석기 초기 시대까지 영혼과 관련된 알 수 없는 초문명이 존재했고, 카린과 로운 그리고 브리지트는 그 초문명에 속해 있었고, 기독교와 연관 짓자면 천지창조(BC 4025년경)보다 앞선 6천 년 전 영혼의 전쟁이란 큰 사건이 일어났단 뜻이에요. 당시 그 초문명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인류는 별다른 이유 없이 급속히 발전해 청동기를 거쳐 철기시대로 빠르게 접어들었거든요. 루시안이 말한 그 영혼의 전쟁은 당시 원시 인류에게는 신들의 전쟁으로 비쳤을 것이에요. 그런데 만약 영혼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로운이 말대로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대혼란이 일어나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신의 이름과 사후 세계를 빙자한 종교 행위들은 어리석은 죄악과 무지로 변하죠. 영혼이 있는 극소수의 우린 어떤 신도 섬기지 않으니까요. 정말 그렇게 된다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기념일도 없어지고, 전직 성직자 출신 실업자가 넘쳐나고, 사람들 간의 대화나 책에서 '영혼의 울림'이란 당찮은 소리도 사라지겠죠."

 인류 역사에서 종교가 끼친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그녀다운 분석이었다.

 "고대 문헌과 유적을 뒤져 나름대로 찾아봤어요. 카린은 용과 함께 다니는 시작의 바다에서 온 사냥꾼이고, 로운은 생명의 숲을 가꾸고 지키는 전사였어요. 물론 과장되게 짜 맞춘 전설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브리지트를 포함해 그들은 분명 어떤 식으로도 존재했고 이름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죠. 늙지 않는 루시안과 초록의 향기를 지닌로운이 능력만 봐도 그렇잖아요. 설마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그는 자신도 그 부류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빼놓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도 원래 그리스인이 아니에요. 그녀는 고대 이오니스(현재 터키가 있는 아나톨리아의 서부 연안) 통치자인 부족장의 딸이었죠. 그러다 대지의 모신이 됐고 미케네 문명 이후 그리스 본토로 전파됐다고 알려졌어요. 그들이 신이 아니더라도 존재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 없어요. 그들은 현대 과학으로도 밝혀낼 수 없는 능력을 가졌고, 카린의 말처럼 지금도 어디엔가 존재해요."

대화하는 그녀의 눈빛은 흥미진진하고 차분했다. 좀 전에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꽃집 문이 열리면서로운이 부루퉁한 모습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번갈아 째려보며 툴툴거렸다.

 "어젯밤에 심상치 않더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브리지트라 불러야 하나?"

 로운인 지난밤 카린이 그녀와 함께 들어오지 않은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추측해 낼만큼 영악했다. 로운이 아는 카린은 한 번도 이성에게 마음을 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성인이 미성년자에게 허락받고 외박할 수도 없고..."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미성년 여자아이를 밤새 혼자 놔두는 것은 되고?"

 둘의 말싸움은 항상 그렇듯 승리자는로운이였다. 로운이 카린 옆에 바싹 붙어 쑥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안기며 말했다.

"우리 가족이 돼줘서 고마워요. 나도 아줌마 아니 브리지트가 좋아요. 새벽에 헬렌에게 전화했어요. 브리지트가 드디어 나타났다고요. 모두가 어서 빨리 보고 싶어 해요."

고작 열여섯 살 된 아이의 말이라기보다 영혼을 가진 자만이 낼 수 있는 울림이었다. 순간 그녀의 가슴 안에서 쩡하고 뭔가 부서지며 웅크리고 있던 어마어마한 것이 깨어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여태껏 학습됐던 것들이 그보다 한참 우월한 무언가에 의해 교체당하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멀거니 서서 꼼짝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만년을 정처 없이 떠돌며 기다리던 브리지트의 눈물이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미니 크로스 백이 심하게 떨면서 소리가 났다. 그녀가 전에 들었던 환청이었다. 이번엔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그만 꺼내 줘.'

 '우릴 꺼내서 로운이에게 돌려줘.'

