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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ul 14. 2021

영혼의 종족- 1/n여자 이야기 편



'인간은 신을 는 것이 아니라 강한 존재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섬기는 것뿐이다' -루시퍼-



1.

 그 시각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선 성별 나이 직업으로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 밝은 LED 조명 아래 모여 다들 흔들린다. 바로 술 때문이다. 주로 저녁 식사 겸 1차를 하고 2차로 가볍게 맥주를 마시러 들린다. 그러나 그날 밤은 살짝 다를 뻔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삼십 대 후반의 여자가 흔들림 없이 걸어와 조심스럽게 앉았다. 풍겨 나오는 단정함은 그녀를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마치, 기다란 복도를 또박또박 걸어와 소란스러운 교실로 들어선 선생님처럼 차분했다.



 단정한 여자 코트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폰을 꺼내려다 주머니 앞단에 걸려 떨어뜨렸다. 여자는 앉은 채 그대로 비스듬히 숙여 폰을 주웠다. 그리고 숙이면서 딸려 내려온 귓가 머리를 다소곳이 쓸어 넘겼다. 이번엔 작고 은은한 것이 따락 하는 맑은 소리를 내며 옆 테이블 밑으로 도망쳤다.

 옆 테이블에 있던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옆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가 주웠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쳐다봤다. 뭔가 떠오를 것 같으면서도 막상 기억이 잡히지 않는지 답답해했다. 함께 있던 남자가 아이 손 위에 있던 물체를 집어 여자에게 다가갔다.

 "이거요."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의 손에는 자신의 귀걸이 한쪽이 있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빠졌음을 알았다.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양식 진주에 달랑 핀 하나 박힌 싸구려 귀걸이였다. 오래전 유럽 여행 중 샀다. 길거리 좌판 'Bringing you good luck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이라는 큼지막한 호객용 문구와 자글자글한 노파의 오묘한 미소만 아니었어도 지나쳤을 것이다.

 주워준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끼려고 했으나 귓불에 뚫린 미세한 과녁과 계속 어긋났다. 옆 테이블로 돌아가 앉은 남자가 대신 끼워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취하지 않은 척 티를 냈으나 어설펐다. 드디어 성공했다. 남자는 하얀 진주 방울이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과 잘 어울려 보였다.



 "..... 있잖아. 삼촌,  사람들은 왜 '1/n'로 살까?"

 단정한 여자 귀에 옆 테이블 남자와 여자아이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n분의 1'이란 소리를 크게 잡아당겨 듣고 집중해서 되새김질했다.

 여기서 주취 초보자인 그녀는 술 먹고 하지 말아야 중대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는 허리를 숙임으로 인해 위 속에 있는 술이 역류했고, 둘째는 집중으로 인해 소뇌와 연결된 중추신경계가 균형을 잃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가 애써 유지하려던 단정함은 여기까지였다. 휘청거리며 인도 아래 빗물받이로 뛰어갔다. 몇 번 꺽꺽거리더니 쏟아져 나왔다.

 옆 테이블에 있는 남자와 여자아이가 바라봤다. 달리는 찾길 방향으로 엉덩이를 빼고 토악질하는 여자가 위험해 보였으나 남자는 어쩔 수 없었다. 접촉하는 순간 성추행범으로 몰린다. 여자아이는 허락을 구하는 표정으로 삼촌을 쳐다봤다.

 남자는 자신의 마음과는 상반된 의사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도와주지 말라는 의미였다.

 "삼촌, 저 아줌마 울어"

 토악질하는 것임에도 여자아이는 운다고 말했다. 남자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부축해 어기적거리며 인도 위로 올려줬다. 길바닥에 쪼그려 앉은 여자의 구토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창백하고 한 손은 뒤집힐 듯 울렁이는 가슴을 집고 있었다. 보다 못한 여자아이가 그녀의 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고 지그시 눌렀다. 잠시 후, 그녀의 안색이 편안해졌다.



2.

 혜림은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 중앙에 서 있었다. 고개 들어 위를 쳐다보자 나뭇잎 사이로 어른거리는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혔고,  꼬리 달린 새가 검은 한 점이 되어 뭉게구름 속을 들락날락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귀염둥이."

 그녀는 높이 나는 새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그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 어딘가에 각인된 기억이었다.

 혜림은 어디로 갈까 망설였다. 이곳은 처음임에도, 뒤로 가면 커다란 대장간이 있는 마을이 나오고 앞으로 가면 숲속 작은 공터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앞으로 다. 예상한 대로 공터가 나왔다.

 오솔길 끄트머리를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 건너편 나무 아래 한 쌍의 연인을 발견하고 멈췄다. 둘만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바라보기로 했다.

 청순해 보이는 젊은 여자와 그녀의 보드라운 허벅지를 옆으로 베고 누워있는 거칠게 생긴 남자였다. 여자가 입은 붉은 옷은 고대 로마 시대 의상인 스톨라와 비슷했다. 목 부위가 브이자로 파인 소매 없는 원피스였고 허리엔 띠를 둘러 자연스럽게 주름이 잡혔다. 남자는 딱 달라붙는 흑갈색 가죽 바지에 목 부위가 반달 모양으로 파인 웃옷을 허리에 찬 굵은 가죽 벨트 안으로 넣어 입었다.

 여자는 자신의 손을 활짝 펴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좋아했다. 왼손 약지 손가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으로 봐서 방금 남자에게 청혼 반지를 받은 것 같았다. 여자는 누워있는 남자의 거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환하게 미소 지었고, 남자는 여자의 보드라운 다른 쪽 허벅지를 쓸었다.

 혜림은 숲속의 사냥꾼과 그를 영원히 사랑하는 여인이라 단정 지었다. 둘은 저러다 곧 흥분에 못 이겨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사냥꾼의 작고 허름한 오두막으로 달려갈 거라 여겼다. 그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으나 왠지 가슴이 저렸다.

 그때 공터를 에워싸고 있는 숲이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낡은 잎들이 몸체로부터 떨어져 사방으로 휘날리고 새잎이 빠르게 돋아났다. 신비롭고 강한 생명력이 다가온다는 느낌이었다. 혜림은 주위를 둘러봤다. 맞은편 오솔길 안쪽에서 열대여섯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땅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차올라 넘실거렸다. 이어서 숲 전체가 색색의 꽃망울을 터트리며 맑은 향기를 쏟아냈다. 혜림은 그것을 생명의 냄새인 초록의 향기라 여겼다.

 여자아이도 젊은 여자처럼 옆머리를 가지런히 땋았고 뒷머리는 길게 늘어 뜨렷다. 끝이 뾰족한 양쪽 귀에는 각기 다른 커다란 꽃 모양 귀걸이를 했다. 잘 보이진 않았으나 푸른 각시투구꽃과 붉은 데이지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세히 보려고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모두 사라지고 낯익은 공간이 보였다. 얼마나 생생했던지 꿈에서 맡은 초록의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머리맡을 더듬거려 폰을 찾아 시계를 봤다. 그녀가 일어난 시각은 오전 10시였다.



 혜림(39)은 공립 고등학교 교사고 세계사를 가르친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몽롱한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됐다. 갑자기 흉포한 비명과 함께 난데없이 머리를 쥐어뜯고 침대가 들썩일 정도로 뒹굴었다. 우선 학부모와 학교 관계자라도 봤으면 어쩔까 싶었다. 정말 망가진 모습이었다.

 이어서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하필이면 저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곱창구이를 먹었다. 토한 것도 모자라 여자아이 발에 튀었고, 남자는 휴지로 아이의 신발을 닦아주었다. 무척 고맙고 미안했으나, 자신이 끔찍한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의 조연들까지 싹 다 지우고 었다.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찾아 방을 나왔다. 널찍한 아파트는 썰렁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스웨터를 걸치고 나왔다. 남편 태훈(44)은 토요일 아침이면 피트니스 센터로 가고, 일요일이면 본가 근처 교회에 간다. 아마도 운동하러 나가면서 보일러를 외출 모드로 해놓았다고 여겼다.

 시중은행에 다니는 남편과 교사인 그녀의 수입으로도 38평형 아파트 대출금을 갚고 시댁까지 생활비를 보태려면 절약해야 했다. 혜림의 남편은 위로 누나가 둘이 있는 외아들이다. 부부는 아직 아이가 없다. 그녀는 양육에 들어가야 할 비용을 대신 시댁에 준다고 합리화시켰다. 잘난 아들에게 애착이 심한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그녀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라도 타협해야 했다.

