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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Nov 24. 2021

항정살을 굽다가 낭만을 떠올리다

<붉은 돼지>

아내가 요즘 항정살에 빠졌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지만,

단백질 섭취가 필요하다는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일부러 챙겨 먹으려 노력 중인데

먹어본 바로는 맛이나 식감 면에서 최고란다.


며칠 전에도

술안주로 마트에서 사다 둔 항정살을 굽기 시작했는데...

'구운 돼지' 냄새에 취기가 슬며시 올라오면서

문득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중년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나의 낭만에 대한 로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느 무인도.

(실제 배경은 그리스 자킨토스 섬이란다)

라디오에선 오래된 노래가 낮게 흐르고

와인 한잔에 취해

책 한 권을 읽다

편한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잔다.


이보다 더 자유로운 순간이 있을까?


하지만, 곧 전화가 울리고

주인공 돼지는 오늘도 밥벌이를 하러

붉은색 비행정을 몰고 날아간다.




이 영화는 아마도

이십 대 초반 절친 집에서 복사판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처음 봤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주인공의 오랜 친구이자

모든 파일럿들의 연인인 '지나'가 부르는 샹송에 빠져

연상녀에 대한 판타지로 밤을 새웠었다.

(절친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최근 대형 올레드 TV로 다시 보니

끝없이 펼쳐진 선명한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그 자유로운 공간을 붉은색 비행정을 타고 날아다니는

주인공이 너무나 부럽다.


그런데 왜 하필 돼지였을까?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전쟁과 파시즘이 싫어

공군 장교인 '마르코'로서 명예로운 삶을 포기하고

헌터인 '포르코'로서 한량 같은 인생을 사는 그이지만,


하루하루 먹고 놀기만 하다

운명처럼 인간의 식탁에 오르는 그냥 돼지가 아닌


열정과 낭만을 여전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치열하게 도전하며 사는 '붉은' 돼지로 살겠다는 의지겠지.




남은 후반생(後半生).


그냥 돼지로 살지

붉은 돼지로 살지...


잠깐 딴짓하는 사이

항정살이 타버려 검은 돼지가 돼버렸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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