 '우린 로운이가 남겨놓은 상념과 기억이야.'


 그녀가 백을 뒤지다 안 되겠는지 테이블 위에 쏟았다. 립스틱, 마스카라, 콤팩트, 휴대용 티슈, 손수건, 스마트 폰이 보였다. 그녀들이 볼 때 필요한 것 이외엔 별다른 것은 없었고 그는 뭘 저렇게나 많이 가지고 다니나 싶었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로운이 크로스백 속주머니 지퍼를 열고 핀 귀걸이 한 쌍을 꺼냈다. 처음 만나던 날 그녀한테서 떨어져 나와 로운이 발밑으로 튀어온 하얀 진주 방울 귀걸이였다.

 "오래전 유럽 여행 중 길거리 좌판 은빛 머리 노파에게 샀는데,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어요."

 "은빛 머리요?"

 "네, 약간 묘한 느낌이 드는 노파였어요."

 "로운이를 데리러 갈 때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공항에 마중 나온 젊은 여자도 은빛 머리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마날을 데려온 중년 여자도 은빛 머리, 그리고 귀걸이를 판 노파도 은빛 머리라면 루시안의 작품이죠."

 카린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 쳤다.

 "하긴 손톱보다 작고 얇은 반도체에 기억을 집어넣는데 초문명이라면 그 정도는 우습겠죠. 그리고 정말 내게 행운을 가져다줬고요."

 그녀가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발칙한 용기를 가진 브리지트의 영혼이 깨어난 그녀는 한결 여유로웠다.

 로운인 핀 귀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로운의 손바닥에 있는 귀걸이를 양손 검지와 엄지로 하나씩 집어 귀에 끼워주려고 했으나 로운인 귀를 뚫지 않았다. 뚫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잠깐 망설이던 찰나 귀걸이는 그녀의 손을 떠나 로운이 귓불로 옮겨졌다. 한쪽은 붉은색으로 다른 한쪽은 푸른색으로 바뀌면서 씨앗이 발아하듯 커다란 꽃이 서서히 피어났다. 그녀가 꿈에서 본 푸른 각시투구꽃과 붉은 데이지꽃이었다. 그녀는 숨죽여 지켜봤고, 그는 길 가다 멈춘 구경꾼 표정이었다.

 잠자코 있던 로운이 실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또 뭐 대단한... 하다못해 머리칼이 초록으로 변하고 광채가 나를 감싼 다음 몸이 붕 떠올라야 하는 것 아냐? 발음도 이상한 이해할 수 없는 문자만 잔뜩 떠오르고...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러길래 넷플릭스 좀 그만 봐."

 카린이 말했다.

 그녀는 터무니없는 대화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봤다면 분명히 신과 연결 지었을 신비로운 광경에도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들에게 초현실적이란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가늠할 수 없는 낯선 광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문자가 반지에 쓰여있는 모양과 같고, 두 단어의 발음이 똑같아."

 로운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똑같아?"

 카린이 물었다.

 "응, 아틀란과 하르므깃돈은 현재도 쓰잖아."

 아틀란은 상상 속의 고대 초문명이고 하르므깃돈은 요한 묵시록에 단 한번 언급된 인류 최후의 심판인 아마겟돈의 정확한 발음이었다. 켈트족 전설과 히브리족 성서도 모자라 이젠 상상 속의 초문명 아틀란까지 등장했다. 카린처럼 그녀의 본능 또한 세상을 뒤집어 놓을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고, 하루라도 빨리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는 열정과 긍정의 힘이 솟아났다.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카린을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로운인 그들의 애정행각엔 관심 없었다. 뒤 벽면에 걸린 거울 앞에서 꽃으로 피어난 귀걸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옆머리를 길게 땋아 귓불이 드러나고 앳된 얼굴에 건강미 넘치는 체형을 지닌 로운이와 무척 잘 어울렸다. 어린아이 죽먹만한 커다란 귀걸이였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순간 로운이 동작을 멈추고 두 눈을 깜박거리며 뭔가 떠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잊고 있었던 자신의 기억을 쫓아가는 듯했다.