 혜림은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타서 화이트 그레이 톤 가죽 소파에 깊숙이 파묻혔다. 소파에 베인 차가운 한기가 등으로 스며들어 짧게 움찔거렸다. 한 모금의 커피 향이 그녀의 목젖을 통해 위 속으로 들어가 전신으로 뜨겁게 퍼지면서 한기를 뿌리쳤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꿈에서 맡은 초록의 향기가 커피 향보다 진하게 났다. 그녀는 킁킁대며 향기 나는 곳을 찾았다. 몸에서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향수는 아니었다. 이 향기에 비하면 백화점 진열대에서 파는 고급 향수는 병에 담아놓은 그저 그런 냄새에 불과했다. 어젯밤 어디선가 묻혀 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씻으러 욕실로 갔다.



 "1/n..."

 욕조에 몸을 담근 혜림은 여자아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술기운에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교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그 나이에 술 취한 낯선 여자를 스스럼없이 도와줄 수 있는 당찬 아이가 몇이나 될까?

게다가 어른도 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발칙한 아이였다.

 물론 그녀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혜림은 1/n의 확률도 힘든 여자였다. 한 번에 수억 개씩 남편의 정자가 몸속으로 들어와도 수정되지 않았다. 여자 나이 39세면 난자는 60%밖에 생성되지 않고 일 년에 평균 5%씩 생식능력은 감소한다. 결국 나이 들수록 분모인 n만 늘어난다. 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 자신과 남편 둘 다 정상이었다. 그러나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 그리고 민간요법까지 해봤어도 실패했다. 내년이면 사십 줄에 들어선다. 뿌리가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혜림은 난임에서 완벽한 불임으로 간다는 생각에 초조함을 넘어 암담했다. 어제도 다른 친구가 딴 남자와 바람피우다 임신한 것이 들통나 이혼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홀린 것처럼 무작정 걸었다. 남들은 되지 않아야 할 불륜 간에도 쉽게 임신이 되는데 자신은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도 어려웠다. 시어머니는 밭이 좋아야 씨가 잘난다며 며느리 탓으로 돌렸다.

 "1/n... 1/n..."

 그녀는 안타까움에 아랫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혜림이 욕조에서 나와 거울 앞에서 바디 오일을 구석구석 바르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 꽃문양이 언뜻 스쳐 갔다. 그녀는 뭔가 싶어 엉덩이와 허리를 한껏 젖혀 자신의 등을 거울에 비췄다. 혜림은 너무 놀라 크게 소리쳤다. 거울 속 등짝엔 커다란 데이지꽃 모양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만약 남편이 본다면 오해하기 딱 좋았다. 그녀는 다시 탕으로 뛰어들때 타월을 뒤로 엇갈려 잡고 힘껏 문질렀다.



 토요일이 돌아왔다. 지난한 주는 정말 고역이었다. 저녁마다 까칠한 때 타올로 쓰리고 아플 정도로 벗겨냈다. 밤에 남편이 요구할 땐 생리 날짜가 바뀌었다는 핑계를 댔다. 몸에서 나는 향기는 초록의 넝쿨이 되어 온 집안을 덮었다. 태초의 맑은 숲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남편에겐 새로 산 향수를 엎질렀다고 했다. 문제는 학교였다. 교실까지 향기가 퍼지고 나이와 성별 관계없이 어디서 샀냐고 물어왔다.

 시간이 지나자 등에 있는 낙인과 함께 향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기묘한 경험이었으나, 혜림은 낙인과 향기를 꿈과 연결 짓지 않았다. 낙인은 술 먹고 어딘가에 기대어 찍힌 자국일 것이고, 향기는 누군가 쏟은 값비싼 향수고, 여자아이는 도움을 줘서 꿈에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 깊숙한 곳, 슬픔에 젖어있는 무형체로 스며들었다는 것을.



 남편은 오늘도 피트니스 센터로 출근했다. 혜림에게 변화의 조짐이 감지됐다. 평소 그녀 답지 않게 무엇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눌러 놓았던 이 불쑥불쑥 뚫고 올라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둘이 살아도 할 것은 다 해야 하고 있을 것 다 있어야 한다. 38평 아파트는 단둘이 살기엔 컸다. 끝도 없이 되돌아오는 잡다한 집안일, 교회 나가지 않는 며느리의 불임을 죄악과 회개로 연결 짓는 열성 신자 시어머니의 설교, 시도 때도 없는 호출은 'n'이 되어 자신을 조각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림은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냉장고 세탁기 오븐 소파 등 값진 세간살이와 꾸며놓은 장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한 저것들과 별반 다름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숨 쉬고 돈 벌고 섹스한다는 것이다. 낡아지고 시시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이가 더 간절했는지 모른다.

 남편과 시어머니처럼 서로 배신하지 않고 사랑하고 보호해 줄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미래의 위험을 대비한 일종의 보험 성격이 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을 떠올렸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업무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작년엔 펀드 판매 실적이 좋아 최우수 직원상까지 받았다. 당연히 야근과 모임이 잦았으나 불만은 없었다. 아이에게 쏟을 정성을 직장과 자기 계발에 쏟는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아내인 자신에게 소홀하지 않았다. 임신에 전념하려고 학교를 그만둔다고 할 땐 경력 단절된다며 말렸다. 닦달하는 시어머니 성화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천천히 가져도 된다 했고, 기념일은 잊지 않고 챙겼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은 남편에게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인 'n'이었고, 자신 또한 남편을 'n'으로 바라봤다. 그동안 남편과 주고받았던 것들은 서로가 입력되고 짜인 방식에 따라 규격대로 행동한 것에 불과했다. 섹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때론 사랑에 겨워 미친 듯 몸부림치고 싶었으나 그와는 불가능했다. 후세를 출산하려는 의무와 부부라는 법률적 계약으로 맺어진 남녀 간의 어쩔 수 없는 욕정의 짧은 해소였다.

 그것은 팔 년 전 부부로 맺어진 순간부터 예상된 결과였고 살면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마트에서 빛깔 좋은 탐스러운 사과를 사서 한 입 베어 물어보니 맛없던 것과 같았다. 가끔은 다른 맛있는 사과를 맛보는 윤리적인 것에 벗어난 상상도 했으나 감히 시도해 볼 용기가 없었다.



 실제로도 혜림은 사과 알레르기로 인해 먹지 못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과였다. 어쩌다 한 조각만 먹어도 체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사과 씻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만 들어도 소름 끼쳤다.

 다른 하나는 종교였다. 시댁처럼 친정 부모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임에도 그녀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혜림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으러 교회로 들어가자 아기는 자지러지다 못해 결국 숨이 멈춰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자라면서 교회를 거부한다고 부모에게 혼도 많이 났다. 2남 2녀의 차녀인 그녀는 가족과 따로였다. 집에는 교회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왔고 형제들은 성가대도 하고 친구도 많았으나,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주말이면 조용히 집을 나와 도서실로 향했다. 그렇다고 공부 잘하는 우등생도 아니었다. 운이 좋아 턱걸이 성적으로 대학에 합격했고, 교사 임용 고시도 통과했다. 친구라고는 대학 때 만난 서넛이 전부였다. 그녀가 역사를 전공하고 진화론 주의자가 된 것도 나름의 반발 심리였다.

 결혼 전, 동료 교사 소개로 만난 남편은 얌전하고 내성적인 혜림이 맘에 들어 쫓아다녔다. 비록 본인은 교회를 나가지만 절대로 권유하지 않겠다고 했다. 교회서 치른 결혼식은 일종의 도피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무장갑을 낀 혜림은 팔등으로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는 손쉬운 동작 하나로 슬픔에서 빠져나왔다.

 현실에선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아, 연애하고 같이 자는 것은 몰라도 결혼은 불가능해, 부부가 상대방을 유일한 '1'로 바라본다는 것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나 감정의 찌꺼기는 남았다. 집안의 공기는 차갑게 느껴졌고, 애지중지하던 엔틱 풍 호두나무 식탁조차 무가치한 짐짝으로 보였다.

 그녀는 하다만 설거지를 대충 마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시동을 걸어 아파트를 벗어났다. 차로 1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L복합 쇼핑센터로 향했다. 일주일 치 장도 봐야 하고 다른 볼일도 있었다. 평소엔 남편 태훈과 동행했으나 그는 오후에 약속이 있었다. 그녀는 감상에 젖어 할 일을 미루는 것은 비이성적이라 배운 여자였다.



3.

 혜림의 차가 큰길로 나와 조금 달리자, 8차선 도로 양편으로 새로 지은 네모반듯한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것이 보였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이질감이 들었다. 자신은 그것 중, 더 작은 네모인 '센트럴에듀 레이크 휴먼 파크'라는 12글자나 되는 긴 이름을 가진 아파트 808동 1605호에 살았다. 굳이 해석한다면 '중앙에 호수가 있고 교육하기 좋은 인간적 아파트'란 뜻이었다.

