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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Oct 09. 2020

이젠 영화를 봐도 눈물이 안 난다



그는 영화도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 몇 년째 TV가 없다. 그렇다고 영화관도 가지 않는다. 서울 집 앞,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L 시네마가 있다. 그래도 안 간다. 가족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넷플릭스가 있지만, 그가 보고 싶은 영화는 그다지 없다. 그가 딱 하나 즐겨보는 영화가 있다. 누구나 잘 아는 미드처럼 시리즈 물이다. 처음엔 장르가 신파극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영화 속, 주인공과 되바라진 세상은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었다. 11살 나이에 못 견디고 집을 나갔다. 건물 틈새에서 밤을 새웠다. 춥고 배고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자,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한다며 약을 주었다. 아이는 저 약을 먹으면 죽음이라 생각했지만, 키워준 사람들이 무서웠고 형제라 여기던 아이들의 비웃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이는 모두를 보지 않고 모두는 아이를 쳐다봤다.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잠깐, 죽음은 차갑고 어둡다는 생각에 겁을 냈다. 곧 덜 차갑고 덜 어두운 쪽을 선택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론, 그 약은 극약이 아니어서 아이의 육체는 죽이지 못했다. 대신 정신을 죽였다. 그들이 원한 것은 복종이었다. 거기까지였다. 그는 회차가 거듭될수록 신경질 났다. 어렸을 때는 세상 물정 모르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그렇다 쳐도 커서도 저 모양이다. 허구한 날 당하고도 화낼 줄 모른다. 아니 속으로 삭인다. 한번 죽은 정신은 회복하기 힘들어서다. 그게 더 꼴 보기 싫었다. 신데렐라 가련 코스프레하는 것 같았다. 조연들도 마찬가지다. 흔한 드라마 속 민폐족도 저러지 않는다. 그는 보면서 혼자 구시렁거렸다.


〈주인공〉
아니 왜 말 못 해? 어차피 순수한 의도가 아닌데. 굽신거린다고 저들이 알아주니. 그때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해야지. 저들은 아무 말도 못 해. 그들은 알고 있어, 너의 약점이 정 많고 착하다는 것을. 가끔 잘해주는 것은, 그들도 양심은 있어서 그래, 그것을 넌 차별이 아닌 사랑이라 착각했어. 하긴 어렸으니까. 그래서 16살부터 주말과 방학이면, 하루 4시간도 못 자고 일했니. 이십 대 중반에 번 돈으로 차는 왜 사줬니. 아이는 왜 키워주고 대학 학비까지 대주었니. 누군가 결혼하면 통장 다 털어주고. 넌 언제까지 그럴 건데…….

〈조연 1〉
절대로 그 남자는 아니야, 생각해봐 온종일 자기 아버지 회사 얘기잖아. 독립운동이라도 했니. 우리 엄마 착해,라고 할 때 그만뒀어야 해. 개인 과외 교습받고 어학연수 다녀오고 명문대 못 가면 바보지. 여행은 제 돈으로 갔어? 그걸 경험이라고 해야 해. 지가 타는 페라리 쇳덩이보다 못한 놈. 자랑할 것을 자랑해야지. 돈 벌지 않으면 재벌 이세도 가난한 게 정상이야. 만나도 저런 멍청이를 만나니. 헬스장에는 왜 그렇게 오래 있는데, 고릴라 몸통이 남자다움이야. 내가 보기엔 유인원 같다. 정작 육체노동엔 그런 근육은 필요 없어. 지금에야 못 만나서 죽은 귀신처럼 굴지만, 내일도 그럴까? 아무 때나 그 어벤저스 한 표정은 또 뭐야, 누가 보면 우주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다. 차라리 묵묵히 바라만 보고 말도 못 거는 그 얼굴 시커먼 바보가 나아…….

〈조연 2〉
저 여자는 그녀가 될 수 없어. 허영에 꽉 차 있잖아. 물론, 돈은 없지. 내가 말하는 것은 SNS 허영이야. 팔로워가 뭐가 중요해. 어떻게 한번 해볼까 하는 덜떨어진 늑대들의 추앙이지. 겉으론 소박한 척, 속은 고품격 허세에 취했어. 대단하긴, 예쁘다는 것은 자랑할 게 못 돼, 노력이 아니라 어쩌다 타고난 것이잖아. 왜 타고난 것으로 귀족과 천민으로 나누니. 여기가 인도야, 불가 천민족 만들게. 지금 예쁜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진정한 아름다움은 머리칼이 회색으로 물들 때 나타나. 자유로운 영혼이 요즘 트렌드야. 이건 뭐, 너도, 나도 자유 영혼이야. 등에 날개 달린 것도 아니고. 이해만 바라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잖아. 단지,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받아 줄 쓰레기통이 필요했을 뿐이야. 처음엔 너와 난 같다고 하고 지금은 나와 넌 다르다고 하잖아. 네 옆에 있기 싫다는 거야. 뭐 쉽게 말하면 용도 폐기야. 그녀는 이제 다른 더 큰 쓰레기통을 찾을 거야. 거기다 너에 대한 미안함까지 멋지게 포장해서 버려야 하건든. 미련 갖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 뭐하러 만나…….

