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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Nov 10. 2020

아닌 자들과의 접촉

 




휴, 그처럼 부담스러운 사람도 드물다. 까탈스럽거나 권위를 내세워서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편하게 대한다. 자주 마주치는 외국인에게도 말을 건네고 인사를 나눈다. 대화 중에 일어나는 감정에도 솔직하다. 즐거움이 가슴에 닿으면 살짝 미소 짓거나 활짝 웃는다. 물론, 아프거나 불편한 느낌도 다르지 않다. 정당하게 발생하는 모든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간혹 불편한 감정을 감추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거나 약자일 경우다. 그냥 묵묵히 들어준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좋을까. 아니다  막상 대면하부담스럽다. 서열과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다. 나이, 학벌, 지위, 재력, 유명세 등을 쏙 빼고 순수하게 사람 자체만 본다. '내가 이런 사람이요'하며 알아달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판단은 읽는 사람 맘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본인들이 과시해 봐야 허망하다. 게다가 비운다고 하더니 사람부터 비워버린 그였다. 자연스러운 만남은 가져도 형식적인 모임과 인맥은 만들지 않는다. 일 년의 반은 산골 6평짜리 작은 농막에서 혼자 지내며 농사짓고, 반은 서울 집에서 지낸다. 제 몸뚱이 꿈지럭거려 땀 흘리고 사는 자유로운 부는 원하는 게 없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사람이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알량한 권위에 기대어  몰염치하게 살아가는 '아닌 자들'이라도 말이다. 는 거칠게 무시해버린다.



아닌 자들은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악착같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뭐든 내세워 약자를 무차별하게 몰아붙여야 성이 풀린다. 그들이 하는 못된 행태를 갑질이라 부른다. 직장, 가정, 학교 등 사회 곳곳에 검은 뿌리를 뻗고 차별을 양분 삼아 자란다. 태움, 왕따, 가정폭력은 그들 놀이문화의 일종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화석처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항상 우리 주변에 있었으나 사회는 모른 척했다.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사회적 공분을 불러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드러났다. 요즘 들어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호들갑 떨지 않았으면 한다. 전부터 있었으나 쉬쉬하고 덮어두었던 악랄한 죄악이다. 학벌, 지위, 성별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파트 평수로 차별하는 사회에선 당연한 현상이다. 크게 놀랍지도 않다. 과거 사회는 깨끗했고 현재는 더럽다는 평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닌 자들에게 있어, 온순한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들 한낱 먹잇감에 불과하다. 순간 욱하는 것이, 생채기로 삼키다 목구멍에 걸렸어도 뱉어내지 못하고 참는다. 쏟아낸 날카로운 말을 정신없이 듣고만 있다. 매번 당하고도 맥없이 돌아선다. 그 순간의 부끄러움을 모면하려고 '관대와 양보'라는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스스로 위로한다. 그것은 관대한 것도 양보한 것도 아니다. 순응했을 뿐이다. 점차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취급당한다. 주면 고맙게 받고 안 주면 기다린다.



결국 참고 순응하는 데 익숙해졌다. 의지는 작고 작아지다 못해 여럿으로 쪼개져 흩어졌다. 싸워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모른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하면서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들인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눈물만 난다. 가끔 악에 받쳐 몸부림쳐 보지만 우리에 갇힌 가축이 철망에 툭툭 부딪혀 보는 실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초라한 자기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전부 본인의 탓으로 돌린다. 이제 절망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사람은 순응할 때 절망한다.



맞다 본인 탓이다. 그깟 졸렬한 아닌 자들과 싸우지 못했고, 발 높이 들고 한 발짝만 나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철망을 뛰쳐나오지 않았다. 관대와 양보는 타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해야 한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존엄한 존재는 없다. '이생망 저생즐' 하며 도 닦듯 주문 외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닌 자와 아닌 세상에 맞서려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닌 자들이 사라지지도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세상은 분명히 변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순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개별적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고 평등하다. 이 말은 1948년 UN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세계 인권선언문에도 나와 있다. 절망은 타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그가 단출하게 사는 이유도 그와 같다.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면 굳이 기대지도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타인이 측은해 보일지언정 본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항할 때 가장 아름답다.





타이틀 이미지/ 2000년, 조각가 제노스 프루다키스(Zenos Frudakis)가 만든  Freedom이다. 반항적인 노예가 억압된 현실에서 뛰쳐나와 자유, 존엄, 평등으로의 탈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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