 "이름만 좋으면 뭐 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이름이 길고 멋진 만큼 갚아 나가야 할 세월과 노고도 만만치 않았다. 모든 것이 'n'이 되어 유일한 '1'인 자신을 잘게 쪼개고 소모시키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어느 날 구부러지고 작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 여겼다. 그녀는 사회 부적응자가 된 듯 세상이 삐딱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혜림의 차가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고개를 돌려 중앙선 건너편을 보았다. 구시가지 야트막한 건물들 사이로 2차선 샛길이 나 있었다. 맛집 식당과 편의점이 있는 저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호가 바뀌자, 그녀의 차는 두 블록 더 지나 쇼핑센터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하 2층 여성 전용 구역 분홍색 라인에 자로 잰 듯 정확히 맞춰 주차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 식품 마트로 올라갔다.

 혜림은 스마트폰에 적어 놓은 물품 목록 하나하나 가격 비교해가며 카트에 담아 셀프 계산대에서 정산을 마치고 포인트까지 꼼꼼히 적립했다. 그리고는 차가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카트를 밀고 가 옮겨 실었다. 그녀는 다시 쇼핑센터로 올라갔다. 서점에 들러 수업에 사용할 예시 문제집과 다른 책도 살펴보기 위해서다. 미리 장을 본 다음 여유 있게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생활계획표 짜듯 시간을 쪼개어 사용하는 현명한 여자 이기도 했다.



 주말이라 서점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주로 아이와 엄마들이었다. 드문드문 젊은 연인과 머리 희끗한 나이 든 사람들도 보였다. 그녀는 학습지 몇 권 슬쩍슬쩍 펴보더니 망설임 없이 고르고 에세이 코너로 자리를 옮겼다. 감성, 사랑, 삶이란 단어와 어우러진 감각 있는 표지 디자인은 구매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 키 작은 소녀가 꽃밭을 거닐고 있는 일러스트 책 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살펴봤다. 첫 장부터 가슴에 콕 박힐 정도로 공감이 갔다.

 서점에서 나온 혜림은 이층 버거킹 매장으로 올라가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섰다. 그녀의 차례가 되자 자신이 좋아하는 통새우 와퍼 세트를 주문하고 '매장에서 식사'를 눌렀다. 손가락으로 누를 때마다 새로운 화면으로 교체됐다. 그러고 보면, 입력한 대로 따라서 하라는 것인지 취향대로 알아서 입력하라는 것이지 헷갈렸다. 어떤 것을 선택해도 결국 버거킹 회사에서 입력된 메뉴의 조합이었다. 속마음은 사춘기 소녀처럼 삐딱스러웠으나 그보다 통새우 와퍼를 거부할 순 없었다.

 혜림이 카드를 꺼내 결제 과정을 거칠 때 뒤에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감성 코너에 있는 책 표지만 봐도 해탈하겠다... 한 사람 사랑하기도 바쁜데 이것저것 죄다 사랑하고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그럼 삼촌은 꾸미지도 않으면서 꽃은 왜 팔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결혼은 왜 못해, 괴팍해서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할까."

 "그... 그게... 내 잘못이냐... 네가 길바닥 버린 화분 보이는 데로 주워 오는 통에... 집이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그리고 꽃집엔 여자는 안 와 남자만 오지... 여자라곤 화분 사러 오는 할머니들밖에 없는데....."

 남자가 구시렁거리자 조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야무지게 맞받아쳤다.

 자신도 표지에 끌려 책을 샀다. 한 사람 이해하고 사랑하기도 바쁘단 말은 신선했고, 꽃집엔 남자만 온다는 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장가 못 간 괴팍한 꽃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출력된 주문 대기 번호를 뽑아 돌아섰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눈치챌 수 없게끔 빠르게 흘텃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180cm 정도 키에 가무잡잡한 얼굴은 법 없이도 살 만큼 꽤 순박했고, 며칠간 수염은 깎지 않아 까끌했다. 볼 거라곤 입고 있는 체크무늬 남방셔츠 안에 숨겨진 잔잔한 근육이 연상되는 몸뚱이밖에 없었다. 빠르게 분석한 정보를 모아 보면 한마디로 단순한 사람이었다. 머리로 하는 일을 절대로 못 할 것 같았다. 역시나 여자들이 좋아할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느낌은?

 그녀의 머리는 평가 절하했지만, 가슴은 반대로 묘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본듯한 올림머리를 한 단정한 여자였고 만져보고 싶었다. 둘은 동시에 알 듯 모를 듯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남자 뒤에 바싹 붙어있던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혜림은 여자아이를 보자 절대 나서는 안 될 기억이 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놀란 행동으로 인해 남자도 알아챘다.

 "... 그... 그땐 죄송했어요."

 이 상황에서 '죄송하다'는 어휘가 정확한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나 머릿속을 허우적대다 유일하게 붙잡은 언어였다. 수치감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자는 괜찮다고 했으나 그녀가 괜찮을 리 없었다. 술 깬 다음 날 보다 지금이 백배는 더 저주스러웠다.

 


 셋은 좁은 공간에 뻘쭘하게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남자는 앞에 비켜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그녀로부터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전에 편의점 앞에서 봤을 땐 못 느꼈던 감정이었다. 

 로운이가 말한...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닌 그것 때문에 그럴까?

 남자의 표정은 좀 전에 어리숙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눈빛은 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여자아이도 생각에 빠져 있었다. 헬렌 할머니와 삼촌처럼 그녀도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편의점 앞에선 그녀 안에 있는 작고 반짝이는 것이 슬퍼했으나, 지금은 많이 커졌고 제법 강해졌다. 그 밝은 무형체로부터 '발칙' '적극' '도발'이라는 용기와 관련된 단어가 연상됐다.

 그나저나 혜림은 현재 상황이 몹시 난할 뿐이었다.

 키오스크에서 '테이크 아웃을 눌렀다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덴데.....

 혜림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카운터에서 그녀의 번호를 불렀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쩔 수 없이 다가갔다. 그녀는 통새우 와퍼 세트가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고 두리번거렸다. 빈자리를 찾는 것 같았으나, 실제론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보기에, 그녀의 상태는 지금 심각한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다.

 저래서야 원...

 여자아이는 고개를 한번 내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삼촌이 가져와... 아줌마, 우리 저기로 가요."

 여자아이가 다가와 생글거리며 말하자, 혜림은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하게 떨어져 앉느니 차라리 합석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그녀는 여자아이를 쫓아 자리에 앉았다.

 혜림은 지난번에도 도와주더니 방금도 구원자처럼 나타나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켜버리는 여자아이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지난번엔 정말 고마웠어.... 이름이 뭐야?"

 "이름은 로운이고 열여섯이에요."

 로운인 묻지도 않은 나이까지 말해 주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에 비해 키가 크고 볼륨감 있는 체형으로 인해 어차피 또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와, 정말 멋진 이름이구나"

 혜림에게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로운'이란 중성 이름과 앳된 얼굴에 비해 건강미 넘치는 몸매를 가진 여자아이에게선 깨질 것 같은 유리구두 신데렐라가 아닌 당당한 전사의 모습이 떠올랐고, 생글거리며 말할 땐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예뻤다.



 남자가 주문한 버거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와 앉았다. 로운이도 통새우 와퍼를 시켰다. 그러나 먹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버거는 절대로 얌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에 포함되지 않는다. 더구나 여기는 크기로 유명한 버거킹이었다. 소개팅은 아니지만, 한번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인 남자 앞이었다. 한입 크게 벌려 베어 물고 흘러나온 소스를 입술에 묻히고 포장지 떨어진 양상추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모습만 상상해도 최악이었다.

 버거 한번 먹는 게 이렇게 창피하고 번거로울 줄이야.....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통 새우 와퍼를 앞에 두고도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하지 말고 먹어요, 어차피 뭐....."

 보다 못한 남자가 나섰다. 퉁명스럽고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흐릿하게 끊어진 뒤 말은 알아서 생각하란 투였다. 가뜩이나 죽을 맛인데 약 올리는 듯했다.

 "아... 알겠어요, 그럼 어차피... 뭐, 망가진 것 편하게 먹을게요."

 순간 발끈한 혜림은 가늘게 째려보며 톡 쏘아붙이고 정말 편하게 먹기 시작했다. 아예, 입술에 묻은 소스는 평소에 하던 데로 혀끝을 살짝 내밀어 닦았다.