 "어?.... 카린 박스 안에 꽃들 좀 꺼내 줘."

 로운이 말하자 그는 입구 한편으로 치워놓았던 커다란 박스를 작업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열었다. 거긴 엔 그녀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화사한 꽃은 없었다. 종류별로 신문지에 둘둘 말려 누워있는 꽃들은 시들었고 어떤 것들은 이파리와 꽃잎 끝이 검게 변했다. 그가 차곡차곡 겹쳐놓은 프라스틱 양동이를 가져와 종류별로 담아 테이블 위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노란 수선화, 연분홍 튤립, 붉은 장미, 하얀 리시안셔스, 파란 샤프란 등이었다. 그녀는 로운이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하자 말아쥔 손에 땀이  정도로 흥분됐다.

 로운의 몸에서 강한 생명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넘실거렸다. 진한 초록의 향기기 쏟아져 나왔다. 낡은 것들은 모두 사그라들고 새로운 이파리와 꽃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잭크의 콩나무처럼 불쑥 불쑥 자라나 빈공간을 채워갔다. 꽃 보관 냉장고 유리문이 버티다 못해 터져나갔다. 모든 식물이 넝쿨처럼 휘감아 돌며 꽃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계속 터뜨렸다. 미니 화분에 담긴 난쟁이 선인장조차 굵어지며 어깨높이까지 자랐다. 그녀가 꿈에서 본 경이로운 장면 그대로였다. 숨 쉴 때마다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향기가 그녀의 폐로 한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강한 생명력은 작은 공간을 아마존 정글로 만들고서야 겨우 멈췄다. 마치 인류가 사라진 세상을 가정해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초록의 향기는 다시 로운이에게 빨려 들어가고 귀걸이는 붉은 점과 푸른 점으로 변해 귓불에 보일듯 말듯 찍혀있었다. 바닥은 깨진 화분과 유리 조각으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두 개의 꽃 보관 냉장고는 처참하게 박살 났다. 대충 둘러봐도 멀쩡한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로운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걸 언제 다 치워..."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벌써 1시야, 나 배고파, 고기 먹으러 가."

 "이 상황에서 그 소리가 나와?"

 "어차피 브리지트도 만났으니까 뉴욕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아? 그리고 야채나 채소 먹으러 가자고 할 수 없잖아. 얘네들도 있는데..."

 로운이 부쩍 커버린 식물들을 가리키며 말했고 카린도 그 부분에 대해선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들은 꽃과 식물을 아끼고 사랑해 채식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 같았다. 물론 자신도 고기를 좋아했다.

 "삼겹살은 쌈 싸 먹으면서..."

 카린이 구시렁거렸다.



 늦은 밤, 그녀는 잠을 자려고 했으나 생각을 끄지 못해 잠이 오지 않았다. 기괴한 세상에서 나와 기묘한 세계로 들어왔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놀라운 일들이 아침이 되면 꿈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좀 전에 섹스를 끝내고 자신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곤히 잠든 카린을 쳐다봤다. 멀리 돌아서 그에게 돌아온 느낌처럼 익숙했다. 카린도 로운도 자신을 브리지트라 불렀다. 그는 멋진 가족을 만들어 놓고 미지의 존재인 자신을 기다렸다. 남성성을 참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고, 그의 손을 알몸인 자신의 가슴에 올려주었다.

 어느새 그녀도 잠이 들었고 그때 그 숲속 공터에 서 있었다. 나무둥치에 있던 그들이 일어나 다가왔다. 여자가 말했다.

 "내가 브리지트고 내가 너야."

 "알아."

 "난 카린을, 그는 브리지트밖에 몰라."

 브리지트는 웃으면서 맑게 빛나는 둥근 빛으로 변해 그녀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옆에 있던 숲속의 사냥꾼 카린이 다가와 껴안았다. 그녀가 꿈에서 깼다.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카린이 자신을 껴안고 자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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