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마주치는 타인과는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 걸까. 직장, 카페, 병원과 길거리에서 온종일 마주친다. 상당히 의례적이다. 카페 손님과 알바로, 환자와 간호사로, 택배 기사와 고객으로 만났다. 단답형 말밖에 섞어보지 않았다. 안 다고도 모른 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관계다. 지난주에도, 며칠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같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있다. 전생에 삼천 번의 연이 있어야 현생에 옷깃 한번 스친다는 불교의 인연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과잉이다. 고개를 까닥할 수도 있고, 상냥한 사람이라면 눈웃음도 지을 것이다. 아니면 첫 대면인 것처럼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끝낼 수도 있다. 그것도 가까이 있어야 한다. 저만큼 떨어져 있으면 불가능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시선을 슬며시 돌린다.
내가 아는 그는 손 인사부터 한다. 썩 괜찮은 방법이다. 거칠고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띠고 가볍게손을 흔든다.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상반된 행동은 묘하게 어울린다. 마치 주변 사람 의식하지 않고 짓궂게 장난치는 듯하다. 단골 카페에서 1m 간격으로 줄 서 있을 때도, 병원 처치실 앞에 서성거리며 대기하고 있을 때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들에게 붕대로 칭칭 감은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한다. 회색 머리칼의사람이인사를 건네면 검은 머리칼의 사람도 따라서 손을 흔들거나 눈웃음 짓는다. 간혹 컬러풀 한 친구들도 있다.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는 활짝 웃는다. 그렇다고 해서 끈적하게 젊은 사람 붙잡아 놓지 않는다. 오가다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시 잠깐 대화하는 정도다.
그가 고개를 까닥할 경우도 있으나 매우 드물다. 이런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은 세상과 사람을 수평으로 직시해서다. 그에게 나이와 성별은 고려할 대상도 아니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젊은 사람이라 해서, 직원이라 해서 먼저 인사하란 법은 없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 사회는 수직 문화에 철저히 길들어 있다. 내려다보고 다스리는 것을 습관적으로 굉장히 좋아한다. 위의 것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래는 떠받치려고 단단하게 경직돼있다. 중간에 끼고 밑에 깔린 자들의 살려달라는 비명과 뒤틀린 신음이 똑똑히 들린다. 일단 뭐가 됐든, 무작정 높이 올라가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자다. 그러나 막상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비좁아 터졌다. 사방이 천 길 낭떠러지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도 서로 올라가려고 아비규환이다. 간혹, 부모 잘 만나 초고속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 자랑하는 멍청이도 있다. '높다'는 것을 '신의 구원'쯤으로 여긴다. 새는 더 높이, 더 멀리 날아도 날개로 난다.
지위와 재산이 시원치 않으면 나이라도 많아야 한다. 초면에 나이 물어보는 게 미풍양속이라도 된 듯하다. 서열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참 한심한 현상이다. 세월 가면 누구나 들어가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따지고 있다. 오히려, 나이가 그만하면 불필요한 규정과 형식은 훌훌 털어버릴 때도 됐다. 그에게 젊은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삼촌, 아저씨, 형, 오빠라 부른다. 그들과도 이렇게 만났다. 처음엔 어색해했다. "꼭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사람이 사람에게 고개 숙이지 마라, 그냥 손 한번 들어서 인사해라."라고 그가 말했다. 이젠 그를 보면 편하게 손 흔들고 존댓말도 하지 않는다. 낯선 타인에서 친근한 타인으로 바뀌었다. 34살 먹은 계집애가 '삼촌 그랬어, 저랬어' 한다. 세상살이가 불치병처럼 질기고 기약 없이 힘겹다. 적어도 만나는 사람끼리만 이라도 즐거웠으면 해서다. 그와 그들은 마주 보고 깔깔거리기도 하고, 좀 더 인연이 깊어지면 감춰놓은 본인들의 속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마법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다면, 그것은 마법이었다. 회색 머리칼을 한 중년 남자 앞에서 첫 번째 그녀가 울었다, 두 번째 그녀도 울었다, 세 번째 그녀 또한 울었다. 그는 이렇게 매일매일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법이 쉽게 통하지 않는 종족이 있다. 백이면 백, 나이에 상관없이 한결같다. 남자라는 종족이다. 이들은 정말 이상하다. 처음에야 모를까, 고개 숙이지 말라 해도 그때뿐이다. 앞에선 '예'하고 나서, 다음 날이면 다시 고개 숙여 인사한다. 지적하면 히죽거리며 '아차' 하고 손을 들어 다시 인사한다. 오죽하면, 옆에 있는 계집애가 '삼촌이 싫어한다고 했잖아'라고 소리쳐도 변함없다.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일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그럴까. 머리가 나쁜가. 분명히, 여자나 남자나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차별 없이 배웠고 이 땅에서 살았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군대를 갔다 와서 그런가도 생각했으나 그것도 아니다. 아직 군대 가지 않은 놈도 똑같다. 결론은 하나다, 남자라서 그렇다. 160만 년 전, 홍적세 시절 호모 사피엔스의 DNA 구조가 진화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남자라는 종족은 특정한 위치에 올랐을 때 본능적으로 수직 사회를 지향하고 지배하기를 원한다. 이것도 아니라면, 누가 좀 알려줬으면 싶다.
타이틀 이미지/ 술가 다니엘 아샴은 인간과 건축 사이의 상호 작용을 염두에 두었으나, 예술 안목이 없는 난 단순하게 창조를 위한 파괴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