 그녀는 먹으면서 앞에 있는 남자를 흘긋 살폈다. 그는 버거를 먹으며 쟁반에 놓인 티슈로 간간이 입술을 닦았다. '티슈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은근히 신경 거슬렸다.

 혜림이 방심한 찰나 남자는 추가로 한 움큼 집어온 티슈를 몇 장을 내밀었다. 그는 앞에 앉은 혜림이 티슈가 필요해 자신과 쟁반을 번갈아 쳐다본다 여겼고, 그녀는 입이 묻었으니 닦으면서 먹으라는 무언의 소리로 들었다. 혜림은 또 한 번 째려보며 확 낚아채 입술을 닦았다. 이제 됐냐는 식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로운이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말했다.

 "저러니 여태껏 혼자 살지..."



  동질감은 사람을 금방 친해지게 만든다. 혜림과 로운은 통새우 와퍼 팬클럽 회원 같았다. 남자는 콜레스테롤 범벅인 그깟 버거 하나 가지고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거의 셰프 수준의 평가였다.

 이제 다음 동질감을 찾아야 한다. 그녀가 어떤 책을 샀냐고 물어봤다, 로운이는 꽃이 수놓아져 있는 천으로 된 에코백에서 세 권의 책을 겹쳐 꺼내 놓았다. 맨 위에 책은, 좀 전에 그녀도 산 키 작은 소녀가 꽃밭을 거닐고 있는 표지의 에세이였다. 둘은 표지가 너무 예쁘다는 등, 첫 페이지부터 감동이라는 등 몇 장 읽어보지도 않고 품평을 해댔다. 큰 여자와 작은 여자는 죽이 잘 맞는 엄마와 딸처럼 수다스러웠다.

 아래 책은 꽃과 관련된 화보였다. 로운이가 꽃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그녀는 이번에도 꽃문양 낙인과 향기를 연결 짓는 비과학적 상상력은 발휘하지 않았다.

 세 번째 책은 'Myths and legends about the Celts (켈트족에 관한 신화와 전설)'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문판 서적이었다. 삼촌 책이라고 로운이 말했다. 앞에 앉은 단순 무뢰한 남자와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

 혜림은 책을 집어 펼쳐봤다. 예상한 데로 전설의 영웅과 요정들 그림이 잔뜩 들어 있는 이야기책이 아니었다. 고대 켈트족 신앙과 생활양식에 관한 학술지에 가까웠다.

 "고대 북유럽 켈트족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로운이가 머리를 땋은 것도 그렇고요?"

 그녀는 의외라는 듯 남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번엔 남자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표지엔 '켈트족에 관한 전설과 신화'라고만 쓰여있지 고대와 북유럽은 쓰여있지 않았다. 그리고 켈트족은 머리를 땋는 풍습이 있었다. 잠깐 펼쳐봤다고 내용을 파악하긴 어려웠다. 주로 켈트족 인물을 캐릭터로 사용하는 인터넷 게임 마니아라면 모를까 일반인은 잘 알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 내용이었다. 앞에 있는 단정한 여자가 밤새워 게임하고 게임 세계관에 빠져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저... 혹시 게임 좋아해요?"

 질문하는 남자의 표정과 말투는 정말 진지했다.

 혜림은 엉뚱한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북유럽 고대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하철 게임 광고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역사를 전공했고 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쳐요."

 혜림은 동질감에 취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신나게 뱉어낸 자신의 말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인지 바로 깨닫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학교 선생이 술에 취해 길바닥에서 토악질하고 있었다.

 로운이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몇 달간 혜림은 대학에 갓 들어온 새내기처럼 정신없이 활기찼다. 로운이와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삼촌 철우로 인해서다. 휴일이면 로운이와 만나 미용실과 노래방도 가고 쇼핑도 다녔다. 이상하게 그 둘을 보면 한껏 당겨진 마음도 느슨하게 풀어졌다. 혜림은 자신이 그렇듯 체면 불고하고 수다스럽고 잘 삐치고 잘 웃는 여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함께 있으면 마냥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들을 만나면 내성적 은둔자에서 맘껏 활보하는 헐렁한 말괄량이로 변신했다. 그녀는 평생토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색다른 유쾌한 경험에 들떠있었고, 당연히 그들에 대 관심도 따라서 커졌다.

 그들은 5년 전까지 뉴욕에서 살았다. 그곳에선 꽃집을 하는 헬렌 할머니가 키워줬다고 했다. 둘은 한국으로 돌아와 편의점 옆에 꽃가게를 차렸다. 철우가 예전에 쓰던 성이 '이' 씨였다. 그래서 상호가 '이로운 꽃집'이다. 로운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 친구들보다 시간이 많았다. 주로 꽃집에서 꽃을 그리며 보냈고, 이다음에 꽃집을 한다고 했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항상 이기는 쪽은 로운이었다. 그 둘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철우는 단순하고 어설퍼 보이는 겉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꽤나 섬세하고 지적인 남자였다. 한 번은 로운이를 기다리며 그가 꽃다발을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꽃가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한꺼번에 가지를 모아 움켜쥐고, 칙칙한 검은빛 뭉툭한 소도를 사용해 빠르게 다듬었다. 잘릴 것 같지도 않은 무딘 칼날이 닿을 듯 말 듯 스쳐 가면 가지와 잎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기자랑 TV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될 만큼 환상적인 손놀림이었다. 어느새 완성됐다. 어떤 행운의 여자가 '저 아름다운 리시안서스 꽃다발을 받을까?' 하는 시샘이 났다.

 그는 인류 역사 특히 고대사와 신화 그리고 종교에 관해 상당히 밝았다. 비좁은 꽃집에 앉아 그가 머그잔에 타 준 향기로운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대화하면 시간은 모른 척 지나갔다.



 사랑스러운 로운인 기적의 아이 이기도 했다. 로운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LU798편 비행기 사고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산모에게서 태어났다. 아이슬란드 초원에 추락한 비행기 잔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지금도 음모론자들이 만든 러시아가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유튜브 동영상이 떠돌고 있다.

 그것은 한 관광객이 찍은 동영상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하늘 초록의 긴 광채가 추락하는 비행기를 쫓아가 동체에 부딪혀 빛났다. 다른 동영상에서는 초록 광채뿐 아니라 다른 색의 빛줄기도 얼어붙은 동토에서 솟아 나왔다. 물론 조사 결과 미사일이 아닌 기체결함으로 밝혀졌고 광채는 북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북극광(오로라)의 스펙트럼이었다.

 그녀는 동영상을 만든 음모론자가 못마땅했다. 본인조차 음모를 믿지 않으면서 잔인한 참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원래 믿음을 떠드는 자들이 가장 못 믿을 인간들이다. 희생자를 무시하고 유족과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 생각은 하지 않는 파렴치한 작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밝게 자랐다. 헬렌과 철우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혜림은 확신했다. 셋은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완벽한 가족이었다. 비행기 사고 후 병원으로 헬렌과 철우가 찾아와 데려다 키웠다. '1/n'은 헬렌이 로운이를  키우며, 흔들리지 말고 자유의 지대로 살라는 뜻으로 해준 말이었다.




4.

 7월 셋째 주 금요일이었다. 학교는 방학을 맞이했다. 보충수업이 없는 날이라 그녀는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폭염 날씨임에도 호두나무 식탁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이 올려져 있었다. 두 달 전 시어머니가 임신에 좋다고 지어온 보약이다. 로운이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냉장고에 처박아 뒀다가 다시 먹기로 했다. 너무 뜨거워  잠시 식히는 동안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 남편 태훈이 진급과 더불어 본사로 발령 났다. 부모 형제가 모여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호텔로 할 것인지 일반 식당을 예약할 것인지 시어머니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키지 않았으나 할 수 없었다. 끔찍이 생각하는 외아들이 진급까지 했으니 상대적으로 더 많이 부족한 여자가 됐다. 그래도 며느리라면 나서서 자리를 만드는 것이 예의였다.

  "네가 웬일이냐"로 시작한 시어머니의 말투는 매몰찼다. 전엔 원망은 했어도 이렇게 노골적이진 않았다. 요란 떨지 말고 제발 조용히 보내자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요란 야단법석은 시어머니가 떨었다. 보름 전에도 교회 모임 집에서 치른다고 해서 청소하고 음식 장만해주고 왔다. 무시당해도 애 못나는 며느리라는 이유로 삼켰다. 아니 애를 줄줄이 낳았어도 이 땅의 며느리는 조선 시대 사대부집 마님 몸종처럼 '예'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미풍양속이고 좋은 며느리다.

 "알겠어요... 들어가세요."