〈조연 3〉
머슴 구하니. 말 없고 책임감 강하고 능력 있어 보여서 했다고. 현실 도피가 아니고? 그래서 여태껏 살아보니 어때. 말 없으니까 좋아. 답답하지 않아. 돈만 벌어다 주면 돼. 불편하고 가까이 오는 것도 부담스럽지. 네가 해결해 달라고 했니, 가만히 들어달라는 소리지. 거기서 이성과 논리가 왜 나와. 하는 말이 매일 똑같지. 말이 없던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던 거야. 나이 들면 정으로 산다고. 사랑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솔직히 그게 정인지 연민인지 헷갈리잖아. 왜 툭하면 자기 부모 얘기인데. 네 부모는 어디 갔니. 명절 한 달 전부터 스트레스로 편두통에 몸살 나지.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숨 막힐 것 같지. 애는 혼자 낳고 혼자 키우니. 집에 오면 아내보다 밥부터 찾지. 아님 아이들 찾거나. 식탁 앞에서 트림은 안 하니. 이제 알겠어, 조금도 나아질 가능성 없는 사람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고역인지. 어디라도 훌쩍 떠나고, 비라도 흠뻑 맞고  싶지. 거봐,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어휴 답답해. 


그는 그 영화를 돌려가며 계속 봤다. 얼굴에 미소가 번지더니 순간 웃음이 터졌다.  주인공이 측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하고 재미있게 산다고 여다. 그는 영화 빠져들었다. 겁 많고 성 많은 존재가 시간이 흐르며 거칠고 자존감 넘치는 사람을 거쳐, 다시 헐렁하고 온화하게 변해갔다. 그러면서도 막한 세상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듯 따뜻한 감성 잃지 않았다.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주인공의 극적인 변화를 이끈 것은 제삼자인 관객의 시각이다. 주인공은 젊어서 자신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마치, 시리즈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그'라는 존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나'가 아닌 '그'라고 다. 영화는 그 살아온 이야기고, 누구나 자신만의 영화가 있.


자신이 관객이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내가 그를 바라보는 감정과 평가는 다르다. 내가 나를 봤을 땐, 우글쭈글 주름지고 못났고 상처투성이다. 간혹, 착하고 잘 참는다는 긍정적 면도 있지만,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할 수 없다. 나만 더 아프고, 더 괴롭고, 더 처절하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흔히들 경험하는 감정의 오류다. 그러나 본인을 3인칭 대명사로 놓고 봤을 땐 다르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삶은 장편 시리즈 영화가 되고 주인공이 된다. 주변인은 조연을 맡고, 살면서 스쳤던 사람들은 일반 조연이다. 물론 엑스트라도 있다.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처음엔 자기 자신만 보이고 극렬한 감정이입이 발생한다. 그러다 차츰, 자신도 가해자가 되어 남에게 상처 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대단해 보였던 주변인들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겉으로 보는 것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 혹은 조연이 왜 저렇게 엉망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지 답답해한다. 주인공의 한정된 시각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전체를 봐서다. 최악의 결과로 끝날 것을 뻔히 안다. 본인의 삶이 영화라면 냉철하게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근본적 원인은 사람 관계에서 생겨난다. 과거의 주변인으로 인한 상처가 현재를 지배하든, 현재의 주변인으로 인한 고통이든, 과거와 현재 주변인 둘 다 문제든 간에, 무엇이 어디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분간할 수 있다. 고통은 가만히 놔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썩고 곪아가다가 종착지에 도달하면 결국 비참하게 마무리한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삶을 빠르게 단정 짓지 마라. 우린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변하지 않는 주변인을 기대하기보다 자신이 변해야 한다. 고통은 끊어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용기다.


세상에는 아픔으로 무장당한 사람들이 많다.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말 한마디에도 즉각 반응하고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 주변에선, 별것도 아닌 일로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한다. 본인의 잘 못이 아니다. 정말 아파서 그렇다. 이렇듯 아닌 척하고 말하는 자들 대다수가 가해자다. 내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경고해야 한다. 그 대상이 부부, 부모, 친지, 형제라도 말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끊어야 한다. 어물쩍거리지 마라. 뻔한 결과를 알고도 그 길을 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주변의 이목과 체면은 무시해야 한다. 바로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서서히 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죄 없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돌 좀 맞으면 된다.


고통의 시작은 타인이었으나 해결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그처럼, 자신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바라봤으면 한다. 그러면 언젠가 슬프고 아픈 주인공은 사라지고 멋진 주인공이 웃고 있을 것이다. 그땐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영화는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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