그녀는 화를 삼키며 고분고분 인사했다. 아랫사람이 먼저 끊을 순 없었다. 윗사람인 시어머니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 혼잣말 소리가 들렸다.

 "어디, 고장 난 여자가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와 대를 끊어 놓고...  안되면, 알아서 물러나던가....."

 심장은 유리창 깨져나가듯 산산이 조각나는 듯했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혜림은 쪼개지지 않으려는 듯 안간힘을 다해 두 팔로 양어깨를 끌어안고 벌레처럼 웅크려 엉엉 울부짖고 몸부림쳤다. 분노로 인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강한 생명력을 지닌 초록의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그녀감쌌다.



 통곡에 가까운 큰 울음 흐느낌으로 변하 다시  한숨로 뭉쳐 뱉어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눈자위는 붉었고 눈빛은 차가다. 여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한다. 좀 전엔 번개 치듯 내리꽂은 잔인한 폭력에 무방비 상태였다. 울음에 섞어 억한 감정을 모조리 쏟아내자 그녀에겐 싸늘한 이성만 남았다. 이제 거칠 것 없었다. 자신 주위로 먹구름이 모여들어 불안했으나 그것이 홍수를 일으키는 불행인지 새싹을 돋게 하는 행운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했다.

 분명히 자신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혜림은 마마보이적 성향의 남편과 시어머니 간 남다른 애착 관계를 떠올렸다. 전에도 남편의 일은 자신보다 시어머니가 먼저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시어머니가 악역을 자처하지 않았을까?

 요즘 들어 남편도 다소 미심쩍었다.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듯했고 잠자리도 기피했다. 자신과 거리를 둔다는 느낌이었다. 진급과 인사이동을 앞두고 예민해져서 그렇지 않을까 했으나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고 먼저 시부모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외아들이 자식도 없이 쓸쓸히 나이 들어가는 것이 걱정되지 않았을까?

 자신이 결혼생활 내내 남편에게 느꼈던 무미건조한 감정은 그리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해타산이 빠른 남편은 그동안 둘이 벌어 시댁에 보태주는 생활비와 이혼 위자료 문제로 고민했을 법했다. 진급과 본사 근무로 인해 사회적 위치가 확고해졌고 연봉도 올랐다. 혜림은 남편과 시댁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측해 냈다. 그들은 이미 일방적이 암묵적인 동의를 거쳤다. 남편은 사랑을, 시부모는 대를 이어 줄 여자를 택했다. 요즘 시대에 첩이나 씨받이를 둘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자신은 유일한 아내이자 며느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개념으론 자신은 수많은 여자 중의 하나인 'n'에 불과했다.

 지난 팔 년 남짓 아내로 살았고 벌어서 시댁 생활비를 부담한 수고에 대한 보답은 악랄했다. 자신에겐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거부하기도 싫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그들은 간사하고 흉포한 짐승 집단처럼 망신 주고 물어뜯을 것이 확실했다. 집안 낡은 가구 새로 교체하듯 내다 버리고 채워 넣는 식이었다.



  혜림은 자신의 판단을 검증해야 했다. 큰 시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로 같은 여자 입장에서 말해주는 큰 시누이라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차를 두고 여러 번 걸었음에도 받지 않았다. 회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혜림은 식탁 위에 있던 보약을 개수대에 쏟아버리고 냉장고에 있던 나머지 것들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보약만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남편과 시댁에 대한 미련과 감정도 덩달아 처리했다. 그들이 결정을 보았듯 그녀도 결심이 섰다. 이제 이혼 귀책 사유자를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혜림은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에 앉았다. 찔끔거리고 구질구질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전에 없던 용기가 어디서 생겼는지, 현재 그녀의 마음은 전쟁에 임하는 전사 그 자체였다. 화장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파우치에서 하얀 진주 귀걸이를 꺼내 귀에 꽂는 것으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그것을 결혼 전 유럽 여행 갔을 때 샀다. 비록 길거리 좌판에서 산 싸구려지만 은은한 빛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것을 초자연적 기운을 간직한 부적이라도 된 것 마냥 울적하거나 힘들 때 습관처럼 끼었다. 과학을 신봉하고 논리적인 그녀였으나 마음 한구석에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은빛 머리 사기꾼 노파의 말을 슬며시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 거야, 의미 없는 결혼생활은 여기서 그만 끝내야 해, 더는 끌려가며 살 수 없어 지긋지긋해...

 혜림은 소파에 앉아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용기를 북돋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천진난만한 두 아이의 속삭임이 귓속을 울렸다.

 "래,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해."

 "맞아, 영혼은 언제나 진실의 길로 안내하지."

 "영혼은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니지..."

 "대부분은 그냥 생명체일 뿐이지..."

 그녀는 자신의 내면이 스스로 응원하는 소리라 여겼다.



 그녀의 남편 태훈은 아파트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심했다. 그는 낮에 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큰누나로부터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정도면 누구라도 눈치챘을 거라 여겼다.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던 말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먼저 터뜨렸다. 아름답고 이해심 많은 착한 아내였으나 그보다 작년부터 만난 서른두 살 된 피트니스 강사를 포기할 순 없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랑했다. 주말이면 함께 교회도 갔다. 애교가 많아 교회에서 만난 어머니에게도 곰살맞게 대했다. 어머니도 붙임성 있는 그녀가 맘에 들었는지, 요즘 이혼이 대수냐며 네 맘대로 하라고 했다.

 빈틈없는 태훈은 그 안중에도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재산 분할 문제에 골몰했다. 법률적으로 명백한 외도 증거가 없는 한 귀책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혼 전문 변호사를 통해 미리 알아봤다. 적당히 반반 나누면 된다고 조언해 줬다. 어차피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고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사랑을 선택한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집으로 올라갔다.



  밤 9시가 넘어설 즈음, 태훈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와 마주친 그녀는 울어서 눈이 퉁퉁 불어 터지고 예고 없이 닥쳐온 불행에 망연자실한 모습이 아니었다. 감청색 슬랙스 정장 바지에 옅은 하늘색 와이셔츠를 넣어 입고 평소에 하지 않던 진한 눈 화장과 새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단정한 커리 우먼 스타일과 요염함이 향기와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파국을 맞이하는 사람이라 보이지 않았다. 생각한 것과 사뭇 다른 모습에 당혹스러다.

 혜림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은 이럴 경우 외면하거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도 다르지 않았다. 날카로움과 무심함 사이 어중간하게 위치한 학생주임 선생님 같은 눈빛은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얄팍한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는 것으로는 부족한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시선을 피하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혜림은 그의 그런 모습이 비굴하고 한참 멍청해 보였다. 사기 꺾인 적군 앞에 망설이는 전사는 없다. 그녀는 머뭇거릴 틈도 주지 으려는 듯 몰아쳤다.

"낮에 당신 어머니한테 이야기 들었어, 원하는 대로 해."

 감정이 제거된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원망조차 담겨있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어'라고 얕잡아 보듯 했다.

 혜림은 그가 쳐다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다가가 손목을 잡아 치켜들었다. 헬스로 굻은 심줄이 불거진 팔뚝이 맥없이 딸려 올라왔다. 태훈은 어리둥절해서 그녀와 자신의 잡힌 손목을 번갈아 쳐다봤다. 혜림은 그의 손바닥에 결혼 다이아 반지를 올려놓고 하게 손가락을 오 주었다. '이까짓 것 필요 없으니까, 너나 가져'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태훈은 예상치 못한 강경한 기세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리며  인상이 구겨졌다. 여태껏 알고 있던 여리고 속으로 삭이던 착한 아내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저렇듯 다소곳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칠까 싶은 여자였다.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억한 소리라도 질렀다면 이렇듯 쪼그라들 정도로 초라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행동과 말투엔 자신과 함께한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넘쳐났다. 자신이 보기에 그녀는 화난 것이 아니라 냉정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이토록 무시당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었나 하는 굴욕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아내에게도 다른 남자가 생겨 자신이 먼저 말 꺼내길 기다린 것은 아닌가 하는 비참한 생각도 들었다.

 혜림은 속 시원히 끝냈다는 표시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더니 휙 하고 돌아서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딸깍하는 문 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으로 들어온 혜림은 허탈감 휩싸여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벽에 기댄 채 그대로 흘러내렸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시어머니의 잔인한 말과 남편의 외도가 뾰족한 바늘이었다면, 그녀의 가슴은 불만으로 인해 팽창할 대로 팽창한 고무풍선이었다. 어쨌거나 시한폭탄처럼 곧 터질 상태였다.

 자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새로운 탐스러운 사과를 맛보고 자신은 감히 실행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미안하다는 변명과 어떤 여자인지 듣고 싶지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선택하고 행복을 꿈꿨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름도 한참 긴 아파트를 소유했고 실내를 에덴동산처럼 꾸몄으나 남편은 벌거벗은 아담이 될 수 없었고, 자신 또한 아담만 바라보는 숨길 것 없는 이브가 아니었다. 팔 년 전,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둘의 안정된 소득이 합쳐 일어날 시너지 효과에 가중치를 두어 결정했다. 애초부터 외형적 겉치레와 수치상 이익의 극대화를 따졌지 사랑과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다. 인제 와서 배신 운운하며 태훈을 탓할 자격도 비난할 이유도 없었다. 마음 가는 데로 몸도 따라간 것이다. 둘 사이에 애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혜림은 자신이 거짓과 위선 그리고 허영으로 가득 찬 보잘것없는 하찮은 여자라 생각했다.


  


 6.

 이혼 과정은 별거 아닐 정도로 복잡하지 않았다. 다음날 그가 인터넷으로 뽑아 미리 준비한 협의이혼 합의서 양식에 서명만 하면 됐다. 그리고 함께 법원에 가서 신청하고 심리 기일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책임질 자식이 없기에 한 달간 이혼 숙려기간을 받았다. 그는 상당히 꼼꼼하고 준비성 철저한 사람이었다. 한 달 숙려 기간 동안 각자 사생활에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는 서약서까지 내밀었다.

 이혼 합의서에 적혀있는 재산 분할 대금은 다음날 바로 입금됐다. 아마도 미리 본가 아파트 근저당 설정과 추가 신용대출 그리고 누나들에게 빌렸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몫은 딱 반에서 조금 더 받았다. 혜림은 빨리 끝내고 싶은 맘에 변호사를 세워 밀고 당기고 하면서 더 받아내려 하지 않았다. 아파트는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는 팔려서 돈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변제 처리하려는 계획이었다. 살면서 장만한 세간살이와 가구, 장식품은 집이 팔리고 비워 줄 때 이혼 가구 전문 취급점에서 가져가기로 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머물기로 했고, 이제 전 남편으로 불러야 하는 태훈은 본가로 돌아갔다.



 혜림은 모든 일을 부모 형제들과 상의 없이 혼자 처리했다. 명절과 행사 때만 방문하는 친정이었다. 그들도 전남편 집안과 정도의 차이일 뿐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 또한 학벌, 직업, 부동산이 행복의 기준이었고 교회가 선과 악을 판단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불행을 틈타 본인들이 저지른 꺼림칙한 죄의식을 희석하려 할 것이다. '내 딸, 내 동생, 우리 언니 인생 어떻게 책임질 거야'라고 소리치며 멱살 잡고, 이혼 위자료 협상하고, 아직 젊으니까 새 출발할 수 있다고 위로할 것이 뻔했다. 그녀는 친정만 생각하면 과거의 나쁜 기억이 떠오르는지 인상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 사람들은 그를 쉽게 비난하고 나를 억지로 위로할 자격이 없어, 전 남편과는 8년 동안 그런대로 살았지만, 그들과는 30년 넘게 한집에 살면서 없는 사람 취급받았으니까.....

그녀는 혼자 외롭게 살면 살았지 다시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학교라고 다르지 않았다. 성적과 부모 배경으로 아이들을 평가했다. 공부 못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저 그런 '1/n'로 취급하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었다. 일류 대학만 가면 모든 게 용서됐다.

 나도 그런 역겨운 자들 중의 하나였어.....

 혜림은 내 것은 맞고 네 것은 틀렸다는 이기적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겼다. 먹은 것도 없는데 수시로 구역질이 났다. 아무리 게워내도 멈추지 않았다. 학교는 수업 진행이 도저히 불가능해 병가를 냈다.



 자기혐오에 빠진 혜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의  깬 채로 지냈다. 침대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누워 헬렌(65)을 떠올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이상하게 끌리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로운이는 헬렌 이야기를 많이 했고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 화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도 결혼에 실패하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15살 된 철우를 맡아 돌봐줬고 다시 둘은 로운이를 훌륭하게 키웠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여 완벽한 가족을 이뤘어, 서로가 끌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어쩌면 자신이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도 그것이 아닐까 했다. 그들만 생각하면 왠지 안심되고 가슴이 찌릿했다

그런데 왜 연고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모국에 살아보고 싶어서 왔을까?

로운이는 자신 때문에 잠시 왔다고 하면서 조만간 돌아갈 거라고만 했지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들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 싫었다. 어쩜, 철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꽃집 벽면에 작은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 놓은 그의 문장이 생각났다.

 '수풀에 누워 별을 듣고 바람을 보고, 나무와 이야기한다.'

 그렇게 멋진 남자가 왜 여자를 만나지 못했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그 문장엔 정작 사람이 없었다. 헬렌의 조카 중에 그를 좋아하는 '린다'라는 전도유망한 의사가 있었다고 했다. 로운이가 보여준 폰에 저장된 사진에는 질투가 날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렇게 바쁜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뭔 사랑을 해."

 철우가 한 말을 로운이가 들려줬다. 보기 드문 미인이자 조건 좋은 여자조차 단번에 거절할 만큼 그는 무척 독특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들은 자신만 복잡하고 특별한 척하지만 실제론 별거 없고, 그는 감출 것 하나 없이 단순해 보였으나 오히려 특별했다.

 처음엔 로운이를 만나러 갔으나 나중엔 핑계 삼아 그를 보러 갔다. 그는 순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울 만큼 삶에 대한 철학이 선명했다. 자신처럼 세상과 타인에게 휘둘려 삶을 낭비하지 않을 강한 사람이었다. 대통령 취임 선서를 성경 에 손을 언어 맹세하는 기독교 나라인 미국에서 15살 이후로 지냈기에 혹시나 싶었다.

 "철우 씨는 신을 믿어요?"

 "강한 존재를 섬기는 것은 자유 의지에 반하죠, 난 약한 존재일지라도 무엇도 섬기지 않아요."

 그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신은 없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다고 하는 데 반해, 그는 있다 없다가 아닌 강한 존재라 표현하며 섬기지 않는다고 했다. 대답을 듣고 놀라움에 쳐다본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 순간 배우자가 있는 유부녀라는 것을 망각할 정도로 두근거렸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위험한 남자였다.

 린다도 그에게 그것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한 마음이 갈수록 커지는 혜림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처럼 많이 부족한 여자가 욕심내면 안 되는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혜림이 그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폰이 울렸다. 지난번같이 술 마시던 친구였다. 그녀가 이혼했는지 모르는 친구는 펀드 사기가 어쩌니저쩌니 오두방정 떨며 "네 남편 다니는 은행이 나온다"며 뉴스를 보라고 했다. 그녀는 폰으로 볼까 하다 작은 액정 화면 손가락으로 넘겨보기도 귀찮아 거실로 나와 리모컨을 눌렀다.

 J TV 뉴스 채널에서 전남편이 근무하는 은행 본점을 비췄다. 임원들은 기자와 인터뷰를 회피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펀드 불완전 사기 판매를 인정하냐는 기자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마지못해 금감원 판단을 기다린다고 했다.

 앵커의 멘트가 이어졌다. 은행 직원 말만 믿고 노후 자금과 퇴직금을 투자한 사람들은 깡통 계좌만 남았다고 했다. 펀드 사기 판매에 연루된 직원들은 표창장과 성과급을 받고 진급했다는 분노도 덧붙였다. 다른 뉴스 채널도 마찬가지였다, 전문 패널들이 나와 보이스 피싱과 뭐가 다르냐며 이구동성으로 비난했다.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받은 경찰이 본점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여줬다. 은행 임직원들은 회피로 일관했고 금감원과 법원 판결을 보고 보상해 주겠다는 앵무새 같은 말만 했다.

 배울 만큼 배운 그들에게는 전 재산을 날린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1/n'이었다. 공동 집단의 잘못은 'n'으로 나누어지고 희석되어 개별 당사자들은 쌀 한 톨만큼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종교와 학벌은 윤리 의식과 전혀 관계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불완전 사기 펀드 판매 뉴스는 며칠 동안 계속됐다. 전 국적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은행은 백기를 들었다. 사기 판매를 주도한 임원과 직원들은 형사 고발할 것이고 진급은 원위치시키고 성과급은 회수할 것이라 발표했다. 이제는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은행장이 책임지고 물러나는 마당에 관련 직원들도 무사할 수 없다. 명예퇴직이 아닌 불명예 퇴사를 종용받을 것이 뻔했다.

 금융권 특성상 수사를 받고 금융 사기에 연루된 사람의 자리는 없다. 전 남편을 포함한 당사자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고 억울한 항변을 할 수 있으나 통하지 않을 것이다. 외고를 거쳐 명문대를 나왔어도 거대한 사회 조직의 일개 부품일 뿐이다. 자신이 교체당하듯 그들도 새것으로 바꿔 끼면 된다. 뉴스 보도엔 과도한 성과주의를 탓했으나 근본적으로 사람을 'n'으로 여기는 사회 인식 문제였다.

 온실 안 화초로 자랐고, 자기 계발을 책으로 배우고, 헬스를 자기 관리쯤으로 여기는 전남편 태훈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혜림은 물고 물리며 물어뜯는 잔인한 세상이 무서워졌다. 한동안 못 자고 못 먹어 허약해진 육체가 정신을 지배했다. 두려움, 허탈, 혐오가 한대 뭉쳐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되어 썰물처럼 밀려왔다. 몸은 덜덜 떨렸고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기가 16층이란 극단적 생각까지 했다. 이러다 정말 실행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녀는 엎드린 상태로 억지로 손을 뻗어 머리맡 협탁 서랍에 넣어둔 파우치를 뒤적거려 귀걸이를 찾아 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러자 두 아이가 주고받는 속삭임이 또다시 귀속에 울렸다.

 "죽음을 생각하지 마."

 "영혼을 지켜야 해."

 "거기로 가... 거기로 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도망쳐, 차가운 것이 영혼의 냄새를 맡고 이리로 오고 있어."

 "그래, 거기로 가면 돼, 서둘러, 거긴 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있어."

 "맞아, 거긴 차가운 것이 올 수 없지, 거긴 안전해."

 혜림은 공포에 짓눌려 지난번처럼 내면의 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린다고 생각했다.

 한여름 8월 초순 날씨임에도 실내는 몹시 싸늘했고,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무엇이 방문 앞을 막아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 소름 끼쳤다. 소리쳐도 도와줄 사람 없는 여기서 계속 머물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높이도 버거운지 뒤로 엉금 거리며 기어 내려와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아파트를 벗어나 얼마 가지 못해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한참을 멀어져도 그 차가운 것이 폭염도 무시하고 집요하게 따라다는 느낌에 뒷덜미가 쭈뼛거렸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뒤 돌아보지 마, 차가운 것이 아직 따라오고 있어."

 "생명력으로 가득 찬 것을 생각해."

 생명력?... 가득?... 그럼 그 꿈?... 여인... 숲속의 사냥꾼... 여자아이.... 초록의 향기... 강한 생명력......

 혜림은 지난번에 꿈속에서 본 장면들을 떠올리며 계속 걸었다.

 도로는 얼마나 뜨겁던지 길가에 사람 하나 없었다. 간혹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이글거리는 땡볕에 달구어진 인도를 가까스로 걷는 여자를 딱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녀에게는 오직 살기 위해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귀소 본능만 작용했다.



 꽃집 문이 열렸다. 철우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문 앞에는 땀과 눈물로 범벅된 새하얗게 질린 여자가 곧장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는 저런 상태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인간은 최악의 순간 진실되고 위기를 모면했을 때 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아니다.'

 철우는 생각과 동시에 움직였다. 쏜살같이 다가가 팔꿈치 윗부분을 덥석 잡아 부축했다.

 혜림은 혼미한 상태에서도 쓰러지는 자신을 붙잡아 세운 그를 올려다봤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했으나 분명히 그의 순박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안심이 됐는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혜림은 철우에게 반쯤 기대어 그가 이끄는 데로 움직였다. 꽃집은 실내 폭은 매우 좁았다. 작업대 겸 책상으로 쓰는 테이블 한쪽은 벽면에 붙어있고 반대편엔 꽃 보관 냉장고와 화분들로 빼곡채워져 있었다.

 철우는 그녀를 의자에 앉혀주고 물 한잔 건네주면서 자신도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자신을 압박했던 공포가 사라지며 누적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철우가 앉은 채로 가만히 다가왔다. 혜림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품에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살며시 철우의 가슴에 기댔다. 그리고는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을 들려줬다.

 그러나 철우의 시각은 달랐다. 혜림의 눈꺼풀이 무거움을 이기지 못해 내려가며 자신에게 천천히 쓰러져 횡설수설하다 잠들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하는 두서없는 이야기는 모두 알아들었다.

 그는 혜림의 창백한 이마와 얇은 손목을 조심스럽게 집어보았다. 로운이를 부를까 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미열이 있고 맥박이 느렸으나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뜨거웠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자신을 만나러 먼 거리를 힘들게 걸어온 이 여잔 이유 없이 좋았다.




7.

 오전 7시, 맛있는 냄새가 그녀의 잠을 깨웠다. 배가 고파 눈을 뜬 혜림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낯선 방이라는 것만 인지했다. 맞은편 반쯤 열린 창밖으로 야트막한 건물 옥상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책상 위 꽂혀 있는 책이 보였다. 중 3이라고 쓰여있었다. 하얀 벽면엔 꽃 그림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그중에 푸른 각시투구꽃과 붉은 데이지꽃이 유독 눈에 띄었다. 어제 집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기억을 따라갔다. 철우를 만나 그에게 기댄 상태에서 멈췄다. 무척 포근하고 아늑했던 느낌이란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은 콩닥거렸다.

 방금 이혼하고 애도 못나는 년이 무슨...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스러웠는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기억 못 하는 상황을 추측해냈다. 그때가 오후 2시쯤이었을 것이니 열일곱 시간 동안 꿈도 꾸지 않고 잤다. 모든 단서를 조합해 보면 여긴 꽃집 건너편 건물 로운이 방이 분명했다. 그들은 8층짜리 주상복합 빌라 7층에 살았다. 자신은 스스로 걸어올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누군가 옮겨 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정말 죽고 싶었다. 눈물 콧물 땀 냄새 문제가 아니었다. 엉겁결에 뛰쳐나와 며칠 동안 그냥 입고 있던 편한 반바지 차림에 티셔츠도 그럴 수 있다 쳐도, 자신은 분명히 업혀 왔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등과 자신의 가슴 밀착이었다. 집에서 꼼작 않고 지낼 때 헛구역질 나오고 답답해서 브래지어를 벗고 생활했다. 혜림은 자신의 봉긋한 가슴을 만져봤다.

 그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녀는 창피스럽지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혜림은 오줌이 마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거의 20시간 동안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방안 길쭉한 전신 거울 속에 있는 여자는 엉망진창 수습 불가였다. 헝클어진 사자 머리에 얼굴과 목 언저리엔 땟국물 자국이 나 있고 몸에는 냄새가 났다. 이대로 나갈 수도 있을 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밖에서는 아침을 차리는 듯 달그락거렸고 둘의 말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조금 열리며 로운이 살짝 고개를 디밀어 봤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고 들어왔다. 로운인 최대한 복합적으로 망가진 몰골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웃지 마! 얘, 화장실이 어디야... 그런데 삼촌은?"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그녀에게서 입 냄새와 쉰내가 섞여놨다.

 "잠깐만요."

 로운인 무슨 뜻인지 알았다. 곧바로 나가더니 금방 돌아와 침대 아래 서랍장과 붙박이 옷장에서 갈아입을 속옷과 겉옷을 꺼내 주었다. 로운이 보기에도 저렇게 처참한 상태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와요, 삼촌은 잠깐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칫솔은 거기 있는 새것으로 쓰면 돼요."



 혜림은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마르지 않은 긴 머리를 고무줄로 대충 동여매고 식탁에 앉았다. 철우는 꾸미지 않은 그녀의 색다른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잠깐 더 쳐다봤다.

 혜림은 앞에 앉은 철우의 표정에서 지난번 버거킹에서 그가 준 핀잔 비슷한 말이 떠올랐다.

 "철우 씨, 잘 먹을 테니까, 아무 말하지 말아요."

 그녀는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는 참치와 돼지고기를 섞어 끓인 김치찌개를 얼른 한 숟가락 떠 넣었다. 지난번처럼 먹을 것 앞에 두고 망설였다간 또 한 소리 나올 듯싶었다. 뜨거운 국물과 고기로 인해 입안이 얼얼했던지 그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화를 일으켰다. 한 번 더 맛을 본 혜림은 철우를 가늘게 흘겨봤다.

 이 남잔 음식도 잘했다....

 김치가 시면 군내 나고 익지 않으면 풋내 나고 서걱거리는데, 그가 끓인 김치찌개는 먹어본 중 최고로 훌륭했다. 그녀가 솔솔 비벼 한 숟가락을 뜨자 그가 조미김 한 장을 올려주었다. 철우는 이렇게 먹어보란 뜻이었으나, 혜림의 가슴은 버텨 낼 수 없었다. 뜨거운 밥 위에 올려진 얇은 김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혜림은 방금 이혼했고 애를 못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고, 철우는 자신의 과거와 로운이의 기이함을 알고도 계속 만나 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다.

 로운이는 그녀 옆에서 조용히 밥이나 먹으며 생각했다.

 분명히 저 어벙한 두 남녀는 지금 뇌의 용량이 딸릴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소리 없이 주고받는 것이라고.

 



 8.

 아침을 먹고 철우와 로운인 쉬라는 말을 남기고 가게로 갔다. 설거지는 그녀가 한다고 했다. 둘이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자, 자신이 그들을 배웅하는 가족이라도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만찬 가지였다. 전 남편 태훈과 살 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혼자 남은 그녀는 특징 없는 실내를 돌아봤다. 22평 정도 되어 보였고 거실엔 달랑 일자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전부고 TV도 없었다. 애써 치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단출하게 사는 게 맘에 들었다. 방은 화장실을 사이에 두고 두 개가 있었고 맞은편엔 철우가 쓰는 방 이렇게 세 개였다. 습한 여름이라 방문은 조금씩 열어놨다.

 혜림은 그의 방이 궁금했다. 살며시 밀어봤다. 침대와 붙박이장이 보였고 나지막한 책꽂이가 있었다. 그녀는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책꽂이에 꼽혀 있는 책들은 주로 고대 유적과 생활양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중에 '고대 비문의 수수께끼'란 책을 뽑아 들었다. 지역별로 고대 유적 비문에 쓰인 문장을 해석해 놓은 책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추르륵 넘겨보다 펜으로 밑줄 그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슬란드 편이었다.


 '영혼의 전쟁으로 사라진 자들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깨어나면,

우리도 죽은 자에게서 깨어나 고귀한 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리라.'


  기독교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이 연상되는 비문 해석엔 '우리'에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있고 끝엔 물음표까지 달아놨다.

 고귀한 영혼을 천국도 아니고 지옥이라니?

 비문은 죽은 자의 무덤 표지석에 적어 놓은 문장인데 우리라니... 스스로 죽었나?

 그녀가 보기에도 앞뒤 문장이 맞지 않아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직역함으로써 일어난 오류라 여겼다. 그가 이 책을 읽다가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지 않았나 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운 혜림은 그가 책을 읽어도 허투루 읽지 않는다고 여겼다.



 혜림은 방을 나와 남은 방문을 열어봤다. 여행 가방 몇 개와 깔린 일인용 요가 매트 위에 20k 남짓 되는 바벨이 놓여있고 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철우가 맨몸 운동할 때 쓰는 방이라 생각하고 여기서라도 당분간이라도 지냈으면 했다. 이곳이라면 어제 철우의 품처럼 아늑하고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았다.

 11시쯤 되자, 혜림은 이 근처 오피스텔이라도 알아볼까 싶었다. 어쩌면 이 건물에도 나온 집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철우에게 물어보려고 현관을 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로운이 와 철우가 짐으로 꽉 찬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로운인 커다란 비닐봉지를 끌리듯 들었고, 철우는 뜯지 않은 새 매트리스를 붙잡고 있고, 옆에는 구멍 숭숭 뚫린 조립식 침대 받침도 보였다.

 "아... 아니, 내... 내가 여기서 지낸다는 말도..."

 혜림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한 나머지 말이 꼬였다.

 "어제 가게에서 무섭다며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그의 솔직한 말투와 멋쩍은 표정은 거짓말 못 하는 순박한 아이 자체였다. 로운이 보기도 민망한지 그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쩌면, 철우가 아는 것을 보니 자신이 말한 것 같기도 했다. 혹시나 정신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소리가 환청이 되어 영혼이 어쩌니저쩌니하면서 들렸다는 둥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라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혹시  다... 다른 이야긴 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안 했는데..."

 철우는 달리 해석하고 걱정 말라는 뜻으말했다.

 "그 말?"

 혜림은 잠시 생각하더니 철우를 확 째려봤다. 어떨 땐, 참 얄미울 정도로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로운이가 들고 있는 침대보와 이불이 들어 있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빼앗듯 집어 들고 앞장서 들어갔다. 연애 경험치가 한참 부족한 철우는 그녀가 삐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로운이가 보기엔, 단순한 저 인간에게 딱 오해하기 좋게 질문한 여자나, 오해하고 곧이곧대로 말한 남자나 둘 다 똑같았다.



 그날 오후, 혜림의 짐은 꽃집 승합차로 철우와 로운이가 날라줬다.

 먼저 살던 아파트에 함께 들어갔을 때는 부끄러웠다. 돈 들여 심히 꾸몄으나 쓸모없는 것들만 모아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귀중품은 전 남편이 처분한다고 가져갔으니 약간의 입을 옷과 노트북 정도만 챙겨서 나왔다. 나머지 쓸만한 옷들은 재활용 의류 수거함 옆에 놓았고 대부분 쓰레기로 처리했다. 나오는 길에 부동산 사무실에 들려 현관 비밀번호와 실내 키까지 넘겨주고 앞으로 전 남편과 연락하라는 말도 남겼다. 다시 올 일은 없겠지만 섭섭하기보단 홀가분하고 개운했다.  



9.

 늦은 밤, 혜림은 침대에 기대앉아 자신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변화를 실감했다. 방안에 공기는 포근했고, 창밖에선 차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면 철우와 로운이가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일어난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모든 것은, 저 둘을 만나면서 변했다고 여겼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전남편과의 이혼도 망설였을 것이다. 아니, 저들이 없었다면 정말 악몽으로 변할 수 있던 상황이었고, 전남편이 외도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사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젠장,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제야 알았어....

 그녀는 너무 늦게 안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줄리어스 시저와 나폴레옹의 화려한 욕망을 가르쳤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지로 몰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동안 시키는 데로 살아왔어, 그래야 편하게 잘 산다고 생각했지.....

 그녀는 자신 안에서 뭔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편의점 앞 밤거리 테이블에 단골손님이 하나 늘었다. 꽃집 문 닫을 시간인 밤 8시가 되면 셋은 이곳에서 모여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유를 즐겼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혜림이 제출한 사직서가 처리됐다. 돌싱인 여자가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우고 백수가 되는 무책임한 결정을 했음에도 그녀의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철우가 한 잔 산다고 했다. 그래 봐야 캔 맥주였으나 그녀에겐 무엇보다 풍요롭게 느껴졌다.

 이들과 있으면 걱정되지 않았다. 로운인 뉴욕도 함께 가자고 했고 헬렌이 집에는 방도 많다고 하며 자신을 꼭 보고 싶다는 말도 전해줬다. 철우와 로운 그리고 본 적 없는 헬렌, 이들 셋은 무척 이상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좋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좋아한다.

 나도 이들과 완벽한 가족이 되고 싶어.....



 혜림은 이곳 편의점 앞에서 로운이가 '1/n'이라고 언급한 이유를 알았다. 모두가 과도한 불안에 사로잡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것과 더 가지려 하는 부질없는 욕망이었다. 주로 주식, 부동산 등 투자와 관련되어 있거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자신이 지난 8년간 전 남편과 나눈 대화의 복사판이었다. 그것들이 인류가 도달할 최고의 이상이자 숭고한 지식이라도 된 것 모양 유창하게 떠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욕망의 크기만 작아 질뿐 사라지지 않았다. 저들은 그것을 가진다 해도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 무수한 헛된 것들이 'n'이 되어 본인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쪼개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혜림은 전에 철우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한 사람 사랑하기도 바쁜데 이것저것 죄다 사랑하고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마음조차 이것저것 나누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쏟겠다는 의미였다.

 이 남잔 진짜였어... 아직 내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남아 있을까?

 맥주 한 캔에 살짝 취기가 오른 그녀는 철우를 몽롱하게 바라봤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사냥꾼과 여인처럼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고백을 들을 수 없게 속으로 말했다.

 "당신을 보고, 당신을 듣고, 당신과 이야기하며 살고 싶어."

 철우도 혜림을 바라보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속으로 전했다.

 로운인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달아오름은 느꼈다. 양쪽에서 쏟아내는 뜨거운 열기에 데일 것 같았다. 만약 여기가 뉴욕이라면, 브루클린 브릿지의 사랑에 빠진 자유로운 연인들처럼 끌어안고 수없이 입맞춤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아무래도 둘은,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지 못할 듯싶었다. 로운인 마시던 음료수를 후루룩 마시고 먼저 집으로 간다며 길을 건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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